변화의 흐름 속에서 사라지는 것들
끝없이 펼쳐진 호남평야. 수천 년 동안 이 땅은 한반도의 '밥줄'이었다. 영산강과 섬진강이 품은 비옥한 충적토는 풍요로운 농업 생산의 토대가 되었고, 서해와 남해를 접한 긴 해안선은 풍부한 어업 자원을 제공했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은 전라도의 정체성과 문화, 산업 구조를 형성해 왔다.
예로부터 전라도는 '천혜의 농토'라 불렸다. 넓은 평야지대는 벼농사에 이상적이었고, 온화한 기후는 다양한 농작물 재배를 가능케 했다. 조선시대 삼남지방 중에서도 전라도의 세금 부담률이 가장 높았던 것은 이 지역의 농업 생산성을 방증한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전라도를 한반도 농업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그러나 현대 산업사회로의 전환 과정에서 농업 중심의 지리적 조건은 점차 '제약'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이후 한국의 산업화 정책이 중화학공업과 제조업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농업 지역인 전라도는 상대적으로 개발에서 소외되었다. 수도권과 동남권이 급속도로 성장하는 동안, 전라도는 '낙후 지역'이라는 이미지가 고착되기 시작했다.
지리는 운명인가? 농업 중심의 지역이 현대 산업사회에서 뒤처지는 것은 불가피한 일인가? 이것이 전라도가 마주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 다시 정보사회로의 전환은 세계적 흐름이다. 이 과정에서 농업 인구의 감소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선진국의 농업 인구는 이미 전체 인구의 2% 이하로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이들 국가의 농업 생산성은 오히려 증가했다. 대규모 농장, 자동화 시스템, 첨단 기술의 도입으로 적은 인력으로도 더 많은 생산이 가능해진 것이다.
미국 중서부의 광활한 농경지를 생각해 보자. 아이오와나 캔자스의 드넓은 옥수수 밭에서 일하는 농부들의 수는 극히 적다. 한 가족이 수천 에이커의 농지를 관리하며, 대부분의 작업은 첨단 장비에 의해 자동화되어 있다. 이것이 현대 농업의 모습이다.
네덜란드의 사례도 주목할 만하다. 국토 면적이 한국의 1/4에 불과한 네덜란드는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농산물 수출국이다. 비닐하우스와 수직농장으로 대표되는 집약적 농업 시스템을 통해, 네덜란드는 적은 토지와 인력으로 엄청난 생산성을 실현했다.
전라도의 인구 감소는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문제'가 아닌 '자연스러운 변화'로 이해할 수 있다.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줄어드는 것은 산업구조 변화의 필연적 결과이다. 이는 비극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이며, 오히려 농업의 현대화와 효율화를 위한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지역 정책은 인구 감소를 '극복해야 할 문제'로 인식하고 인위적인 인구 유지 정책에 매달려 왔다. 각종 귀농·귀촌 지원 사업, 청년 창업 지원, 각종 보조금 정책 등 농촌 인구를 유지하기 위한 시도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러한 정책들은 전라도 곳곳에서도 활발히 시행되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의 실효성은 의문스럽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년간 전라도 농촌 지역의 인구는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2000년에서 2020년 사이 전라북도의 인구는 약 20만 명(10.6%), 전라남도의 인구는 약 30만 명(13.8%)이 줄어들었다. 수조 원의 예산이 투입되었음에도 인구 감소 추세는 멈추지 않았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러한 인위적 인구 유지 정책이 자연스러운 산업구조 변화를 저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농업의 현대화, 규모화, 자동화는 필연적으로 농업 종사자 수의 감소를 수반한다. 그런데 무조건적인 인구 유지 정책은 이러한 자연스러운 변화를 방해하고, 결과적으로 농업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소규모 농가에 대한 과도한 보조금은 영세농 체제를 고착화시키고 농업의 규모화와 효율화를 저해한다. 귀농·귀촌 정책 역시 실질적인 농업 경쟁력 강화보다는 '인구 숫자 채우기'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정책은 단기적으로는 인구 통계에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지역 경제의 체질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전라도 지역개발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포퓰리즘적 개발 정책이다. 특히 선거 시기만 되면 쏟아지는 대형 개발 공약들은 지역의 지리적 특성이나 발전 가능성보다는 표심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제시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지역에 첨단산업단지를 유치하겠습니다!" "국제공항을 건설하겠습니다!" "바이오산업 클러스터를 조성하겠습니다!" 선거철마다 쏟아지는 이런 공약들은 과연 얼마나 실현되었을까? 2000년 이후 전라도 지역 선거에서 제시된 주요 개발 공약들을 추적해 보면, 그 실현율은 30%에도 미치지 못한다.
특히 새만금 개발 사업은 포퓰리즘적 개발 정책의 대표적 사례다. 1991년 시작된 이 사업은 "동북아 경제 중심", "한국의 두바이" 등의 화려한 수사와 함께 추진되었다. 그러나 30여 년이 지난 지금, 새만금은 여전히 미완의 사업으로 남아있다. 33조 원의 예산이 투입될 예정이었으나, 계획은 여러 차례 변경되었고 개발 속도는 더디기만 하다. 이는 지역의 지리적 특성과 현실적 발전 가능성을 고려하기보다는, 정치적 효과를 위해 무리하게 추진된 개발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또 다른 문제는 '나눠먹기식' 예산 배분이다. 한정된 국가 자원이 효율성보다는 정치적 타협에 의해 분배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전라북도 14개 시·군은 각각 자체 산업단지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산업단지의 평균 분양률은 60%에 불과하며, 일부 지역은 30% 미만의 저조한 분양률을 보이고 있다. 이는 실수요보다 '우리 지역도 산업단지가 있어야 한다'는 논리에 따라 무분별하게 산업단지가 조성된 결과다.
전라도의 혁신도시 사례도 주목할 만하다. 전북혁신도시(전주·완주)와 나주 빛가람혁신도시는 각각 별도로 조성되었다. 두 혁신도시의 거리는 불과 100km 남짓으로, 하나의 더 큰 규모의 혁신도시를 조성하는 것이 규모의 경제 측면에서 더 효율적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 타협으로 인해 두 개의 중소 규모 혁신도시가 분산 조성되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발전 동력의 분산으로 이어졌다.
포퓰리즘적 개발 정책의 또 다른 특징은 단기적 성과에 치중한다는 점이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임기 내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위해 장기적 관점보다는 당장 눈에 보이는 '건설'과 '유치'에 집중한다.
전주 영화종합촬영소 사례를 보자. 1990년대 말 '한국의 할리우드'를 표방하며 건설된 이 시설은 초기에는 주목을 받았으나, 장기적인 운영 계획과 산업 생태계 구축이 미흡하여 현재는 활용도가 크게 떨어지는 상황이다. 이는 '시설 건립'이라는 가시적 성과에만 집중하고, 지속가능한 운영과 산업 생태계 구축이라는 장기적 과제를 소홀히 한 전형적인 사례다.
포퓰리즘적 개발 정책의 또 다른 특징은 지역민의 감정에 호소하는 개발 레토릭이다. "우리 지역도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아야 한다", "호남 소외를 극복하자" 등의 구호는 지역 개발의 실질적 타당성보다는 감정적 호소에 기반한다.
그러나 모든 지역이 똑같은 발전 모델을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라도가 경상도나 수도권과 같은 발전 경로를 추구하는 것은 지리적 조건의 차이를 무시한 접근이다. 특히 농업 중심의 전라도가 제조업 중심의 경상도와 동일한 발전 전략을 추구하는 것은 비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전라도만의 고유한 강점을 살리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전라도는 그동안 농업 중심의 지리적 특성에 맞지 않는 다양한 개발 시도들을 겪어왔다. 이러한 '중구난방' 개발은 대부분 지속가능성이 낮고 실패로 귀결되었다.
전북 새만금 산업단지는 국내 최대 규모의 간척사업으로 조성된 부지에 건설되었다. 그러나 2022년 기준 분양률은 30%에 불과하며, 입주 기업들의 가동률도 저조한 상황이다. 이는 주변 산업 인프라의 부족, 물류 네트워크의 한계 등 지리적 조건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결과다.
전남 영암·해남 관광레저형 기업도시(솔라시도) 역시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당초 계획은 관광·레저·주거·상업 시설이 어우러진 복합도시를 건설하는 것이었으나, 15년이 지난 지금도 계획의 대부분이 실현되지 못했다. 농업 지역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대규모 관광레저단지를 조성하려는 시도는 결국 현실과의 괴리로 인해 지지부진한 상태에 머물고 말았다.
전라도는 첨단산업 유치를 통한 지역 발전을 시도해 왔다. 전주 첨단의료복합단지, 정읍 방사선 연구소, 나주 한전공대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이러한 첨단산업 클러스터는 대부분 주변 생태계와의 연계가 부족하여 '섬'처럼 고립된 상태다.
첨단산업 클러스터의 성공을 위해서는 연관 기업, 연구소, 대학 등이 모여 시너지 효과를 창출해야 한다. 그러나 전라도의 첨단산업 시설들은 주변 산업 생태계와의 연계가 부족하여, 투입 대비 성과가 저조한 경우가 많다. 이는 지역의 산업 기반, 인적 자원, 인프라 등 지리적 조건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트렌디한' 산업을 무리하게 유치한 결과다.
전라도 곳곳에는 지역 특성과 괴리된 대형 프로젝트들이 있다. 전주 경륜장, 익산 종합운동장, 군산 세계옥외조각공원 등은 모두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었지만, 실제 활용도는 매우 저조하다. 이는 지역 수요와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표면적인 '개발'에만 집중한 결과다.
특히 농업 지역인 전라도에 대규모 스포츠·문화 시설을 건설한 것은 인구 규모와 수요를 고려하지 않은 결정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시설들은 유지·관리비만 축내는 '애물단지'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전라도의 지리적 특성을 살린 지속가능한 발전 방향은 무엇일까? 농업 중심 지역인 전라도는 농업의 고도화와 현대화를 통해 새로운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인구 감소는 불가피한 추세다. 따라서 적은 인력으로도 높은 생산성을 달성할 수 있는 농업 모델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농지의 규모화, 자동화 시스템 도입, 스마트팜 확대 등이 추진되어야 한다.
네덜란드의 사례를 참고할 만하다. 작은 국토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고 수준의 농업 생산성을 달성한 네덜란드는 첨단 기술과 효율적인 농업 시스템을 통해 적은 인력으로도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전라도 역시 농업의 고도화와 자동화를 통해 인구 감소 시대에 적합한 농업 모델을 구축할 수 있다.
미래 농업은 단순한 생산 활동을 넘어, 연구개발, 마케팅, 유통, 체험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될 것이다. 따라서 농업에 종사하는 인력도 단순 노동자가 아닌, 고도의 전문성을 갖춘 '농업 전문가'로 변모해야 한다.
전라도는 농업 관련 교육 및 연구 인프라를 강화하고, 젊은 세대가 농업을 매력적인 직업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농업의 위상을 높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전북대학교, 전남대학교 등 지역 대학의 농업 관련 학과를 중심으로 첨단 농업 인재를 양성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전라도 농업의 미래는 단순한 1차 산업에서 벗어나, 식품가공업, 바이오산업 등 2차, 3차 산업과의 연계를 통해 확장될 수 있다. 전라도의 풍부한 농산물을 기반으로 한 식품가공업은 농업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유력한 방안이다.
예를 들어, 순창 고추장, 진도 홍주 등 전라도의 전통 식품산업은 이미 상당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강점을 더욱 발전시켜,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식품산업 클러스터를 구축할 수 있다.
바이오산업 역시 농업과의 연계 가능성이 높다. 농산물에서 추출한 기능성 물질을 활용한 의약품, 화장품 개발 등은 농업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영역이다. 전라도의 풍부한 농업 자원은 바이오산업의 중요한 기반이 될 수 있다.
인구 감소를 현실로 받아들인다면, 농업 지역의 합리적인 축소와 효율화도 필요하다. 모든 지역을 동일한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은 한정된 자원의 비효율적 배분을 초래할 뿐이다.
학교, 병원, 관공서 등 공공서비스는 적정 인구 규모를 전제로 운영된다. 인구가 일정 수준 이하로 감소한 지역에서 모든 공공서비스를 유지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따라서 인구 감소 지역의 공공서비스는 거점 중심으로 재배치하고, 교통 및 통신 인프라를 개선하여 접근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예를 들어, 전라남도 농촌 지역의 소규모 학교들은 통폐합을 통해 교육의 질을 높이고, 대신 통학버스 운영을 확대하여 학생들의 접근성을 보장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 농촌 의료 서비스 역시 거점 병원 중심으로 재편하고, 원격 의료와 방문 진료를 활성화하여 의료 접근성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인구 감소 시대에는 모든 지역을 균등하게 발전시키는 것보다, 거점 도시를 중심으로 한 효율적인 공간 구조를 구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전라도에서는 전주, 광주, 목포, 여수 등 거점 도시의 기능을 강화하고, 주변 농촌 지역은 자연스러운 축소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는 주변 지역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지역 전체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전략이다. 특히 농업 지역인 전라도는 인구 밀도가 낮은 광활한 농지를 유지하면서도, 주요 생활 서비스는 거점 도시를 중심으로 집약적으로 제공하는 공간 구조가 적합할 수 있다.
효율적인 자원 배분을 위해서는 정치적 논리보다 경제적·지리적 합리성이 우선되어야 한다. 모든 시·군에 동일한 시설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나눠먹기식' 접근보다는, 각 지역의 특성과 기능에 맞는 차별화된 발전 전략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전주는 문화·교육 중심지, 익산은 교통·물류 중심지, 김제·정읍은 스마트 농업 중심지 등으로 특화 발전시키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 이러한 기능적 분화는 지역 간 불필요한 경쟁을 줄이고, 한정된 자원의 효율적 활용을 가능케 한다.
전라도의 지리적 특성은 농업 중심 경제를 형성했다. 산업화 시대에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제약'으로 작용했지만, 포스트 산업화 시대에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재해석될 수 있다. 지리는 운명이 아니라 조건이며, 그 조건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진정한 선택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고향에 대한 집착은 지리적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큰 장애물이다. "내 고향 마을이 사라져서는 안 된다", "나의 어린 시절 추억이 있는 곳이 쇠퇴해서는 안 된다"는 감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이런 감정적 접근이 합리적인 국토 관리와 자원 배분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일본의 '소멸 가능 도시' 개념이나 독일의 '축소 도시(Shrinking Cities)' 정책은 인구 감소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이에 적응하는 선진적 접근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논의조차 '지역 차별'이나 '고향 버리기'로 인식되어 합리적 대안 모색이 어려운 상황이다.
고향에 대한 향수는 존중받아야 할 감정이지만, 그것이 비효율적인 자원 배분과 지속불가능한 개발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인구 감소와 산업구조 변화는 어느 한 지역만의 문제가 아닌 전국적, 세계적 현상이다. 이러한 변화를 거부하기보다는 수용하고 적응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전라도를 비롯한 많은 지방의 개발 논리에는 종종 '자격지심'이 깔려 있다. "우리 지역도 서울처럼", "우리 지역도 경상도처럼" 등의 비교 의식은 지역 고유의 특성과 가능성을 무시한 채 다른 지역의 발전 모델을 무비판적으로 따라 하게 만든다.
이런 자격지심은 '균형발전'이라는 명목 하에 정당화되곤 한다. 그러나 진정한 균형이란 모든 지역이 똑같은 모습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각 지역이 자신의 특성에 맞게 다양하게 발전하는 것이다. 전라도가 경상도의 산업화 모델을 따라 하거나, 강원도가 제주도의 관광 모델을 모방하는 것은 진정한 균형이 아니다.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개발 욕구는 종종 지역의 정체성 상실과 자원 낭비로 이어진다. 전라도는 농업 중심 지역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거나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그 특성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최대한 활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 근본에는 포퓰리즘 정치가 있다. 선거 때마다 정치인들은 지역민의 자격지심과 고향에 대한 집착을 자극하는 비현실적 개발 공약을 남발한다. "우리 지역에도 대기업을 유치하겠다", "국제공항을 건설하겠다", "첨단 바이오 클러스터를 조성하겠다" 등의 공약은 지역민의 표를 얻기 위한 수단이 되곤 한다.
문제는 이런 포퓰리즘적 공약이 일시적으로는 표심을 얻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지역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리적 현실과 맞지 않는 개발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그 실패의 책임은 다시 "지역 차별" 탓으로 돌려진다. 이런 악순환 속에서 정작 지역에 필요한 현실적이고 지속가능한 발전 방향은 논의조차 되지 못한다.
포퓰리즘 정치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성숙한 인식과 정치인들의 책임 있는 태도가 필요하다. 당장의 표를 위한 화려한 공약보다, 지역의 지리적 현실에 기반한 정직한 비전을 제시하는 정치 문화가 형성되어야 한다.
인구 감소와 농업 인력 축소는 부정적인 현상이 아니라, 농업의 현대화와 고도화를 위한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를 거부하고 과거의 패턴을 유지하려는 무리한 시도에 있다. 지역의 지리적 특성과 괴리된 '중구난방' 개발은 한정된 자원의 낭비일 뿐만 아니라, 지역의 진정한 경쟁력 확보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전라도가 나아가야 할 길은 농업 중심 지역이라는 지리적 특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특성을 최대한 활용하여 농업의 고도화와 현대화를 이루는 것이다. 대규모 자동화 농업, 고부가가치 식품산업, 농업-바이오 융합산업 등은 전라도의 지리적 조건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미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방향이다.
아울러 인구 감소라는 현실을 직시하고, 거점 중심의 효율적인 공간 구조를 구축하는 것도 중요하다. 모든 지역을 균등하게 발전시키려는 비현실적 시도보다는, 각 지역의 특성과 기능에 맞는 차별화된 발전 전략이 필요하다.
전라도의 미래는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는 데 있지 않다.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지리적 특성에 기반한 새로운 발전 모델을 구축할 때, 전라도는 진정한 경쟁력과 지속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농업 중심의 지리적 특성은 제약이 아닌 기회다. 세계적으로 안전한 식품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농업이 첨단 기술과 결합하면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있는 지금, 전라도의 풍요로운 농토는 미래의 중요한 자산이 될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지리적 특성을 무시한 '중구난방' 개발이 아니라, 지역의 자연스러운 흐름과 조화를 이루는 발전 방향을 찾는 것이다. 정치적 포퓰리즘과 단기적 성과주의에서 벗어나, 지역의 진정한 가치와 가능성에 주목할 때, 전라도는 새로운 번영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