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는 운명인가, 선택인가?
흔들리는 벼이삭이 끝없이 펼쳐진 호남평야, 거친 파도가 철강의 도시를 품은 포항과 울산의 해안선, 한강이 감싸 안은 수도 서울의 분지. 수천 년간 한반도의 다양한 지리적 조건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문화, 산업 구조를 형성해 왔다.
지리학자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그의 저서 『총, 균, 쇠』에서 "지리는 운명이다"라고 말했다. 과연 그럴까? 자연환경이 인간 문명의 발전 경로를 결정짓는 절대적 요소일까?
한국의 국토개발 역사를 돌아보면, 지리적 조건은 때로는 극복의 대상이었고, 때로는 개발의 토대였다. 1960년대 이후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우리는 지형의 제약을 뛰어넘어 산을 깎고 바다를 메우며 국토를 변형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종종 간과된 것이 있었다. 바로 각 지역이 가진 지리적 특성과 그에 따른 자연스러운 발전 가능성이었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둘러보면, 전국 어디서나 비슷한 모습의 아파트 단지, 산업단지, 쇼핑몰, 관광단지가 들어서 있다. 전라도의 넓은 평야지대에는 제조업 산업단지가 들어서고, 항만 조건이 좋지 않은 지역에 대규모 해양관광단지가 조성되며, 수도권이 아닌 지방 소도시에 첨단 IT 클러스터를 만들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러한 '중구난방식' 개발은 각 지역의 지리적 특성과 강점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정치적 이해관계나 단기적 성과주의에 휘둘려 추진되는 경우가 많다. 수도권 문제만 해도 그렇다. 인구의 절반이 모여 사는 과밀화된 수도권은 주택, 교통, 환경 문제로 신음하고 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사람들이 몰려든다. 왜일까? 일자리, 교육, 문화의 기회가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집중은 어쩌면 서울이 가진 지리적 위치와 조건의 결과이기도 하다.
지방은 어떤가? 지역마다 특색 있는 발전보다는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는 심리로 다른 지역의 성공 사례를 그대로 복제하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는다. 강원도 산악지대에 대규모 리조트를, 전라도 농경지에 첨단산업단지를, 작은 지방도시에 대형 컨벤션센터를 짓는 식이다. 이런 개발이 성공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지역 특성과의 불일치로 인해 활용도가 낮은 '흉물'로 남거나 지속적인 재정 지원에 의존하는 '애물단지'가 되고 만다.
지리는 결코 절대적 운명이 아니다. 인간의 지혜와 기술로 지리적 제약을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지리적 특성을 무시한 개발은 지속가능성과 효율성 측면에서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지리는 운명이 아니라 '조건'이며, 이 조건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진정한 선택의 문제인 것이다.
대한민국의 국토개발은 지난 60여 년간 눈부신 성과를 이루었다. 1960년대 초 한국전쟁의 폐허에서 시작하여 오늘날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서울의 마천루, 세계적 수준의 고속도로와 고속철도 네트워크, 첨단 정보통신 인프라, 세계 최고 수준의 항만과 공항 시설 등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발전의 물리적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양적 성장의 이면에는 여러 문제점이 존재한다. 수도권 일극 집중, 지역 간 불균형 발전, 난개발로 인한 환경파괴, 획일적인 도시 경관, 지방 소멸 위기 등 다양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전국 곳곳에서 지역의 지리적·역사적·문화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지역도 혁신도시가 필요합니다. 우리도 첨단산업단지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대형 컨벤션센터가 필요합니다." 지방선거나 국회의원 선거 때마다 쏟아지는 개발 공약들이다. 정치인들은 표를 의식해 무분별한 개발 약속을 남발하고, 시민들은 당장의 일자리와 지역 활성화를 기대하며 이에 열광한다. 그러나 이런 개발의 결과는 어떠한가? 전국 각지에 분양률이 저조한 산업단지, 활용도가 낮은 공공시설, 부채에 시달리는 지방자치단체가 늘어가고 있다.
이러한 '중구난방식' 개발의 원인은 무엇일까?
첫째, 정치적 포퓰리즘이다. 선거를 앞두고 표를 의식한 정치인들은 지역 특성보다는 유권자의 즉각적인 반응을 우선시하는 개발 공약을 내세운다.
둘째, 성과주의와 단기적 사고다. 관료와 정치인은 자신의 임기 내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위해 장기적 관점보다는 당장 눈에 보이는 '건설'과 '유치'에 치중한다.
셋째,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심리다. 다른 지역의 성공 사례를 무비판적으로 따라 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넷째, 중앙정부 의존적 개발 구조다. 지방정부의 재정 자립도가 낮아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기 위해 중앙의 정책 기조에 맞추는 획일적 사업이 추진된다.
이러한 '중구난방식' 개발의 결과는 무엇인가? 국가 자원의 비효율적 배분, 지역 경쟁력의 약화, 환경 파괴와 지속가능성 위협, 지역 정체성 상실, 지역감정 심화 등 다양한 문제를 초래한다. 특히 각 지역이 서로 비슷한 산업과 시설을 경쟁적으로 유치하면서 차별화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고, 국가 전체적으로도 효율성이 떨어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우리나라가 진정한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 획일적 개발에서 차별화된 개발로, 단기적 시각에서 장기적 비전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그리고 이 전환의 핵심에는 각 지역의 지리적 특성과 강점을 활용하는 지역 특성 기반 발전(place-based development)이 있다.
세 가지 핵심 질문에서 출발해 보자.
첫째, 한반도의 다양한 지리적 특성은 각 지역에 어떤 자연스러운 발전 가능성을 제시하는가?
둘째, 현재 우리나라 국토개발의 '중구난방' 현실은 어떠하며, 그 원인과 문제점은 무엇인가?
셋째, 지역의 지리적 특성에 기반한 지속가능한 국토 발전 방향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단순히 학문적 호기심을 넘어 우리 사회의 현실적인 도전과 직결되어 있다. 지방 소멸 위기, 수도권 과밀화, 지역 간 양극화, 환경 파괴, 국토의 지속가능성 등 우리가 직면한 많은 문제들은 국토 공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활용할 것인가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역 특성 기반 발전이 중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지속가능성의 측면에서 지역의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발전이 장기적으로 더 안정적이다.
둘째, 경제적 효율성 측면에서 각 지역의 비교우위를 활용하는 것이 국가 전체 자원의 최적 배분을 가능케 한다.
셋째, 지역 정체성과 다양성 보존의 관점에서 지역 특성에 기반한 발전이 문화적 획일화를 방지하고 지역 고유의 가치를 보존하는 데 기여한다.
넷째, 사회통합의 측면에서 지역의 특성과 역할을 인정하고 상호보완적 관계를 구축함으로써 지역 간 불필요한 경쟁과 갈등을 줄일 수 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질문이 떠오른다. 왜 그토록 비슷한 모습으로 개발을 추진하는가? 왜 자연스러운 발전의 흐름을 따르지 않는가? 왜 지역의 특성과 강점을 살리지 못하는가?
지방인구 소멸은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인구는 줄어들고 지리는 한정적이며 산업은 변화해 가면 당연한 시대의 흐름일 뿐이다. 이것을 억지로 지역균형이라는 이름하에 지역개발을 진행하면 중구난방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결국 수도권 집중 현상과 지방 소멸은 인위적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닌, 경제적 효율성과 자원 배분의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지역마다 똑같은 발전 모델을 추구하려는 노력은 오히려 한정된 국가 자원의 비효율적 분배로 이어질 뿐이다.
한편으로는 희망의 단서들도 있다. 지역의 지리적 특성을 살린 성공적인 사례들, 지역 간 협력을 통한 상생의 모델들,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새로운 시도들. 그 속에서 '중구난방'이 아닌 '조화로운' 국토 발전의 가능성이 보인다.
그러나 지리는 운명이 아니라 조건이다. 그리고 그 조건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인구 감소와 산업 변화라는 시대적 흐름을 인정하면서도, 각 지역이 가진 고유한 특성과 잠재력을 발견하고 육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대한민국이 진정한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면, 더 많이 짓고 더 크게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더 현명하게, 더 조화롭게 우리 국토를 가꾸어나가야 한다. 획일적인 개발로는 진정한 경쟁력을 갖출 수 없다. 각 지역이 지닌 고유한 매력과 강점을 살릴 때, 대한민국 전체가 빛날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역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각 지역의 특성과 강점을 살리는 지혜로운 선택이다. 그것이 '중구난방'이 아닌 '조화로운' 국토 발전의 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