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디달지만은 않았던 동네 한 바퀴
회식이었다. 왜 굳이 금요일이어야 했을까. 요즘엔 금요일 단체 회식은 하지 않는 것이 일종의 불문율처럼 정해져 있다 생각했는데(물론, 친분이 있는 회사 내 동료들과 소소하게 갖는, 모두의 동의 하에 정해진 일정은 제외하고) 말이다. 아마도 이건 팀 단위도 아닌 부 단위의 큰 회식이고, 무엇보다 이 자리를 주최한 높으신 분들의 빡빡한 일정 중 비는 날이 몇 안되었기에 이렇게 정해진 것이었겠지.
장소는 회사에서도 멀리 떨어진 바닷가의 대게집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비싼 대게나 실컷 먹자는 마음으로 전투적인 자세를 한껏 취한 채 모두 나름 들떠 있었던 듯도 하다. 통창 너머로 동해 바다 끝자락이 보이는 고급스러운 식당, 하나 둘 서빙되어 나오는 정갈한 요리들, 그리고 1/4분기 마감을 열심히 한 직원들을 격려하며 준비해 오신 와인도 그 들뜬 마음을 한층 고조시켰다 할 수 있겠다.
와인은 내가 지금껏 먹어보지 못했던 종류였다. 잘 알지는 못해도 와인을 좋아하는 편이라 이것저것 마셔보며 내 취향을 조금씩 발견하고 있다 생각했는데, 이건 처음 마시자마자 "응? 뭐지?" 하는 느낌이 낯설게 훅 다가왔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입맛엔 엄청나게 단 맛과 그에 뒤이은 높은 도수의 조합이 너무나 새로웠기 때문이다. 와인인데 브랜디 같기도 하고, 당도가 높지만 거부감은 크지 않은 오묘한 느낌에 검색을 해보니, 포트 와인(Porto Wine) 이란다. 와인을 사랑했지만 직접 포도를 재배하기 적절하지 않았던 영국에서 와인을 수입하기 위해 포르투갈의 항구를 통해 선적을 하다가, 쉽게 상하고 변질되는 걸 막기 위해 인위적으로 브랜디를 섞어 도수를 높이고 발효를 중지시켜 탄생한 술. 탄생의 역사야 어쨌든 확실히 달콤해서 식전주 또는 마무리주로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한 병 사서 마셔봐야겠다는 생각도 동시에.
회식은 시끌벅적 나름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일찌감치 마무리되고, 와인에 이어 주력으로 달리던 다른 술병도 깨나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들 적당히 취기가 올랐고, 집으로 가기 위한 차에 각각 몸을 실었다. 먼 곳의 회식장소에서 회사 쪽으로 삼삼오오 모여 돌아와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데, 어쩐지 조금 걷고 싶어졌다. 너무 멀리는 말고, 딱 우리 동네 근처로.
결국 집으로부터 정거장 하나 거리를 더 지나쳐 버스에서 내리고, 익숙하지만 밤에는 걸어보지 않은 동네의 거리를 구석구석 걸었다. 어둡고, 시원하고, 드문드문 뽀얀 가로등이 밝혀주는 골목길들을. 그러다가 어떤 의식의 흐름에서였는지 불현듯 편의점으로 걸어 들어가 밤양갱을 하나 샀다. 마침 그때 듣고 있던 노래가 [밤양갱]이었을 수도 있다.
봄밤, 홀로 하는 산책, 귀를 간지럽히는 노래, 은은한 달빛, 다 지고 얼마 남지 않은 벚꽃, 혀 끝에 아직 감도는 듯한 포트 와인의 달콤함, 집에 바로 들어가기는 아쉬워 거리를 배회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집에서 너무 멀어지기는 싫은 묘한 마음, 혼자이지만 외롭지는 않고 누군가 그리운 듯 하지만 그게 누구인지는 모르겠는, 그야말로 주취자스러운 기분에 담뿍 젖은 나머지, 크게 필요 없지만 할 수밖에 없었던 소비를 했나 보다. 양갱을 손에 꼭 쥐고 이유 모를 묘한 성취감을 느낀 채 성큼성큼 걸어가는 내 모습이 지금 글을 쓰는 입장에서 더 선명하게 그려지는 건 왜일까.
그렇게, 짧았던 봄밤 양갱 산책은 끝이 났다. 이튿날 모두의 뱃속으로 사라진 밤양갱을 기리며, 다음엔 양갱에 와인을 마셔봐야지. 양갱이 달디 다니까, 와인은 묵직하고 쓴 것과 페어링하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