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와 기도>, 켄 리우
켄 리우의 소설 『추모와 기도』에서는 ‘총기 소지 규제’라는 대의가 총기사고로 인한 헤일리의 죽음과 거래되었다. 그 대가를 치른 헤일리는 가상의 벡터가 되어 추모 사이트에 도배되고 정치와 음란, 각종 유희거리로 모해됐다. 결국 죽음 이전의 헤일리는 어렴풋한 형태로도 자리잡지 못하고 영영 사라지고 만다. 인공지능의 민주화는 인간의 한계를 무르는 반면에, 때로는 첨예한 꾀를 부려 존귀함의 장벽을 무너뜨린다. 여기서 재밌는 상상을 해 보았다. 실제로 죽음과 교환되는 기술이 일상에서 쓰이게 된다면 어떨까? 이름하여 ‘환생 술‘?
일종의 미련
기억을 도식으로 복원해 주는 디지털 세계에서는 죽음의 근원적인 질문이 훼손될 여지가 있다. 죽음이 앗아가는 오감이 디지털 도구로 인해 재구성되고 극단적으로는 '죽어도 좋다'는 명제로 환원된다면, 반쯤의 이별을 하는 분위기에 면역이 생기는 날이 오지 않을까? VR이든 AR이든 원할 때마다 고인을 마주할 수 있다면 앞으로의 인류는 반 정도의 눈물을 흘리는 대신에 두 배, 세 배의 쾌락을 누리는 쪽으로 진화하게 될지 모른다. 죽음은 삶을 유한하게 관리하고, 덕분에 인간은 그 안에서 각기 다른 의미를 똘똘 싸매기도 한다. 죽음이 언제든지 재생하기 나름의 선택에 불과하다면, 인간의 생은 고귀함과는 차츰 멀어질 것이다.
지평의 확장
망자의 몰입 영상은 진위 판별이 필요한 사건에 실마리를 제공하기도 하고 급작스러운 애도 기간이 불러오는 허무함을 달래주기도 한다. 기술의 선 기능이 죽음, 달리 말하면 환생의 어귀에 도달케 함은 그 자체로 대단한 업적이다. 그런데 생과 사의 칼같은 분할을 넘어 새로운 시공간이, 떠나는 이의 관 옆에서 태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망자가 그대로 땅속에 묻히는 대신 감쪽같은 홀로그램으로 눈앞에 장착된다면, 이처럼 특수한 추모 기법이 이승과 저승 사이 괴리감을 충분히 줄여 줄 수 있을까? '환생 기술'의 상용화에 앞서, 디지털 트롤이 득실대지 않도록 철저한 보안 체계를 갖춰야 할 테고 검증된 목적으로 운용할 것을 보증해야 한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
인스타그램에서 어느 배우의 소신성 발언을 접한 적이 있다. 한 인터뷰에서, 주연 배우로서 사회적인 관심을 받는 게 힘들지 않으냐는 동료의 물음에 그만큼 대우를 받으니까 그 몫으로 불평은 자제하려 한다고 답했다. 며칠 뒤, 같은 공간에서 어지러운 연예 이슈가 곳곳에 전시됐다. 요즘에야 유명세를 절정으로 찍는 배우가 어쩐 일로 실언하자마자, 가계정 트롤들이 부랴부랴 배우의 계정으로 달려가 '이미지 실추'라며 골로 보내고 있었다. 받는 만큼 감내한다는 배우의 가치관과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라는 명언처럼 큰 일을 행하는 사람들의 몫은 분명하지만, 웬 쬐깐한 디지털 망령들이 너무 설치지 않던가?
특정 집단이 생명의 존귀함을 멋대로 부리고 악용하지 않도록, 누군가는 빈틈을 방어하는 갑옷을 철저하게 개발해야 한다. 그러고 나면 단단한 옷들을 한 겹씩 벗어던지는 용기가 필요할 테고. 궁극적으로는 기술 본연의 아량이 넓어져 트롤들의 공격에도 무사한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책에서 명시하듯이 무엇을 '할 자유'가 무엇을 '피할 자유'를 선행한다면 위험하다. 인간 모두는 잠재적 가해자이자 피해자이며, 기술의 재현은 과거를 찬양해서도 맹목적으로 미래를 숭배해서도 안 된다. 전 세계의 헤일리는 아직도 장례를 치르고 있지만, 기술은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