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말을 걸어오는 골목에서

벽화 첫번째 이야기

by 봄날의꽃잎


두맹이골목에는 조용히 말을 거는 벽화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이번 글은 그 벽화들 중 첫 번째 이야기다.


누군가가 그려 넣은 시간이,

이 골목을 걷는 나에게 자꾸 말을 건다.

무심코 지나치려다도 멈춰서게 되는 이유.


그건 그림이 아니라, 그림 너머에 있는 내 어린 시절의 한 조각이기 때문이다. 그 앞에 서면, 바람결도 달라지고 시간도 느려진다.

그곳에서, 잠시 되감겨진 기억을 꺼내본다.

비누방울 튀는 그림 속 아이도 바지 걷고 빨래를 하는 중이다.

빨래하는 벽화 앞에 섰을 땐, 엄마가 마당 한쪽에서 빨래를 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이불을 빠는 날이면 빨간색 큰 고무대야가 하나씩 나왔고, 그 속엔 이불이 담겼다. 우리는 차례차례 올라가 발로 밟았다.

옆집친구도 같이 밟으며 까르르 웃었던 시간들,

바지를 걷어붙이고 발로 밟던 하얀 거품들,

손빨래가 끝나면 이불을 이고 옥상에 오르던 모습, 햇볕에 바삭하게 마르던 타월 냄새, 그게 나에겐 놀이었다.


우리의 골목 놀이는 매일이었다. 점프하는 벽화 속 아이들을 보니 생각난다. 우리는 골목에서 말뚝박기, 딱지치기, 고무줄놀이, 땅따먹기, 술래잡기를 했다. 좁은 돌담길 사이에서 누가 더 빠르게 달릴 수 있는지 겨뤘고, 골목 계단 모퉁이에 앉아 구슬을 굴리며 해가 지는 것도 잊었다.


또 다른 골목에는 운동회를 그린 벽화가 있다.

운동회 날, 백군과 청군. 심장은 뛰고, 응원 소리는 운동장을 울렸다.

담벼락에 펼쳐진 운동장에는 깃발이 나부끼고, 공을 들고 달리는 아이들의 표정 하나하나가 생생하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체육복 입고 머리띠를 두르고, 반마다 떨리는 응원 연습을 했었다. 아빠,엄마가 들고 오신 커다란 도시락, 초코파이와 삶은 달걀, 그리고 꽁꽁 얼린 음료수. 운동회는 내겐 설렘이자 잔치였다.


그런데 사실 나는 달리기를 잘하지 못했다. 키가 작아서 항상 첫 번째 조에 배정됐고, 5명 중 5등이 내 자리였다. 출발선에 서면 가슴은 콩닥거렸고, “탕!” 하고 울리는 화약총 소리는 나를 앞으로 밀어주는 대신 자꾸만 주눅 들게 만들었다.1등, 2등, 3등은 노트나 연필 같은 상품을 받았지만 나는 늘 빈손이었다. 경기가 끝나면 맨 뒷줄에 앉아, 나보다 잘 달리는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그런데, 운동회가 싫진 않았다.

엄마가 싸주신 김밥, 아빠가 사오신 캔 사이다,

그리고 체육복 입고 청군 백군 머리띠,

신나게 즐긴것 하나만으로도,

그날은 평소보다 반짝였으니까.




지금은 그 시절의 소리가 모두 사라졌지만, 벽화는 여전히 그 풍경을 지키고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 앞에 서면 마음속 어딘가에서 누군가 나를 조용히 부르는 듯하다.

떠난 사람들, 잊은 기억들, 지워진 웃음들까지도

그 벽 안에 담겨 있다.


나는 그 앞에서 잠시 멈추고, 오래전 그날로 다녀온다. 그림은 그저 벽에 남아 있지만, 내 마음속에선 살아 움직이는 시간이다.

아이들은 떠났지만, 그리움은 그림으로 남아

골목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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