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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향 Jun 26. 2024

오래된 치부

나라는 사람은 예민한 데다가 감정도, 표현도 격해서 늘 좀 과한 축에 속했다. 그게 싫어서 오죽했으면 새해나 생일을 맞을 때마다 제발 차분해질 수 있게 도와주세요 하고 기도를 했다. 몇 년을 내리 기도했건만 여전히 나는 그대로에 가깝다. 날 때부터 이렇게 만들어진 탓도 있을 거고 가족의 영향도 있긴 있을 거다. 우리 가족의 성질을 굳이 구분하자면 따뜻하다기 보단 많이 차가운 쪽이다. 자아가 형성되던 중요한 시점에 어린 나는 궁금한 것도 많고 쓸데없는 고민도 참 많았었는데 우리 집은 모여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그림체의 가족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고민도 혼자 하고 결정도 혼자 내렸다. 누구한테 어떻게 도움을 청해야 하는 건지 알지 못해서 무슨 일이든 스스로 해결하고 책임져야 했으므로 마음 한 구석이 어딘지 늘 불안했다. 맨 처음 집 밖의 학교라는 공간이 내게 주어졌을 때 나는 내가 마주하고 있는 세상을 이해하지 못했고 나를 둘러싼 사람이나 사건들 간의 관계를 파악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리고 내면의 혼란스러움은 내게 공격성으로 나타났다. 속이 채워지지 않은 채로 여기저기 휘둘리며 살다 보니 찝찝하고 불편한 마음도 생겨났다.


그렇게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항상 이런 기분이었던 것 같다. 창피하고 숨고 싶은 마음. 왜 내 마음을 울리는 문장은 늘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인지. 왜 내가 떳떳하지 못한 기분으로 살아가는지에 대해 알아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평생의 치부로 여기는, 내 인생 30년을 통틀어 가장 건드리기 싫은 학창 시절 때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뿌리를 파헤치면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서.


기억력이 좋지 않은 내게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초등학생 3-4학년 때의 일화가 있다. 당시 나는 가벼운 욕 한 마디를 못하는 찐따 학생이었다. 그 어린 나이에 학교에는 이미 노는 애들 무리가 있었다. 어느 날 그중 대장 역할을 하던 여자애가 생일파티를 연다고 했다. 그 여자애는 평소 나를 우습게 여겨서 괴롭히고 싶어 했는데, 기웃거리던 나를 복도로 부르더니 “씨 x 년, 따라 해 봐” 했다. 내가 욕을 못하는 걸 알고 그 한 마디를 하면 파티에 불러 주겠다고 한 거였다.


나는 차마 욕을 입에 담지 못했고 결국 나는 그 생일파티에 거의 유일하게 초대받지 못했다. 당시에 왜 초대받고 싶었는지, 어째서 속상하고 수치스러운 기분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소외당하는 기분이 싫었던 거겠지. 그 애는 괴롭히고 싶은 대상이 놀이터에 나타나면 그네에 침을 뱉어놓는 질 나쁜 아이였는데, 학교에서 남녀 할 것 없이 모든 학생들이 벌벌 떨며 이 아이를 높이 떠받든 덕분에 이 애는 날이 갈수록 기고만장했다.


전학 가게 된 초등학교에서도, 이후 중학교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나온 학교는 당시 질이 좋지 않은 학생들이 많기로 유명했다. 중학생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들이 모인 학교에 옆으로는 이웃 학교 문제아들, 위로는 이미 졸업한 양아치들부터 쭉 이어지는 소위 일진 라인이 있어서 우리 학교에는 삥 뜯기, 동급생 혹은 선후배 간 집합 및 얼차려, 도둑질, 집단 따돌림, 구타, 술, 담배 등 요즘 뉴스에서나 볼 법한 일진놀이가 성행했다. 일진무리에 속하지 못한 아이들은 학교에서 업신여겨졌고 흔히 말하는 따까리(심부름꾼) 혹은 놀림거리가 되었다. 운 좋게 안 찍히고 조용히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도 물론 있었지만 그런 평범한 아이들조차 알게 모르게 매일 무시당하면서 일진 아이들의 눈치를 봤고 그들의 비위를 맞췄다.


이렇듯 내 학창 시절 내내 학교에는 서열이 존재했고 학급 내에, 학년 전체에, 심지어는 학교를 넘어 지역단위까지, 아이들 사이에 어떤 상하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단순히 학교 안에서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방과 후 학원에서도, 동네 놀이터나 길거리 골목에서도, 학교 내의 서열관계는 유효했다. 그러니 학교 안에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일진 무리에 속한 아이들은 일반 학생들 위에 군림했고 심지어는 인기를 독차지했다. 수업시간에 멋있게 손 들고 발표할 수 있는 것도 그들뿐이었고, 수련회 장기자랑에서 여자친구한테 노래를 불러주며 전교생 앞에서 멋있게 고백할 수 있는 것도 그들뿐이었고, 싸움이 났을 때 기죽지 않고 자신 있게 맞설 수 있는 것도 오직 최상위 포식자인 그 노는 애들의 특권이었다. 그들이 나서면 멋있고 당당한 거였고 그들이 아닌 누군가가 나서면 주제도 모르고 나대는 거였으니까.


점점 물들어버린 어린 나는 잘 나가는 노는 애들이 실제로 잘나서 또래 집단에서 인정을 받는 거라고 착각했다. 또래 압력이 크게 작용하던 그 시절에 친구가 전부인 줄로만 알던 나는 부모님께는 반항하고 친구들에게는 복종하는 못난 삶을 택했다. 어느샌가 내 마음속에 잘못 심어진 동경심은 그렇게 10년 가까이 나를 괴롭혔는데, 그 못난 일진행세를 어설프게 따라 하면서 몸에 배어버린 습관들 때문에 나는 대학생이 되어서까지 내가 봐도 참 별로인 언행을 많이도 했고 그에 따라 주변의 좋은 사람을 많이도 잃었다.


이제는 시간이 제법 흘렀으니 잊고 살다가도 뉴스에서 어느 연예인의 과거가 들춰진 이야기를 듣거나 '루머의 루머의 루머 (13 reasons why)' 같이 학교폭력을 주제로 한 드라마를 보고 나면 괜히 뜨끔하는 기분이 드는 게 사실이다. 내 학창 시절에 미디어 속 이야기처럼 세상이 떠들썩할 정도로 심한 일은 없었다 해도 어쨌든 나는 내 두 눈으로 무자비한 인간들의 실상을 목격했고 나 역시 그 안에서 어울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다.


아주 짧게 요약하자면 초등학생 때 그 “씨 x 년, 따라 해 봐” 사건 이후 나는 잠시나마 노는 애들을 치 떨리게 혐오하게 됐고 그들이 종종 시비를 걸어올 때마다 쫄지 않고 싸워댔다. 정확히 어느 시점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다소 순한 편이었던 내가 어느샌가 불같은 성미를 가진 거친 아이로 변해 있었다. 노는 무리와 적을 지고 내가 얻게 된 건 믿었던 친구들의 배신과 (그들도 살아야 했으니까), 우리 학년을 벗어난 선배들의 협박이었다. 몸싸움도 여러 번 있었다. 이사를 가서 (나중에 알고 보니 더 질이 좋지 않던) 새로운 학교에 평범한 학생으로 입학한 나는 위에 적었듯 비슷한 광경을 목격했고 몇 차례의 말도 안 되는 따돌림과 괴롭힘에 휘말렸다.


그렇게 자연스레 마음을 고쳐 먹게 된 것 같다. 노는 애들 무리에 속해 있으면 적어도 그들이 내 방패막이는 되어줄 수 있으니까. 자존심 빼면 시체인 내가 혹여 눈 밖에 날까 싶어 싫은 소리 한마디를 제대로 못하고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좀 논다 하는 애들의 비위를 맞췄다. 결국 나는 어찌저찌 노는 아이들과 나름 가까워졌고, 덕분에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편하게 학교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누군가 시비를 걸어올 때면 그냥 내 친구들의 이름을 댔다. 그러면 그 의미 없는 기싸움은 진짜 싸움으로 번지지 않아도 되었다.


내가 학교를 다닐 적엔 실제로 귀여니 소설이나 일본의 고쿠센 같은 드라마가 유행을 했고 그런 류의 만화나 소설 속에서는 일진 미화가 자연스레 그려졌다. 그리고 내가 경험한 미성숙한 아이들의 세상에서는 현실 속에서조차 일진무리가 찬양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직접적으로 이상한 일들에 연루된 적이 없다 해도, 사실 그 시절 우리는 모두가 가해자이자 방관자이자 피해자였다. 그걸 깨닫고 나니 줄곧 부끄러운 심경이 드는가 보다. 별 것 아닐 수도 있는 이 탁한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속이 들끓고 고통스럽지만 애써 외면하지 않음으로써, 지난 일이라는 핑계로 억지로 아름답게 포장하지 않음으로써 이겨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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