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화의 일곱 번째 레터
최근에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가 개봉했어. <분노의 도로> 프리퀄인 이 영화는 전작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던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의 과거를 다뤄. 다들 <분노의 도로> 속 퓨리오사를 보며 많은 의문을 품었을 거야. 도대체 이 여자는 어떤 삶을 살았기에 머리는 삭발이고 왼팔은 로봇 의수이며 운전과 사격과 격투에 강한 걸까? 영화는 플래시백으로 보여주기보다 그의 입으로 직접 설명하는 방식을 택하지. 그리고 올해 그의 과거가 세세하게 묘사된 <퓨리오사>가 드디어 공개된 거야.
나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영화관으로 달려갔어. 148분의 러닝타임이 끝나고 느낀 감정은 전작과 사뭇 달랐지. 마냥 화끈하기만 했던 <분노의 도로>와 달리 <퓨리오사>는 묵직한 질문 보따리를 던진 느낌이랄까. 얼떨결에 보따리를 받아 든 나는 며칠을 거기에 골몰했어. 그리고 질문은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지. <분노의 도로> 오프닝을 열었던 바로 그 물음, ‘희망 없는 세상에서 더 나은 삶을 위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였어.
매드맥스의 배경은 22세기 근미래야. 멈출 줄 모르는 인간의 욕심 때문에 핵전쟁이 발발하면서 지구는 황폐해져. 생존하기 위해 이전투구 하는 사람들 속에서 윤리와 도덕은 뒷전이 되고 사라진 규범의 자리는 폭력이 대체하지. 생존자들 위에 군림하는 ‘임모탄(휴 키스번)’조차도 병 없이 깨끗한 자식을 낳는 일에 집착하느라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 나눔, 친절, 평화와 같은 단어가 사라진 세계에 남은 건 죽음에 대한 각자의 두려움뿐이지.
나는 영화 속 세계가 작금의 현실과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았어. 아직 노골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폭력은 이미 우리 곁에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하거든. 한국에서는 남녀갈등, 세대갈등으로 인해 타인을 향한 피로감이 누적되고 있어. 전운은 한반도와 전 세계를 싸늘하게 감돌지. 이성에 힘입어 발전한 인류는 왜 다시 살육이 낭자했던 과거로 회귀하려는 걸까? 혼란의 시대에서 희망을 붙들고 나아가야 할 곳은 어디일까?
나는 매드맥스가 이에 대한 답을 보여주고 있다고 봐. <분노의 도로>는 임모탄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자유를 추구하는 여성들의 연합이 승리하는 그림으로 끝나. 이들을 도왔던 ‘맥스(톰 하디)’는 서부 영화 속 무법자가 그러하듯 아련한 뒷모습을 남기며 시타델을 떠나지. 퓨리오사 역시 그런 맥스를 붙잡지 않고 담담히 그를 보내줘. 함께 바랐던 그곳에 도착했지만, 이제는 가야 할 길이 달라진 두 사람의 모습은 아쉽지만 수긍할 만한 결말이었어. 도식화를 선호하지는 않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이렇게 설명해볼게. 임모탄이 상징하는 가부장제도는 끝나고 모계사회의 질서가 인류를 맞이했다. 이에 따라 맹목적으로 소유하는 생활방식은 종식되고 정신을 계승하는 새로운 가치관이 주류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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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시대에 인류는 모계사회였대. 결혼제도가 있었을 리 없으니 아이의 혈통은 불확실한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를 중심으로 이어졌을 거야. 고대사회로 접어들며 생산량이 늘어나자 잉여생산물이 발생하고, 이를 소유하려는 경쟁이 촉발하면서 인류는 본격적인 발전을 시작해. 이때부터 아버지를 중심으로 가족과 사회가 조직되는 부계사회로 개편된 거고. 자신의 혈통을 확신하려면 여성을 소유하고 통제하는 방법밖에는 없었겠지. 그렇게 등장한 가부장제도는 오랜 역사 속에서 인류에게 번영을 가져다줬어. 물론 수많은 전쟁이 발발하는 우여곡절도 있었지.
이 모든 진통을 겪고 하나씩 개선해나가며 도착한 곳이 바로 여기야. 빈부격차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어느 정도의 자유가 보장되는 이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사회. 그런데 이런 사회로는 인류가 더 이상 지구에서 존속할 수 없게 됐어. 이곳에는 새롭게 소유할 수 있는 땅이 없거든. 앞으로는 정해진 파이를 두고 더 많이 먹기 위해 상대방 몫을 빼앗아야 하는 전쟁의 연속일 뿐이야. 매드맥스 세계관은 한계에 도달한 인류의 끝이 결국 핵전쟁으로 귀결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적나라하게 전시하지.
처음에 인류의 목적은 ‘소유’가 아니었어. 본능에 따라 생존하고, 자식을 통해 유전자를 계승하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지. 부계사회로 넘어갈 당시에도 이 확률을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소유를 택했던 거야. 하지만 이 방법이 오래 고착되면서 어느새 삶의 목적이 소유라고 당연시되고 있어. 분명 소유해야만 계승할 수 있었던 시대가 있었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말했다시피 인간은 이미 지구를 전부 소유했기 때문에 더 갖기 위해서는 남의 것을 수탈하는 수밖에 없거든. 이제 다시 본질인 ‘계승‘으로 돌아올 필요가 있어. 다만 과거 모계사회와는 다른 방식으로 말이야.
계승은 단순히 DNA 전달에만 그치지 않아. 인간은 유전자 외에도 나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살다 갔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거든. 권력가도, 살인자도, 성인도 예외 없이 인간은 죽는다는 명제가 옳은 한 우리는 무엇을 소유해야 할지보다는 무엇을 계승해야 할지에 집중해야 해. 과거 모계사회가 유전자 계승에 그쳤다면, 부계사회에서 풍요로워진 인류의 지식을 중심으로 이제는 인간적인 가치를 계승하는 것이 바람직한 단계 아닐까? 그렇기에 <분노의 도로>가 제시한 엔딩은 부계에서 모계사회로, 소유에서 계승으로 헤게모니의 전환이 이뤄져야 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게 돼.
인류의 목적이 소유에서 계승으로 바뀌면 우리는 어떤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 죽으면 무엇도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소유하려는 집착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 또한 죽어서도 계승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기에 죽음도 불사할 수 있지. 임모탄을 추종했던 ‘눅스(니콜라스 홀트)’가 ‘케이퍼블(라일리 코프)’을 만나 사랑을 배운 뒤 ‘Witness me’를 외치며 장렬히 퇴장한 것처럼. ‘Witness’라는 단어는 주로 타동사로 쓰이며 ‘목격하다’와 같이 해석되지만 간혹 수동태로 쓰이며 ‘증명하다’를 의미하기도 해. 누군가 나를 목격하는 것, 이로 인해 내 삶이 증명되는 것이 살아가는 이유라면 우리는 더 이상 많이 갖기 위해 죽고 죽일 필요 없이 ‘더 나은 삶’을 추구할 수 있을 거야.
<분노의 도로>가 이상적인 미래를 제시했다면, <퓨리오사>는 그 미래에 도달하기 전 방황하는 현재를 다루는 이야기로 볼 수 있어. ‘퓨리오사(안야 테일러 조이)’는 풍요로운 고향에서 납치된 후 여러 차례 도망치지만 매번 붙잡히면서 시타델로 돌아오는 인물이야. 어머니의 땅으로 돌아가려는 강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탈출에 번번이 실패하면서 그의 성격과 외형은 사막처럼 풍화되지.
나는 그 모습이 마치 현재 청년 세대와 닮아 보여. 찬란했던 유년기를 뒤로 하고 성인이 된 우리는 지독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매번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와. 마치 이곳이 제자리인 것처럼. 노력하면 지금보다 나아질 거란 희망은 신기루와 같다는 것을 똑똑한 우리는 알아채 버렸어.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 성공하면 삶이 편안해질까? 그 편안함은 오래 갈까? 물음은 끊이지 않고 현실은 바뀌지 않고 그럼에도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가.
나는 퓨리오사가 염원했던 ‘구원’이 우리 세대의 바람과도 이어진다고 생각해. 퓨리오사는 어머니의 땅이 진작에 멸망했음을 목도하고 좌절했지만, 소금사막 너머의 알 수 없는 미래에 도박을 걸지 않고 척박할지라도 시타델이라는 현실을 재건하기를 선택해. 그는 악전고투 끝에 임모탄의 여자들과 시타델 시민에게 자유를 선사하고 자신 역시 자유를 얻어. 그토록 원했던 구원은 찬란했던 과거로의 회귀나 비현실적인 낙관이 아닌 메마른 현실에 발을 붙이고 자신의 선택을 옳게 만드는 용기에 있었던 거야. 미래는 알 수 없어. 낙관도 필요할 때가 있겠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계승하겠다는, 이 세상에 무언가를 남기겠다는 그런 의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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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제목을 다시 살펴보자.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에서 ‘사가’는 영웅의 무용담을 다루는 서사시를 말해. 플래시백 없이 액션에 집중했던 전작과 달리 영화 전체가 일종의 플래시백인 <퓨리오사>는 관객이 캐릭터가 겪는 시련에 집중하도록 유도해. 그런 다음 ‘디멘투스(크리스 햄스워스)’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묻지. ‘The question is... do you have it in you to make it epic?(과연 네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그러게, 우리는 과연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소유가 더 이상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세상, 기존 규범이 무너져 혼란한 이곳에서 우리는 무엇으로 맞서 싸워야 할까? 퓨리오사는 이렇게 답해. 죽이는 것으로 복수할 수 없다면 너를 자양분 삼아 새로운 가치를 탐해보겠다고. 폭력으로 피칠갑된 세상으로부터 신뢰와 자유를 구원하고 이를 이어 나가겠다고.
우리의 시간 역시 ‘사가’의 한 페이지에 있어. 연이 너는 무엇을 잇고 싶니? 네 서사 끝에는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까? 우리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