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식간에 법적인 듀오가 결성된 순간
"대체 혼인신고를 왜 먼저 한 거야? 인스타에서 보니까 대출 더 안 나온다던데?"
친구들이 묻는다. 여기저기서 모두가 혼인 신고하면 손해라고 말한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게 아닌 본인의 상황에 따라 유리한 조건이 다르므로 직접 확인해야 한다. 혼인 신고 후 대출이나 청약 요건의 부부 합산 소득 기준이 오히려 미혼에 비해 불리할 수도 있다. 나도 회사 재직 당시에는 신혼부부 대상의 대출 요건에 부합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퇴사 결심을 듣자마자 L은 조건반사처럼 외쳤다. 망치로 무릎을 때리자마자 무의식적으로 튀어 오르는 다리처럼 그 즉시 떠올렸다. 아! 신혼부부 디딤돌 대출! 연봉 0원은 오히려 기회다!
*이를 위해 일부러 잠깐 퇴사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순도 100% 퇴사를 위한 오리지널 퇴사다.
우리는 이참에 생애최초 신혼가구로 디딤돌 대출을 받고자 하였고, 이를 위하여 우리가 진짜 신혼부부임을 증빙해야 했다. 청첩장 또는 결혼 예식장 계약서로도 대출을 신청할 수 있으나, 난 곧바로 제주도를 가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없다. 결혼식장 투어보다 혼인신고를 질러버리는 것이 제일 빠른 증명 방법이었다.
디딤돌 대출은 정말 머리가 아프다. 은행에 가면 디딤돌 대출은 정부에서 하는 거라 잘 모른다고 한다. 한국주택금융공사에 전화해서 이것저것 물어보면 답을 해주기는 하는데 정확한 건 심사가 진행되어야 알 수 있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너무나도 당연히 맞는 말이지만 심사가 진행되려면 매매 계약을 완료해야 한다. 그런데 계약서까지 다 썼는데 만약에 심사에 떨어져서 대출이 안 나온다면? 그때는 대체 그 돈을 당장 어떻게 해야 되는 건데요? 으악!
방법은 공부뿐. 네이버에 있는 디딤돌 카페에서 살며 미친 듯이 서치하고 스터디하고 다양한 사례들을 보며 분석하고 대입하고 또 서로 묻는 방법뿐이다.
*네이버 카페 : 내집마련디딤돌대출 & 버팀목전세자금대출 카페 (클릭)
이곳에는 디딤돌 대출과 관련된 많은 사례와 가이드 글 등이 있다. 커피 한잔 정도의 소정의 등업비가 있지만 정말 그 이상의 소중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다. 디딤돌 대출을 받지 못하더라도 스터디의 개념으로 열심히 둘러보면 집 구하는 누구에게나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매우 짧은 기간임에도 L이 디딤돌 대출 전문가가 된 건 모두 이 카페 덕분이다.
우리는 디딤돌 대출에 부적격 결과가 나올 경우까지 모두 대비하여 플랜 A, B, C를 짜놨었다. 무엇보다도 언제나 현시점의 자격 요건들을 봐야 한다. 내가 대출을 실행한 바로 그다음 달부터도 소득 조건이나 금리 등이 조금씩 달라졌다.
*공식 홈페이지 : 기금e든든 (클릭)
이러한 모든 과정에서 제일 쉬웠던 것은 단연코 혼인신고였다. 구청에 가서 1장의 서류에 우리 둘의 인적사항과 몇 가지 항목을 적고 내면 끝이다. 제출 즉시 효력이 발생하기 때문에 우리의 손을 떠나 직원분에게 서류가 넘어갔다면 더 이상 돌이킬 수도 없다. 정말이지 런던 베이글 뮤지엄 제주점에서 베이글을 먹기 위해 알람을 맞춰놓고 캐치테이블에서 실시간 상황을 살펴보며 웨이팅을 걸었던 것보다 혼인신고가 더 쉬웠다.
이제 나보다 내 주변 사람들이 더 보채고 있다. 어쩌다 보니 딱 결혼식 하나만 완전히 건너뛴채로 부부가 되었다. 양가 부모님들과 함께 만나 상견례도 하고 차례대로 가족들과 함께 여러번의 집들이 파티도 했다. 추석과 설날 양가를 오가며 2번의 명절을 보냈다.
이미 법적 부부가 되고, 함께 한 집에서 살고 있으니 결혼식을 안 하겠다는 건 아니다. 그동안은 결혼식 계획까지 논의할 심리적 여유가 없었다. 글에 쓰지 않은 더 자세한 full 스토리까지 들은 분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오히려 경이로운 눈빛으로 박수를 보내준다.
사실 내 주변에는 유독 결혼/연애에 큰 관심이 없는 친구들이 많아 나에게도 덩달아 결혼은 좀 먼 일이었다. 오래 사귄 남자친구가 있음에도 말이다. 하지만 결혼식도 하나의 파티이니 막상 준비하면 나는 몰랐던 색다른 맛이 있겠지? 우선 본격적으로 집들이를 시작하자!
우리 할아버지가 말했다. 별다른 티져 없이 연달아 터뜨린 나의 퇴사와 아파트 매매와 혼인 신고와 제주 한달살이는 주변 모두가 그 진위를 거듭해서 되묻게 되는 파격적인 소식이었다.
- 친구들 : 맨날 옆에서 졸던 애가 말도 없이 몰래 유부녀가 됐다고? 끊어봐. 울 엄마한테 이거 말해야 돼.
- 회사 동료들 : 같이 매일 야근만 하고 다른 건 아무것도 몰랐으면서 갑자기 집을 사고 남편까지 생겼다고?
- 필라테스 선생님 : 혼인 신고에 계약까지 하고 왔다고요? 저번주 수업끝나고 일주일만에 이렇게 급전개됐다고?
내가 L과 장기 연애 중이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오래 만났다 한들 신혼집이든 결혼식 날짜든 어떠한 시그널도 없었다. 나도 몰랐으니까. 일부러 숨긴 게 아니라 갑자기 결심하고 우선 빨리 저지른 다음에 모두에게 공표했으니까. 내가 이제 법적으로 기혼자라는 사실은 아직까지 어색하다. 남편이라는 명칭도 매우 낯설다. 언젠간 익숙해질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