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제목을 보고 혹여나 노하실 87년생 이상의 분들께 미리 심심한 사과의 인사를 전합니다.
늙어간다. 88년생과 ‘늙다.’라는 단어가 어울리게 된 지는 얼마 안 됐다.
묘하게 얼굴에 잔주름이 늘었다. 솔직히 나만 아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 만난 친동생이 굳이 내 눈가 주름에 대해 언급해서 한결 기분이 구려 졌다.
깊게 파인 주름은 아니지만 팔자주름이 사진에서 도드라지고, 눈가에 웃을 때 잠깐 생겼다 말았던 형태의 라인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
거울을 보고 웃었다 정색했다를 반복해 본다. 작은 계곡이 산길을 따라 패어 흐르듯 웃는 내 눈을 따라 줄기가 생겼다.
옆구리는 탄력을 잃었는데 다행히 여긴 옷으로 커버가 된다. 그렇지만 딱 달라붙은 상의는 아무래도 피하게 된다. 식사라도 하게 되면 들숨이 아닌 ‘날숨’을 내뱉을 수 없기 때문이다.
20대 때는 나이 들고 늙어 가는 게 예전엔 엄청 서러운 것이라고 짐작했다. 내가 37살이 되고 느끼는 건 꽤나 ‘나이 듦’에서 발견하는 재미 요소들이 있다는 점이다.
27살과 37살을 비교하자면 신체적 역량과 생기는 확실히 달라졌다. (나쁜 쪽으로.)
그렇지만 감정적 성숙도에서는 엄청난 발전이 느껴진다. 오죽하면 27살로 돌아가고 싶지 않기도 하다. 그때의 나는 매사 치열했다. 펼쳐질 찬란한 30대를 위해서 밤에 잠 못 이룰 정도로 열정이 과했다.
젊음을 태운다는 말이 있다. 돌이켜 보니 그렇게 그냥 태워선 안될 순간들이었다. 관계에 목을 매고 사람에 쉬이 상처받고 눈물지으며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다녔다.
그때는 그렇게 노력하면 또각또각 하이힐을 신고 숄더백을 매고 서류철을 검토하는 멋진 30대가 되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중의 행복을 위해 지금은 당연히 희생해도 되고, 이렇게 하면 행복해지는 거라고 자기 암시를 해댔다.
그렇게 지나간 내 과거는 의외로 후회 투성이다.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지만 지금 나는 힐을 신으면 열 걸음 이상 걸을 수 없고, 어깨엔 화려한 명품백이 아니라 아이들 장난감과 간식을 챙기기 좋은 에코백을 끼고 나간다.
갈수록 덜 빠릿 해진다. 오히려 반대로 느릿함을 추구한다. 늘 똑같이 보이던 풍경도 들리는 소리도 익숙지 않다. 반박자 느린 삶에서 나만의 뿌리를 단단히 내린다. 더 이상 홀씨처럼 잔잔한 바람에도 방향을 잃고 방황하지 않는다.
‘극혐’이라는 단어를 써가며 너무 싫어했던 것도 조금 덜 싫어졌다.
‘최애’라는 단어로 제일 사랑하고 좋아하던 것도 조금 덜 좋아졌다.
생각해 보자면 그런 것들에 에너지를 낭비할 여력이 없다. 인간관계에서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고 부들부들 떨어 대던 극렬한 분노가 해가 갈수록 “그럴 수도 있지.”로 바뀌는 건 정말 신기할 노릇이다. 머리가 새하얀 노인이 되면 화낼 기력도 없다는 게 거짓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봄도 그다지. 가을도 그닥. 여름은 더 싫었다. 하지만 이제는 계절의 변화가 온몸으로 와닿아 아름다운 우리 강산이라는 말을 실감 하고 있다.
여름의 햇살은 내가 아무리 단단히 눈을 질끈 감아도 눈꺼풀 위로 내려앉아 떠나질 않는다. 녹음이 가득해진 창가에서 여름을 감탄한다.
이렇게 작고 소중한 나의 늙음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을 때, 그때도 지금처럼 늙어감을 찬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당장은 27살로 돌아갈 거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너무 어렵다.
다만 늙더라도 허리를 구부려 미래의 어린 손주들을 안아 올릴 만큼은 건강하기를 바란다.
신기하게도 나 자신이 늙는 걸 받아들이는 날이 온 것을 기념한다.
나의 늙음에 '소중하다.'는 표현을 곁들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