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마침 찾아온 그 프랑스 유학파 디자이너 실장님은 나에게 동아줄 같았다. 프로답고 능숙한 면이 분명히 있었다. 잘 잡고 있으면 좋은 가이드라인이 되어 줄 것이라 믿었다.
-본문 中 에서
나는 남들과는 달라! 를 표방하지만 은근히 Fm대로 사는 성향이 사실 있다. 무의식 속 깊숙이 약간의 일탈이라도 불편해하는 성향이다.
흔히 '유교걸'이라고 하는데 그 유교걸이 나다. 유교문화에 대한 반감이 매우 심하지만 동시에 그 문화에 절여진 인간이다.
부모님 둘 다 공무원이었다. 가족 중에 예체능계가 있다면 그나마 엄마의 먼 친척인 6촌 아저씨 정도인데 길에서 보면 그냥 지나치고도 남았을 사실, 남이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봐도 모르는 사람을 남이라고 하기로 했다)
자라온 환경이 도전적이거나 사업가의 기질이 길러질 만한 삶의 배경이 없었다. 친인척들도 사업을 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 향기조차 맡아볼 수 없는 문화였다.
그런 내가 FM의 삶에서 크게 벗어나 무(無) 고용된 삶이란 걸 살겠다고 아등바등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무서웠겠나.
그때 마침 찾아온 그 프랑스 유학파 디자이너 실장님은 나에게 동아줄 같았다. 프로답고 능숙한 면이 분명히 있었다. 잘 잡고 있으면 좋은 가이드라인이 되어 줄 것이라 믿었다.
육아하면서 제작아이템에 매달려 공장이나 패턴실을 쫓아다니기에 버겁고 사실 제일 문제는 ‘뭘 모른다.’라는 데 있었다. 전문가가 아닌 내가 공장 사람들을 만나 그들에게 전달되는 건 오직 ‘나의 무지함’? 정도 랄까. 하하.
조금 얘기가 길어지다 보면 무시하기 딱 좋은 먹잇감이 되기 십상이었다. 봉제 불량에 관해서 클레임이라도 걸고 싶은데 뭐라고 걸어야 할지 몰랐다.
“거, 사장이라는 사람이 삼봉(밑단을 한 번만 말아 박는 봉제방식) 도 모르면 우쩌케!!!”라는 조소와 답답함이 섞인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내 두 뺨과 귀는 사정없이 붉어졌다.
공임도 협상의 여지가 없어진다. 5,000원이면 만들 옷이 8,000원이 되어 있었다. 꼭 패턴실이 그려준 대로 옷을 제작할 필요는 없다. 복잡한 패턴을 단순화하거나 주머니만 하나 빼도 공임이 내려가기 때문에 제작 단가가 낮아진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초반에 김실장님과 나는 좋은 파트너였다. 아니 실제로 합이 좋았다. 나는 말을 고분고분 잘 들었고 모르니까 하라는 대로 열심히 비위를 맞춰주었다. 내 눈엔 디자인 상의 주요 포인트 같았지만 그녀가 없애자면 없앴다. 공장에서 싫어하는 디자인이라고 하면 안 했다.
원단 종류도 가져다주는 원단에서 만족해야 했다. 실장님이 잘 아는 원단 집이고 꼭 이 원단 집에서 해야 단가 조정도 된다고 나를 설득했다.
실제로 불만족한다 해도 원단시장에서 몇 십 년 부대끼며 신뢰와 정보력을 쌓아온 그녀의 말에는 반박할 도리가 없었다.
문자 그대로 ‘아는 게 없어서’ 속수무책으로 말을 들었다.
하지만 공임이 500원 올라가고 차라리 판매가를 500원 올릴지 언정 디자인 자체로 예쁜 옷을 판매했어야 나만의 아이템이 생기는 것이다.
어느 날은 내 고집을 꺾기 싫었다. 투자비가 조금 들더라도 예쁜 옷을 만들어서 팔아보고 싶었다. 자수색깔이나 원단컬러도 조금 다양성 있게 해야겠다고 내 주장을 펼쳤다.
그녀는 처음으로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내가 부담스러웠는지 그날의 미팅에서 만큼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듯했다.
더 다양해진 원단과 지퍼의 종류 자수의 디자인을 상상하며 기대하며 만난 2차 미팅에서 나는 다시 패배를 맛보았다. 이번엔 새로운 무기들로 무장해서 자연스레 자기가 우세한 진영으로 나를 몰았다.
이렇게 하면 높은 시간 투자에 비해 공정만 많아진다고 공장에서 이번 제작을 안 하겠다 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자기가 설득을 해봤는데 어쩔 도리가 없다고 나의 한껏 고무된 의지를 단숨에 꺾어냈다.
공장과 실제 제작자들은 직접 만나보지도 못하게 했다. 전해 듣는 이야기만 듣고 그대로 믿어야 하는 형국이었다. 두 손 들고 항복할 수밖에 없는 의미 없는 전쟁이었다.
처음 제작을 시작했을 때 보다 제작에 대한 지식은 차곡차곡 쌓였지만 이상하리 만큼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줄었다. 마음껏 활개 치던 야생의 짐승이 보폭이 아주 좁디좁은 네모 사각형의 칸 안에서 갇혀 무기력해진 느낌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누가 결정권 자고 누가 일을 보조해 주는 사람인지 헷갈릴 만큼 나는 부하직원처럼 그녀를 따르고 있었다. 아니 거의 따라 야만 했다.
의류 제작할 때 디자이너들은 *스와치를 100% 이상 적극 활용한다. 스와치란 색상과 실제 촉감과 두께를 실사화해서 만져볼 수 있는 작은 원단 자투리 모음을 일컫는다.
원단집에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거대한 대폭 사이즈의 원단을 종류별로, 색상별로 디스플레이해 둘 수 없으니 손바닥만 한 사이즈로 줄여서 집게로 집어 놓고 저마다 가게 앞에 쌓아 둔다. 필요하면 가져가서 의류 제작에 활용하라는 의미이다.
스와치를 보고 실제 제작될 옷의 모습을 예측해 볼 수 있다. 어떤 경우는 아예 스왓치 자체가 예뻐서 원단만 보고 그에 걸맞은 옷을 만들기도 하니 의류 제작에는 없어 선 안될 필수 요소이다.
그래서 스와치 종류도 많으면 많아질수록 좋다. 제작할 때 아이디어도 훨씬 많아지고 똑같은 색상과 재질의 원단이라도 가격이 가게별로 다 다르다.
원단가게마다 묘하게 더 질이 좋거나 꾸준히 잘 팔리는 원단이 있다. 파란색도 가게별로 쓰는 파란색이 다 달라서 코발트 블루인지 아니면 살짝 워싱돼서 파랗지만 퍼런(?) 쪽에 가까운 원단인지 정말 종류가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아이템에 따라 그에 걸맞은 원단 스와치를 걷어와서 미팅에서 아이템에 맞는 원단을 선택하곤 한다. 우선, 스와치를 걷어 오는 일이 그녀의 업무 영역이었다. 애초에 잘 모르는 전문적인 영역과 제작에 투입되는 시간을 아끼고자 인력을 고용한 것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아이템마다 어울리는 원단의 스와치가 아니라 늘 보여주던 스와치가 자연스레 가방에서 튀어나왔다.
물론 산더미처럼 스와치를 갖다주고 힘든 노동을 하라는 뜻은 아니다. 그녀는 허리 디스크가 있어서 늘 어깨에 뭘 매고 다니는 걸 무척이나 힘들어했다. 걷기도 어려워했던 실장님에게 당연히 무리란 걸 안다.
그래도 서로 일로 만난 미팅이지 않은가. 이왕이면 예쁘고 아기자기한, 다른 브랜드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원단이나 그래픽이나 아이디어가 샘솟게 만드는 스와치였음 했다.
그 외에도 점점 불만은 쌓였다.
가장 큰 불만은 내가 다른 가게의 스와치랑 섞어서 제작을 하고 싶다고 하면 무척이나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는 점이다. 안 되는 이유도 다양했다.
1. 원단 폭이 달라서. 2. 가격이 달라서. 3. 불량이 발생할 수 있어서. 그리고 하다 하다 안되면 4. 그 원단집은 별로라서 라는 1차원 적인 이유로도 거절당했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나는 스와치 미팅을 몇 명의 디자이너를 거치며 꾸준히 해 왔다. 경험을 토대로 매 시즌 진행해 오면서 알게 된 사실은 저 위의 이유들은 사실상 진짜 ‘불가능’의 이유가 될 수 없다.
원단을 발주할 때 한 가게에서 한 번에 하면 되는데 가게마다 다르게 주문을 넣는 게 ‘번거롭다’가 차라리 이유가 되려면 설득력 있는 이유가 된다.
아마 결정적인 이유는 자신과 친하거나 오래 거래를 해온 원단집이 아니면 원단 가격네고가 어렵고, 조금이라도 싼 데서 제작을 해야만 총제작비에서 그녀에게 남는 마진율이 커져서였을 것이다.
나는 순진하게 그냥 정말 처음에는 ‘아~ 그런가 보다.’했던 것 같다.
김실장님의 태도도 점차 변해 갔는데 초반엔 그나마 존대를 하며 나를 부르거나 ‘사장님’이라고 부르기라도 했다면 점차 나를 부르는 호칭이 사라졌다.
가끔은 전화가 와서 받으면, 나를 꼬집어 호칭할 수 없어 스스로 난감해하는 게 느껴졌다. 정말 코미디였다.
반존대처럼 반말과 존대를 묘하게 섞어 대화를 하기 시작했고, 디자인실의 인턴처럼 나를 대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나를 사장님이라고 부르며 자신을 낮추자니 죽어도 싫은 그녀의 기분이 나에게 까지도 전해졌다면 이게 무슨 코미디가 아니겠나.
내가 갑에 위치에 있다고 은연중에 내가 느낄까 봐 그런 건지, 자존심이 상한 건지 지금까지도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볼 수 없다.
감히 늘 그녀가 말했던 걸 토대로 추측해 보자면
본인은 프랑스 유학파에 유명한 디자인실에서 호령하던 위치에 있었다. 심지어 아직도 다시 회사로 복귀하라는 콜을 종종 받지만 아이 때문에 그럴 수 없다.
그래서 비브랜드의 어디 이름도 없는 인플루언서 흉내 내는 사람의 옷을 비위를 맞추고 일하면서 은근히 영업해야 하는 입장이 정말 싫었을 수도 있다.
확실히 내가 알고, 느낄 수 있었던 건 나처럼 쉬운 '호구 사장님'을 절대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