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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일용 May 13. 2024

[홍시생각 14] 허허롭다…동학농민혁명 기념일

 '동학 개미'들만 혁명을 기억하는가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

40년이 다 돼간다. 그 때 연합뉴스(당시는 연합통신) 상식 시험문제 중 하나였다. 나로서는 도대체 어디서 들어본 적도 없는 생판 처음 보는 글귀였다.  이렇듯 '비상식적'인 문제를 상식 문제로 출제할 수 있나. 내 짧은 역사 지식을 탓할 대신 출제자를 원망했다.  


시험이 끝난 뒤에도 한참동안 '죽산', '백산'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누가 가르쳐준 적도, 누구에게 배운 적도 없으니 물어볼 사람을 찾는다는 것도 막막했다. 어쩌다 동학(東學) 관련 글을 읽다가 비로소 알게 됐다. '죽산'(竹山)과 '백산'(白山)이라는 걸. 

그러니까 죽창 든 무명옷차림의 동학군이, 앉으면 대나무 숲이 되고 일어서면 온통 흰 색 천지로 바뀌었다는 것 아닌가. 그만큼 위세가 대단했다는 뜻이렸다.    

마치 대단한 진리라도 발견한 양 의기양양해 하는 꼴을 옆에서 누가 봤다면 웃음을 참지 못했을 것이다. 


연합에 입사한 뒤 '전봉준 장군의 비서 역할을 한,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급 인사(진암 정백현)'의 손자 분을 민족뉴스취재본부장으로 모시고 일하게 됐다.  바로 정남기 전 한국언론재단 이사장이다. 

정 전 이사장은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이 되는 1994년 동학농민혁명 유족회를 창립하고, 2017년에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는데 공헌하는 등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선양하고 계승하는 데 크게 기여한 분이다. '동학란'을 '동학농민혁명'으로 제 명패를 달게끔 한 분도 이분인 걸로 알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학교 다닐 때 전혀 배운 기억이 없다. 연합에 들어와서 정 전 본부장을 모시고 민족뉴스취재부 북한부원으로 일하면서부터 동학에 대해 귀동냥으로나마 조금씩 배웠다. 

동학농민혁명이 고창, 정읍뿐만 아니라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등 전국적이라 만큼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생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됐다. 

전남 장흥 지역에서 마지막 항거를 벌이다 바다로, 사지(死地)로 내몰렸다는 것도 뒤늦게 알았다

학계에서 추정하기로는 학살된 동학군이 3만명에서 5만명이나 된다는 것도….


서울(한성) 진격로의 관문이랄 수 있는 공주 우금치 전투 패배는 지금도 납득이 되질 않는다. 영국제 게틀링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 조선관군 3백명에 동학군 4만명이 패퇴한 어처구니 없는 사실 앞에 그저 먹먹해질 따름이다. 동학군에게는 습기 차면 불도 잘 붙지 않는 화승총이 그나마 신식 무기였다. 대나무 죽창 들고 '총알이 피해간다'는 부적을 붙인 채 돌격하다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뤘다니 기가 막힌다. 지금 생각해도 원통하기 짝이 없다.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을 무장기포일(양력 1894년 4월 15일)로 할 것인지, 황토현전투 승전일(양력 1894년 5월 11일)로 할 것인지를 놓고 논쟁 끝에 결국 5월 11일로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올해에도 전북 정읍에서 문체부 주관으로 기념행사를 치렀다. 전국적 범위에서 일어난 혁명을 문체부가 주관하고, 서울 아닌 지역 도시에서 치르는 게 적절한 건가. 


우금치 전투 현장에는 '고색창연한' 위령탑이 서 있다. 마지막 항거 터인 장흥에는 동학군 묘 몇 기로 묘역을 '조성'해 놓았다. 그 외 몇몇 곳에 위령탑, 전승 기념탑 등이 초라하게 서 있다. 물론 고창, 정읍에는 기념공원을 조성하고 전봉준 장군 동상도 세워 놓았지만 그 역시 고만고만하다. 서울 종로 영풍문고 앞 좁은 틈을 비집고 관군에 압송되던 전봉준 장군을 형상화한 좌상도  '각고의 노력' 끝에 들여앉히게 됐다고 들었다. 


이게 평등과 반봉건, 반외세를 목숨바쳐 외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의 결과인가, 적절한 대우인가. 굳이 다른 나라의 사례에 견준다면,  1789년 프랑스 대혁명에 버금가는, 그보다 더 의미있다고 평가되는 동학농민혁명 아닌가. 


전봉준 장군 등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서훈 문제도 여전히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이나 을미의병이나 일제가 조선을 집어삼킨 1910년 이전에 똑같이 일어난 항일운동이다.  그런데 을미의병, 을사의병, 병오의병, 정미의병 참여자  총 2천722명(2024년 3월 기준)에게는 서훈하고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에게는 안 하고 있다.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1919년 대한민국 건국을 기준으로 삼아 을미의병 등에 대한 서훈을 모두 치탈하든지, 아니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에게도 서훈을 하든지 다시 검토해야 한다.     


엊그제 5월 11일 연합뉴스에 특이한 기사가 실렸다. 은퇴한 일본인 역사교사가 "130년 전 동학농민군 학살을  대신 사죄합니다"라는 내용이었다(연합뉴스 https://www.yna.co.kr/view/AKR20240510138100004?section=search). 기사에는 이 역사교사의 선조가 학살에 참여했다는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대신 사죄를 한다는 게 별나게 보였다. 그는 전남 나주에 일본인들이 세운 사죄비 건립에도 참여했다고 한다. 

어쨌든 양심을 가진 일본인이 존재하고, 그 일본인을 한국 매체가 발굴 취재한 것은 바람직스러운 일이다. 


 지난 2006년 조기숙 전 노무현대통령 홍보수석비서관이 동학농민혁명군 유족들에게 공식 사과를 한 적이 있었다. 알려진 대로 그의 증조부는 조선 말기 동학농민혁명을 촉발한 전북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이다. 조 전 수석은 그 해 12월 9일 오후 충남 공주유스호스텔에서 동학농민혁명군 유족과 시민단체 회원 등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동학농민혁명 112주년 기념 유족의 밤’ 행사에 참석해 “조상을 대신해 늦게나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동아일보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0/0000379027?sid=102).

조상의 잘못을 대신해 후손이 사죄한 경우는 좀처럼 보기드물기에 조 전 수석의 사과는 별나게 신선해 보였다. 당시 그는  “동학농민혁명군의 영혼을 위로하고 유족들의 아픔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최근 몇 달 동안 매일 아침 108배를 하고 있다”면서 “여러분의 한이 풀릴 때까지 계속할 생각”이라고 했었다. 지금도 108배를 계속하고 있을까, 아니면 한이 풀렸다고 여기고 있을까. 사죄 이후 그가 보인 행보를 보면 사죄의 진정성에 의문이 간다. 


5월 11일은 동학농민혁명 130주년 기념일이다. 

이날을 맞아

정읍에서 기념행사가 열렸고 

현지에서는 당시 봉기 장면을 재연하기도 했다

그 밖에 몇몇 행사가 열렸을 것이다


모처럼 가족과 함께 수원 광교호수공원에 나들이갔다. 

혁명 기념일인 어제와 달리 화창한 봄날씨에 상춘객들이 꽤나 많았다. 

이들에게  "5월 11일이 무슨 기념일인지 아십니까?" 묻고 싶은 객적은 충동이 일었다. 


'동학'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다. 그것도 매일처럼. 

바로 '동학 개미'들이다.  

네이버 클로버 X는 "개인 투자자들이 국내 주식 시장에서 외국인 투자자들과 맞서 싸우는 모습이 동학농민운동과 유사하다고 하여 '동학 개미'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설명해줬다.  

도대체 동학이 자본주의 꽃이라는 주식시장과 무슨 연관이 있길래 '동학 개미'요, '서학 개미'요라고 할까 의문을 가졌는데, 역시 내가 생각이 짧은 구석이 있었다….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에도 

증시에서는 외세에 맞선 동학개미들의 힘겨운 싸움이  매일처럼 계속되고 있다. 

이들이 존재하는 한 동학농민혁명도 잊지 않고 기억될 것이다(?). 

시나브로 잊혀져가는 동학혁명을 이렇게라도 기억해주니 기특하고 고맙다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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