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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고대도시에서 만난 ‘현대미술관의 오후’

이탈리아 로마 3

by 김숲


“우리 오늘은 현대 미술관 가볼래?”

“응?? 웬 현대 미술관?”

“약간.. 체한 거 같아. 소화할 필요가 있어”


로마에서의 두 번째 일주일을 시작하는 날 아침, 그가 현대 미술관을 제안했다. 고대, 중세로 가득 찬 도시에서 계획에도 없던 현대 미술관이라니 이 무슨 뜬금없는 제안인가? 그제야 우리의 여행 첫 주를 되돌아본다.

콜로세움, 포로로마노, 판테온, 캄피돌리오언덕, 산탄젤로성, 바티칸, 스페인계단, 나보나광장, 카라칼라 욕장, 트레비분수까지. “나 로마야!!! 이게 바로 역사야!!”라고 외치는 곳들을 모두 다녀왔다.


둘 다 무언가를 충분한 배경지식 없이 보고도 감흥을 느낄 수 있는 성격은 아니었으므로, 어딜 방문하든 그전에 관련 책과 관련 영상으로 어느 정도 이해를 했다. 그런데 여기는 기본으로 수천 년의 역사를 품은 도시, 로마다. 어디를 방문하든 관광책자의 한 두 문단짜리 설명이나 유튜브의 5분짜리 영상으로는 만족이 되지 않았고, 매일 밤 둘이 에어비앤비의 식탁에 앉아 캐리어 가득 가져온 책들을 읽으며 거의 변호사 시험 전날을 방불케 하는 밤들을 보냈다. 그렇게 일주일간 쉴 새 없이 흡입한 유구한 역사에, 장엄한 문화에 체한 그가 변화구를 던진 것이다.


사실 반가웠다. 압도적인 역사든, 숨 막히는 전경이든 어딘가 한 군데를 방문하면 적어도 1-2시간은 차분히 앉아 이를 소화하는 시간은 꼭 필요하다. 체력이 좋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오로지 ‘이곳에 다녀왔다’는 경험 자체에는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여행의 첫 목적지인 로마에서는, 나의 강력한 추천으로 이곳에 오게 된 그에게 빠르게 모든 곳을 보여 주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나보다 훨씬 체력이 좋은 그였기에, 내가 좀 지쳤어도 그를 위해 계속해서 다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15년 만에 로마에 다시 온 내가 너무 신나 하는 것 같아서 최대한 맞춰 주고 있었단다. 코로나로 인해 신혼여행도 국내로 갔던 우리의 첫 장기 해외여행인 만큼, 둘의 여행 스타일을 맞춰가는 과도기가 아니었을까?


“사실.. 나도 좀 쉬고 싶긴 했어.”


그렇게 원래의 계획을 수정하고 현대미술관으로 향한다. 오늘 하루는 고대, 중세와 잠시 작별한 채 지금까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차분하게 소화하는 시간을 갖기로 하고.


로마 현대미술관은 로마에서 가장 큰 공원, 보르게제 안에 있다


로마 현대미술관은 마침 로마에서 가장 큰 공원 안에 있다. 로마에서 우리의 두 발이 되어준 전기자전거 라임을 타고 포폴로 광장을 시원하게 가로질러 숲이 우거진 보르게제 공원까지 한달음에 도착했다. 매일 가방에 담아두었던 가이드북을, 카메라를 과감하게 두고 가뿐하게 나선다.


기대 이상으로 볼거리가 많았던 현대미술관을 관람한 뒤, 오늘의 실질적 목적지인 미술관 카페를 찾았다. 어느 도시든 미술관 안의 카페나 식당의 분위기가 다른 유명한 곳들보다 더 좋은 경우가 있는데, 로마 현대미술관 속 카페는 정말, 우리가 찾던 바로 그런 공간이었다.



현대미술관은 로마의 그 어떤 관광지와도 비교할 수 없이 인구밀도가 낮았고, 카페는 그보다 더 한적했다. 아, 이제 보니 모두가 야외 좌석에 앉아 있는 탓이다. 등나무 그늘이 있는 야외좌석에 자리를 잡은 뒤, 그는 여기서도 포기하지 않고 아이스커피를 찾겠다며 Caffe Freddo(직역하면 ‘차가운 커피’, 하지만 실상은 얼음 2-3개를 띄운 에스프레소)를, 나는 어디서든 안전한 카푸치노와 브라우니를 시켜본다. 음료를 마시며 주변을 둘러보다 문득 손님들이 커피와 와인을 앞에 두고 한없이 수다를 떨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탈리아 아이스커피의 실상


음료를 비우기 무섭게 치워버리고 테이블을 비워줄 것을 압박하는 로마 주요 관광지 유명 카페들의 야박한 경험 때문에 한껏 위축되어 있던 터라 이곳의 분위기가 말할 수 없이 반갑다. 일주일치 긴장이 풀린 그는 무거운 카메라 대신, 핸드폰에 담아 온 전자책을 읽기 시작했고, 나는 두꺼운 가이드북 대신 손바닥 크기의 노트에 여러 생각들을 적었다. 그렇게 여행 시작 일주일 만에 드디어 조용히 앉아 각자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시간을 보냈다.


디저트를 하나 더 시켜 먹으며 내리 세 시간을 앉아 있었다. 고작 세 시간의 고요였을 뿐인데, 일주일치 체한 것이 모두 내려간 느낌이다. 그제야 이 여행의 취지가 생각난다. 여행 전에 열심히 고민했던 여행의 목적, 내가 원했던 ‘채우는 여행’과 그가 원하는 ‘비우는 여행’. 비워야 채울 수 있으니 결국 서로 원하는 것이 다르지 않다고 좋아해 놓고서, 정작 여행이 시작되자 쫓기듯 갖가지 정보와 경험으로 채우려고 했다.


로마 2주동안 두 번 방문한 현대미술관 카페


소중한 이 두 달을 온전히 여행하며 보내기로 결심한 것은 모든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차분히 생각해 보기 위해서였지, 로마의 역사를 속속들이 알기 위해서도, 미술사를 공부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아름다운 등나무 밑 옅은 햇살을 받으며 긴 대화를 나눈 끝에, 우리는 남은 여행의 속도를 조금 늦추기로 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어디를 가든 ‘현대미술관의 오후’를 하나쯤 넣어두었다.


로마에서 고대 유적에 살짝 지쳐간다면


* 현대미술관 + 미술관 카페


- 사실 ‘로마’와 ‘현대미술’은 뭔가 이탈리아 식당에서 초밥을 찾는 것처럼 뭔가 어긋난다고 생각했기에 컬렉션에 대한 기대를 많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정물화가 조르주 모란디나 모딜리아니 작품은 물론이고 고흐, 모네, 드가, 폴락 같이 우리에게 익숙하고 반가운 작품들도 만날 수 있다.

- 현대미술관 카페를 이용하는 손님들은 낮에는 모두 야외좌석에 앉기 때문에 만약 내부에 앉기로 한다면 아름답게 인테리어 된 카페 전체를 독점할 수 있다. 식사 메뉴가 훌륭하다. 밤에는 조명과 함께 분위기 있는 식당으로 변신하니 꼭 가보면 좋겠다.


* 21세기 미술관 + 미술관 카페


- 현대미술관과 카페의 좋은 기운을 받아 며칠 후 내친김에 ‘로마 21세기 미술관(MAXXI)’도 가보았다. 사실 서울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를 설계한 세계적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의 작품이라는 점에 끌려 방문했는데, 미술관이면서 동시에 건축 박물관이기도 해서 건축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꼭 한 번 가볼 만하다.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21세기 미술관 외관

- 21세기 미술관의 굿즈샵과 함께 있는 카페도 훌륭하다. 바로 옆에 디자인 스쿨이 있어서인지 로마 카페 답지 않게 카공족이 많다. 점심시간에는 원하는 토핑을 골라 만들어 주는 샐러드 메뉴가 있는데, 꽤 실해서 주변 직장인들과 학생들이 애용하는 듯하다. 우리도 이곳에서 식사 후 커피, 디저트까지 야무지게 시도해 보았다.


로마에서 보기드문 카공족
원하는 야채와 단백질, 빵과 쥬스로 구성할 수 있는 간단한 점심 세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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