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로마 4
로마 더 맛있게 걷기 - 수플리 전문점과 생면 파스타샵
한 도시에서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경험들이 있다. 좋았던 곳 두세 번씩 가보기, 책 한 권 들고 하루 종일 공원에서 시간 보내기, 그리고 유명하지 않은 식당, 카페도 가보기 등등… 전형적인 노선에서 벗어날 때마다 재미있는 세상이 펼쳐졌다. 그중 로마에서 잘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숙소 주변 탐험’이다.
로마에서의 두 번째 주를 맞이하며 우리는 숙소를 옮겼다. 주요 관광지가 몰려 있는 구도심을 기준으로 강 아래 트라스테베레 지역에서 매일 출퇴근을 하다가 도심으로 진출했더니 동네에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이 훨씬 많았다. 숙소 맞은편에는 청과물 시장이 있어 매일 아침 갓 구운 빵, 치즈, 신선한 과일과 야채를 싼 가격에 살 수 있었고, 버스정류장과 숙소 사이 길에는 밤늦게까지 사람들이 줄을 서는 식당들이 즐비해 있었다.
매일 아침저녁 숙소 주변을 탐방하던 중 관광지에서 발견하지 못한 재미있는 가게들을 몇 개 발견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Supplì(수플리) 전문점, 그리고 하나는 생면파스타 전문점이다.
Supplì(수플리)는 토마토소스에 버무린 쌀을 치즈와 함께 길쭉한 공모양으로 튀긴, 한 마디로 ‘밥튀김’이다. 로마의 길거리 피자 가게에서 호기심에 시켜 먹으며 알게 되었다. 사실 우리나라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맛볼 수 있는 ‘Arancini(아란치니)’와 비슷한데, 아란치니는 시칠리아에서 먹는 크고 둥근 밥튀김(고기 완두콩 등 다양한 재료), 수플리는 로마에서 먹는 작고 길쭉한 밥튀김(토마토소스, 치즈 베이스)이라 조금 다르다. 로마에서 아란치니를 찾으면 발끈! 하며 수플리라고 정정해 줄지도 모른다.
수플리를 길거리 피자 가게나 식당의 사이드 메뉴로만 생각하던 중, 두 번째 숙소 근처에서 수플리‘만’ 파는 작은 식당을 발견했다. 수플리는 주로 토마토소스베이스이지만 이곳에는 바질페스토 베이스, 페코리노치즈베이스, 까르보나라베이스 등 다양한 맛의 수플리가 가득했다. 하나에 2유로(3,000원) 정도의 부담 없는 가격이라, 치즈베이스 수플리 하나, 토마토베이스 수플리 하나를 사서 라면과 함께 먹으면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린다.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퇴근길에 수플리 한 봉지를 사가려는 주민들이 계속 들어온다. 귀국한 뒤에도 문득문득 그 맛이 그리워 찾아보니, 아란치니가 아니라 ‘수플리’를 파는 곳은 전국에서도 한 두 군데 정도밖에 없다.
우리 숙소의 바로 옆 건물에는 또 하나 흥미로운 가게가 있었는데, 바로 ‘생면 파스타’만 파는 곳이다. 그러니까, 생면으로 만든 완성된 파스타를 파는 식당이 아니라, 주민들이 생면을 사가서 취향껏 요리할 수 있도록 ‘생면’만을 파는 가게다! 이탈리아에서는 파스타가 주식일 테니, 이런 가게가 있을 법했다. Nonna(할머니) 한 분과 Nonno(할아버지) 한 분이 매일 아침 생면을 뽑아 팔고 계셨기에 꼭 한 번 사 먹어 보고 싶었다.
로마에서는 계란 노른자를 베이스로 한 까르보나라 외에도, 치즈와 후추만 들어가는 Caccio e pepe(까치오 에 페페) 파스타가 유명하다. 로마에서의 첫날 구글 평점 최고의 엄청난 맛집이라고 하는 식당에서 까르보나라와 아티초크 튀김을 시도한 뒤 입맛을 잃어버린(?) 우리는 계속 카치오 에 페페 파스타 시도를 미루고 있었으니, 생면파스타집에서 면을 사서 직접 만들어 보기로 했다.
막상 생면파스타집에 들어가는 면보다도 할아버지가 뒤에서 빚고 계신 라비올리가 너무 맛있어 보였다. 홀린 듯 라비올리를 고르니, 할머니가 이탈리아어로 와다다다 라비올리 끓여 먹는 법을 알려주신다. 물이 끓을 때 넣어서 8분 정도가 있으면 라비올리가 물 위로 올라올 테니, 그때 1분만 더 끓였다가 빼라는 말이다.
샐러드 한 접시와 호기심에 시장 빵집에서 사 온 취나물빵(?), 그리고 카치오 에 페페 라비올리로 식탁 가득 채워 든든하게 먹었다. 카치오 에 페페가 치즈베이스인 데다가 라비올리 안에도 치즈로 차 있어서 조금 느끼하긴 했지만, ‘아, 로마 사람들은 이렇게 생면을 사 먹는구나’ 하며 싹싹 맛있게 비웠다.
무려 66일간의 자유 여행에서 매일 세끼를 밖에서 사 먹기에는 예산의 문제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건강하지 않을 것 같았기에 하루 한 끼는 늘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해 먹었다. 그 덕에 어떤 도시의 어떤 숙소든 근처 마트와 시장에서 장 보는 재미, 그 나라, 그 도시에서만 볼 수 있는 재미있는 식자재로 요리하는 재미까지 더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여행자는 숙소에서 요리를 해 먹는 것까지는 어려울 테니, 만약 자유여행이라면 하루 한 끼 정도는 관광지를 벗어난 곳에서 해보기를 권하고 싶다. 매 도시 일정을 마무리할 때마다 둘이서 가장 맛있었던 식사, 레스토랑을 꼽아 보았는데, 유투브나 블로그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그 인생 맛집’은 늘 후순위에 머물렀다. 자신의 숙소 주변 식당 중 구글평점이 높고 오고 가며 볼 때마다 손님들이 가득한 식당이 있다면 거기가 정말 맛집일 가능성이 높다. 맛집글을 보고 찾아오는 전 세계 관광객들을 매일 수백 명씩 기계적으로 상대하는 관광지 중심가의 레스토랑보다 훨씬 더 친절할 것이다.
로마는 매년 수천만 명의 관광객이 가장 이탈리아 스러운 것을 보겠다고 찾아오는 도시다. 그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식당도 카페도 전형적인 분위기와 전형적인 메뉴로 빼곡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곳들은 늘 관광지 지도 바깥에 있었다. 그곳에서야 비로소, 유적지같은 이 도시가 생생히 살아 숨 쉬는 소리와 냄새 그리고 사람들의 표정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좋아하는 로마는 매일 아침 숙소 문을 열고 내딛는 그 첫걸음, 우리가 마음대로 그리는 그 길 위에서 시작되었다.
어떤 길로 가든 괜찮다. 로마에선 길을 잃어도 로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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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갑내기 변호사커플, 때로는 집 안까지 타인의 삶을 가지고 들어오는 우리가 오로지 ‘우리’를 위해 보낸 66일의 기록. 같은 곳의 기억을 한 명은 글로, 한 명은 사진으로 담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