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토스카나 1 소도시 탐방
토스카나 - 고대에서 중세로, 6일간의 시간여행
이탈리아 토스카나 소도시 탐방
고대 유럽의 중심이었던 로마, 그리고 르네상스의 중심이었던 피렌체. 고대와 르네상스 사이 천 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으므로, 우리도 이 두 도시 사이에 충분한 시간을 두기로 했다. 불과 300km - 차로는 세 시간 남짓한 거리지만 총 6일에 걸쳐 고대를 떠나 중세, 그리고 마침내 르네상스로 향하는 시간여행을 하게 되었다.
로마에서 피렌체로 향하는 길목 곳곳에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소도시들이 자리한다. 숙소 두 곳을 거점으로 두고 6일간 총 일곱 개의 소도시를 둘러봤다. 말도 안 되게 촘촘해 보이는 이 일정은 사실 아주 여유로웠는데, 도시 하나하나가 사실은 마을만큼 작은 덕분이다. (물론 관광객들이 다니는 중심가를 기준으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입장해 설렁설렁 걸으며 식사를 하고 상점을 구경하고 커피나 와인 한 잔을 마셔도 반나절이면 ‘한 바퀴를 다 돌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대망의 시간여행을 위해 로마 테르미니역에서 예약해 둔 렌터카를 인수했다. 맙소사, 수동이다. 한국에서 예약할 때 가격을 낮추는 데만 집중한 나머지 ‘Manual(수동)’이라는 안내를 보지 못했다. 다행히 군대에서 수동운전을 해보았다는 그가 약 10년 만에 처음으로 스틱을 잡았고, 우리는 블루투스기능도 선팅도 없는, 자동 아닌 수동차로 토스카나를 누비기로 한다.
구체적 계획 없이 어느 도시로든 이동하기 좋은 위치에 숙소를 잡은 덕분에 어느 날은 하루 종일 숙소에서 쉬다가 늦은 오후에야 마실 나가듯 한 도시를 걸었고, 또 어느 날은 아침 일찍부터 작정하고 다른 도시를 탐방했다. 그중에는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의 촬영지로 유명세를 타는 곳도 있었고, 와인애호가들의 성지라고 불리는 곳도 있었다. 또 숙소 근처라 우연히 들렀을 뿐 전혀 정보가 없었던 곳도 있다.
이탈리아 중부지역은 우리가 이미 2주를 보낸 라치오주(주도: 로마), 움브리아주(주도: 페루자), 그리고 토스카나주(주도: 피렌체)로 이루어져 있다. 한국 사람들이 많이 찾는 페루자, 아시시, 오르비에토는 토스카나가 아니라 움브리아에 속한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뒤 번성하게 된 이 도시(국가)들은 각자 높은 지대에 성벽을 쌓고 견고한 자신들의 세상을 구축했다. 덕분에 지금의 우리는 각 도시가 내보이는 멋진 전경을 누릴 수 있는 것이고.
관광객이 일 년 내내 몰리다 보니 도시마다 내세우는 관광상품이 분명하다. 와인이 유명한 도시에는 와인, 와인잔, 치즈와 살라미까지 온통 와인 관련 상품으로 가득하다. 영화 트와일라잇의 배경이 된 도시,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이 된 도시에서는 영화 속 의상을 입고 포즈를 취하는 사람들로 붐빈다.
이번 여행이 ‘우리의 취향’을 찾아가는 여정이라 느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어린 시절 본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는 고전 영화의 배경이라는 점도, 사실은 그렇게 즐기지 않는 와인 테이스팅을 해야 한다는 점도, 더 이상 우리가 어딘가를 꼭 방문하거나 좋아해야 할 이유가 되지 않았다.
일곱 개의 도시를 누빈 뒤, 둘 다 입을 모아 좋았다고 기억한 곳을 되새겨 보았다. 어디까지나 나와 그의 취향, 그것도 서른다섯의 우리 취향에 따른 것이다. 3년 뒤 이탈리아에 다시 오기로 약속했는데, 그때는 취향이 달라져 와인과 치즈 투어만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3년 후가 되어도 10년 후가 되어도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옷을 입고 사진을 찍을 리는 없다는 것. 그건 우리의 불변의 취향이다. 3년 후에 정말 다시 이탈리아에, 그리고 토스카나에 오게 되다면 그때에도 꼭 다시 찾고 싶은 도시들을 소개한다. 아마 그때의 우리도 좋아할 거라 확신이 든다.
* 코르토나
코르토나는 에트루리아 시대 (*기원전 현재 이탈리아 반도의 중부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고대 문명)부터 이어진 긴 역사에 비해 여행객들에게 다소 덜 알려진 토스카나 소도시 중 하나다. 마을 입구부터 예술의 향기가 진하게 느껴지는 이곳에서 우리는 소리소문 없이 살바도르 달리 작품 수십 개를 소장한 갤러리를 만나기도 했다. 성곽에서 보이는 평야와 호수가 영감이 되어, 우리에게는 낯설지만 이탈리아인들에게는 익숙한 예술가들을 배출했다고 한다.
* 시에나
토스카나의 주도인 피렌체 다음으로 가장 유명한 도시는 아마 시에나일 거다. 통일 이전의 이탈리아에서 시에나 공화국은 피렌체와 경쟁을 할 정도로 강력했지만, 피렌체가 토스카나의 제일강자로 자리매김하며 상대적으로 시에나는 쇠퇴했다고 한다. 그렇게 근대화가 더디게 진행된 덕분에 지금은 중세 번영했던 당시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한 채 우리 같은 시간여행자들을 매료하는 도시가 되었다.
시에나의 중심에 말발굽 모양의 캄포광장이 있다. 해마다 이곳 캄포광장에서 시에나의 17개 콘트라다가 참가하는 경마축제 ‘팔리오’를 위해 광장 전체에 모래가 깔리고 사람들이 몰리는 모습이 장관이라고 한다. 우리가 방문한 날 저녁, 콘트라다의 행사가 있었는지 수백 명의 사람들이 각기 초록색 스카프를 매고 광장으로 모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가운데를 향해 비스듬히 경사진 광장, 그 기운 광장에 뛰어노는 아이들과 털썩 주저앉아 시계탑을 바라보는 사람들, 광장을 둘러싼 식당들에서 그 사람들을 바라보며 식사하는 사람들까지. 광장의 경사면이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광장 본연의 기능을 더하고 있었다. 우리도 시에나 전체를 두 번이나 돌고도 아쉬움에 광장에서 한없이 머무르다 무려 8시간의 주차비용을 내고서야 부랴부랴 시에나를 떠났다.
* 아레초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주요 촬영지, 그리고 유럽 최대 규모의 골동품 마켓. 이 두 가지 만으로도 아레초를 방문할 이유는 충분하다. 마켓이 끝난 다음 날인 월요일 아침 한 두 개의 골동품 상점이 여전히 문을 열어 이곳이 아레초라는 사실을 상기해 주었지만, 골목을 따라 들어선 모든 상점은 문을 닫은 채였다. 옛날부터 금세공으로 부를 축적한 도시라는 설명 때문인지 모르지만 다른 중세 도시들에 비해 월등히 규모가 크고 도시화되어 있다. 중심가 위주로 한 바퀴를 다 걸었을 때 즘 폭우가 쏟아졌고, 우리는 비를 피하기 위해 그란데 광장을 바라보는 아치형 회랑 아래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입구에 논나(할머니) 한 분이 서서 주문이 들어오면 그에 맞춰 생면을 직접 반죽하고 있어, 누구든 그냥 지나치기는 힘든 곳이다. 가족모임을 하는 옆 테이블을 훔쳐보며 호박꽃튀김과 트러플 파스타, 피렌체 스테이크를 따라 시켜 본다. 아마 쏟아지는 비 속에서 아레초 광장을 바라보며 식사를 한 기억 때문인지, 혹은 토스카나 대장정의 마지막 목적지라는 점 때문인지 둘 다 소도시 중 가장 좋았던 곳으로 아레초를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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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갑내기 변호사커플, 때로는 집 안까지 타인의 삶을 가지고 들어오는 우리가 오로지 ‘우리’를 위해 보낸 66일의 기록. 같은 곳의 기억을 한 명은 글로, 한 명은 사진으로 담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