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로마 5
로마 마지막 편 - ‘2주 만에 로마를 다 보았다’는 대단한 착각
로마에서 11일을 보낸 후,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생각에 당황했다.
물론 착각 중 착각이었다. ‘로마를 다 봤다’는 것은 가장 전형적이고 가장 유명한 곳‘만’ 다 봤다는 뜻에 불과했다. 서울을 찾은 관광객이 경복궁, 명동, 남산타워, 가로수길을 다녀온 뒤, '이제 서울을 다 봤다'며 갈 곳이 없다고 투덜대는 격이었다.
분명 며칠 전 현대미술관에서 각성하고 여행의 속도를 늦춰보기로 뒤늦게 결심했지만, 그 뒤로도 매일 쫓기듯 여행하던 습관은 쉽게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남은 삼일 동안은 진짜 천천히 로마를 알아가 보기로 하고 아직 해보지 못한 것, 아직 가보지 못한 곳들을 꼽아 본다.
그렇게 하루는 보르게세 공원에서 자전거 타고 사진 찍고 책을 읽으며, 또 하루는 채식식당과 책방을 찾아다니며, 마지막 하루는 종일 뚜벅이로 다니다 로마의 야경을 누려보기로 했다.
기대 없이 보낸 삼일 간 발 닿는 곳마다 새로운 로마가 펼쳐졌다. 보르게제 공원에서는 평온하게 공원에서의 하루를 즐기는 로마 시민들 사이에 섞여 얼결에 경마 경기를 얻어 보고, 뚜벅이 하루에는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정원을 찾아갔다가 하이엔드 주얼리 브랜드인 불가리의 140주년 행사 리허설을 구경했다.
고르고 골라 찾아간 독립서점 지하에서 아우렐리우스 성벽을, 테르미니 기차역에서는 세르비우스 성벽을 무심히 마주치며 로마의 위엄에 다시 한번 놀라기도 한다. 고대 유적마다 아름다운 조명을 설치해 낮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는 로마를 뒤늦게 발견하며, 매일 밤 숙소에서 도대체 누가 로마를 시시하다 했냐며 멋쩍게 웃었다. ‘갈 곳이 없다’는 것은 로마에 대한 내 이해의 한계를 드러내는 건방진 생각일 뿐이었다.
무궁무진한 로마를 살피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날이 되었다. 로마는 토스카나 소도시들, 피렌체, 빈, 베를린 등 남아 있는 수많은 목적지들 중 첫 번째 여행지였다. 이 여행은 이십 대 초반 각자가 홀로 다니던 여행이 아니라, 서른 중반의 우리가 함께 하는 여행이었다. 삼십오 년의 인생 중 겨우 4년을 함께 한 우리가 처음 여행을 통해 ‘우리의 취향’을 알아가는 여정. 역사도, 예술도, 미식도, 낭만도 다 있는 로마는 서로에 대한 탐색전을 펼치기에 더없이 좋은 무대였다.
다시 로마에 돌아오기 위해 동전을 던지러 첫 주에 갔었던 트레비분수에 다시 가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이구동성으로 가지 않기로 했다. 분수를 배경으로 인생샷을 건지려는 전 세계 관광객들 사이에서 10분도 못 견디고 도망 나왔던 우리다. 그렇게 취향이 맞춰져 간다. 트레비분수에 동전을 던지지 않았으니 트레비분수에는 돌아오지 못하겠지만 괜찮다. 이번에 알게 된, 혹은 아직 가보지 못한, 그래서 꼭 다시 돌아오고 싶은 로마가 가득 남아있다.
이제, 토스카나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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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갑내기 변호사커플, 때로는 집 안까지 타인의 삶을 가지고 들어오는 우리가 오로지 ‘우리’를 위해 보낸 66일의 기록. 같은 곳의 기억을 한 명은 글로, 한 명은 사진으로 담습니다.
PS. 로마에서 가본 책방과 채식식당 중 가장 소개하고 싶은 한 군데씩을 꼽은 글은 아래에서 볼 수 있다.
취향여행 - 책과 채식 해외 편
1. 독립서점
https://brunch.co.kr/@tripterian/5
2. 채식식당
https://brunch.co.kr/@tripterian/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