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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황제가 잠든 곳에서 사랑이 시작될 수 있을까

이탈리아 로마 2

by 김숲

동갑내기 변호사커플, 때로는 집 안까지 타인의 삶을 가지고 들어오는 우리가 오로지 우리를 위해 보낸 66일의 기록. 같은 곳의 기억을 한 명은 글로, 한 명은 사진으로 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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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영원을 보기 위해 로마를, 사랑을 찾기 위해서는 피렌체나 베니스를 간다. 그래서 상상도 못 했다. 로마에서 이렇게 로맨틱한 순간들을 맞이하게 될 줄을. 그것도 가장 로맨틱하지 않을 것만 같은, 황제의 무덤들에서 말이다.


그날은 왠지 린넨 재킷이 입고 싶었다. 전날 콜로세움과 포로로마노를 돌며 흙과 땀에 절어버린 탓에, 오늘은 뭔가 깔끔하게 보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 아이보리 린넨 재킷으로 말할 것 같으면, 두 달이 넘는 긴 여행 중 나의 존엄성을 지켜 준 몇 안 되는 아이템 중 하나다. 둘의 캐리어는 미련하게 많이 챙긴 책들, 휴대주전자, 대용량 화장품과 샴푸 등으로 가득 찬 나머지, 옷을 담을 공간이 부족했다. 그나마 여름이라 여러 벌 챙겨 올 수 있었던 상하의를 매일 아침 창의적인 조합을 생각해 돌려 입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중 무게가 좀 있지만 이후 공연을 볼 때 입어야 한다며 공수한 것이 바로 그 린넨재킷이다.


내가 필살의 린넨 재킷을 꺼내자, 그도 질세라 가지고 온 옷 중 가장 그럴싸한 남색 린넨셔츠를 꺼내 입었다.무덤 가면서 도대체 왜 멋을 내는 거야?”하며 한바탕 웃고, ‘천사의 성이라고 불리는 산탄젤로 성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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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재임시절 자신이 묻힐 곳으로 건축한 산탄젤로성은 이후 80년간 황제들의 영묘로 사용되었지만, 교황청에 편입된 뒤 감옥, 교황의 숙소, 방어 진지로 사용되다 지금에 이르렀다. 수천 년간 확고한 정체성을 지킨 유적들만 가기에도 시간이 모자란 로마에서, 다양한 쓰임으로 로마제국과 바티칸에 봉사한 이 성은 비교적 관광객이 적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우선 성과 로마시내를 연결하는 다리 위에서 동그란 성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위해, 그리고 성 꼭대기 전망대에서 시원하게 펼쳐진 로마시내를 조망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같은 생각으로 열심히 전망대를 가는 길, 성 안의 좁은 계단을 빙글빙글 돌아 걷다 밝은 빛이 보인다. 전망대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성 안에 자리한 카페였다.


성벽의 크고 작은 창마다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고, 과거 병사들이 보초를 섰을 자리에서 이제는 손님들이 커피와 와인을 즐기고 있었다. 동그란 성의 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카페를 따라 동그랗게 걷다, 바티칸을 정면으로 바라는, 말 그대로 숨이 멎을 것 같은 전망을 자랑하는 명당자리를 발견했다. 두 여성이 바티칸을 배경으로 샴페인을 마시는 장면은 마치 영화 같아서, 우리를 포함해 많은 관광객들이 홀린 듯 멈추었다. 이 장면을 오래 보고 싶어 맞은편 벽 쪽 자리에 앉아버렸다. 긴 여행의 묘미가 따로 있나, 이렇게 즉흥적인 시간도 갖는 거지! 그러다 용기를 내 두 여성분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아쉽게도 영어를 하지 않는 분들이었지만, ‘허니문, 허즈번드이런 단어들을 듣고는 함박웃음에 포옹까지 해주더니, 마침 자신들은 일어날 때가 되었다며 자리를 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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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의 햇빛을 절묘하게 막아주는 두터운 성벽, 성의 창문사이로 들어오는 5월의 선선한 바람, 정면에 펼쳐진 바티칸과 로마시내 전경. , 그리고 아침에 고집을 부려 입은 리넨 재킷까지. 그렇게 얼떨결에 그와 나의 인생 통틀어 가장 뷰가 좋고 분위기가 좋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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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날의 사진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분위기에 취해 평소에 하지 못했던 낯 뜨거운 말들도 나눠보고, 서로 사진도 찍어주며 다시 오지 않을 그 순간을 오래오래 붙잡았다. 성에서 내려와 그날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HJ_00488.jpg 산탄젤로 성 전망대에서 바라 본 바티칸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무덤에서 뜻밖의 로맨틱한 순간을 경험한 지 불과 이틀 뒤 긴 하루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밤 여덟 시가 가까워 분명 문을 닫았어야 할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영묘그리고 평화의 제단박물관이 불을 밝히고 있는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미 하루 종일 돌아다닌 뒤라 피곤했지만 열린 마음으로 입구에 가니, 직원이 다짜고짜 원 유로! 1 euro!”를 외친다. 알고 보니, 일 년에 한 번 로마 박물관들이 상징적인 입장료만을 받고 야간에 개장을 하는 Notte dei Musei(박물관의 밤)이었다.


HJ_00753.jpg 평화의 제단, 해가 있을 때는 쉽게 들어갔지만 나올 때 보니 대기줄이 길었다


며칠 후에 올 계획을 하고 있었던 곳인지라 반갑게 들어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평화통치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평화의 제단을 구경했다. 그런데 주변을 보니 사람들이 제단 구경에는 관심이 없고, 너나 할 것 없이 제단 앞에 주저앉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제단 앞에 그랜드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약 한 시간 뒤인 9시부터 류이치 사카모토의 피아노곡을 연주하는 연주회가 예정되어 있단다. 피아노가 잘 보이는 창가에 걸터앉아 기다려 보기로 했다. 바로 옆에 앉아 같이 한 시간을 기다린 이탈리아 부부는 로마 외곽에 살면서, 오늘처럼 박물관의 밤에는 좋은 프로그램들을 무료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꼭 시내 나들이를 한다고 했다. 한참 수다를 떨다 보니 제단 앞에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찼고 공연이 시작되었다.


HJ_00784.jpg 평화의 제단을 배경으로 펼쳐진 피아노 연주


한 황제의 무덤에서 최고의 뷰를 배경으로 식사를 한 지 불과 이틀 만에 또 다른 황제의 무덤가에서 류이치 사카모토의 피아노 연주곡을 들으며, 이 연이은 행운에 문득 웃음이 났다. 로마는 여행자가 사랑, 열정, 감동- 무엇을 바라며 로마에 왔든, 기꺼이 들어줄 의향이 있는 도시였다.


다만 그런 로마를 만나려면, 전형적인 곳에서 전형적인 것만 보고 가겠다는 틀에서 벗어나, ‘무덤에서도 로맨스를 찾겠다는 정도의 의지는 있어야 하겠다.


황제의 무덤에서 뜻밖의 순간을 맞이하고 싶다면


* 아우구스투스 영묘, 평화의 제단


시민이 주인인 공화정에서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의 시대를 연 로마제국 제 1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자신과 가족이 묻힐 무덤으로 건축했다. 영토 확장을 위해 이베리아반도로 이집트로 계속해서 원정을 다니면서도, 자신은 죽어서 로마에 묻힐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 영묘 옆에는 기원전 13년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히스파니아, 갈리아 원정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원로원이 헌정한 '평화의 제단'이 나란히 있다. 로마제국이 평화를 누린 안정기를 ‘팍스 로마나 (PAX ROMANA)’라고 하는데,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바로 이 팍스 로마나를 연 인물이므로, 역사를 생각하면 평화의 제단 박물관에 방문할 만하다.


* 산탄젤로 성 (Castel Sant’Angelo)


HJ_02267.jpg 산탄젤로 성 야경, 성 꼭대기에 미카엘천사 조각상이 보인다


위에서 본 아우구스투스 영묘는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비롯해 여러 후대 황제들의 무덤으로 사용되었다. 로마 제국의 14대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자신이 죽은 뒤 그곳에 들어갈 자리가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스스로의 무덤이 될 새로운 영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건축에 관심이 많아 통치 시절 ‘판테온’과 같은 멋진 건축물을 남긴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자신의 무덤으로 준비한 것이 바로 산탄젤로 성이다. 80여 년 간 로마 황제들의 영묘로 쓰이다 6세기 전염병 시절 영묘의 꼭대기에 로마시민을 구하기 위해 대천사장 미카엘이 나타났다 하여 지금의 이름인 ’천사의 성’가 되었다고 한다. 테베레 강 건너에 있어 주목받지 못하다, 바티칸과 가까운 덕에 중세 이후 교황청의 감옥으로, 전쟁 시에는 교황들의 도피처 혹은 숙소로 용도를 바꿔가며 이용되었다. 낮에 가면 성 위에서 바티칸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전체 도시 전경을, 저녁에는 조명을 받아 아름다운 성과 테베레강이 어우러진 야경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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