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로마 1
동갑내기 변호사커플, 때로는 집 안까지 타인의 삶을 가지고 들어오는 우리가 오로지 ‘우리’를 위해 보낸 66일의 기록. 같은 곳의 기억을 한 명은 글로, 한 명은 사진으로 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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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1 - 3,000년의 역사를 간직한 도시와 나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2010년 여름, 로마에서 두 달을 보낸 적이 있다. 짧은 인생 대부분을 한국에서 보낸 내게, 수천 년 역사의 유적들이 그저 무심히 자리한 로마는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다. 어설프게 새로 지은 건물 따위는 설 자리가 없는 그곳에서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도시의 역사를 설명하는 책 한 권을 들고 곳곳을 누비며 로마를 눈에 담았다.
로마제국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그 수많은 유적지를 방문한 것이 아쉬워 귀국한 뒤 뒤늦게 ‘로마인 이야기’ 같은 책들을 탐독했고, 그제야 이 도시가 고대에는 로마 제국의 중심으로, 중세에는 가톨릭의 심장으로 유럽 문명을 이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뒤늦게 로마에 심취했지만 이후 인연이 닿지 않았고, 결국 15년 만에야 다시 이곳을 찾았다.
로마에서의 첫 숙소는 테베레강 건너 주택가였던 데다가 밤늦게 도착한 탓에, 로마라는 도시에 왔다는 것이 전혀 실감 나지 않는다. 다음 날 아침 여전히 얼떨떨한 상태로 무작정 강가를 따라 걸었다. 그렇게 트라스테베레 지역에서 다리를 건너 로마 중심가로 넘어온 순간, 15년 전과 꼭 같은 모습의 로마가 있었다.
기원전으로 거슬러 가는 역사를 품은 도시에 고작 15년이 지나왔으면서 무엇이 바뀌어 있을 것이라 생각한 걸까. 콜로세움, 포로로마노, 판테온 같은 2,000년 전 고대 로마의 건축물들은 물론이고, 18세기에 지어져 비교적 신축(?)인 트레비분수도 바티칸도 그대로. 여전히 웅장한 건축물들 사이에서 바뀐 건 나 밖에 없었다. 15년 전 여름에는 신발 밑창이 닳도록 혼자 두 발로 돌아다녔다면, 이제는 파트너와 함께 라임(전기자전거)을 타고 도로를 누빈다는 점 정도.
사실 로마는 불편한 도시다. ‘도시 전체가 유적지’라는 말은 곧 지하철을 놓기에도, 개발을 하기에도 제약이 많은 도시라는 말이다. 에어컨이 팡팡 나올 것 같은 세련된 빌딩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고, 관광지들 사이 길은 한결같이 비좁고 (로마제국 시절의 도로를 그대로 쓰다 보니 그럴 수밖에), 오래된 식당들의 화장실은 다른 유럽 도시들과 비교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하지만 ‘역사’가 가장 큰 특징인 이 도시가 다른 도시와 같이 번쩍거려야 할 이유는 없다.
로마에서 일주일을 보낸 후, 나와 달리 로마 방문은 처음이었던 그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한국에서는 내가 속한 집단 속에서의 나, 넓혀 봤자 한국 사회 속의 나 정도를 인식하면서 살잖아. 그런데 수천 년 역사가 있는 곳들을 계속 다니다 보니 인간은 엄청나게 긴 역사의 일부일 뿐이고, 나라는 존재 역시 정말 얼마나 짧은 존재인지 생각하게 돼. 그렇다고 해서 인생이 부질없다는 느낌이 아니라 오히려 이 짧은 시간 동안 최대한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로마는 ‘역사의 흐름 속의 나’를 생각해 보기에 실로 적절한 곳이었다. 일상에서 여행모드로 전환하는 스위치를 채 누르지도 못한 채 바쁘게 짐을 싸 떠나온 우리에게, 매일 하루의 나를 생각하며 살기에도 바쁜 우리에게, 서울과 완전히 다른 전경의 이 도시는 어쩌면 여행을 시작하기 가장 좋은 곳이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에게만 긴 시간인 15년 동안 로마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므로, 첫 일주일 동안 우리는 로마에서 계획했고 기대했던 것들을 모두 보았다. 그리고 남은 일주일은 예상하지 못했던 로마를 발견하며 보냈다.
- 로마에서 ‘역사의 흐름 속의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곳
* 포로 로마노 (Foro Romano)
- “어떤 시기의 영광이든 영원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곳
- 로마 공화정 시기 정치, 종교, 문화의 중심지. 카이사르, 키케로와 같은 걸출한 정치인들이 토론을 펼치던 원로원을 포함하여, 이후 교회로 리모델링된 고대 로마 신전들의 잔해가 그대로 남아 있다. 얼마나 긴 역사를 품고 있는지, 각 유적별로 출입구를 설치한 높이가 다 다르다. 로마는 각 시기별로 지대 높이가 달라졌기 때문에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고대 로마 유적은 아래로 내려다보는 곳들에 있다.
- 로마의 고대 유적 중 가장 초라하지만, 가장 화려했고 가장 웅장했던 곳. 그래서 우리에게는 로마에서 가장 긴 여운을 남긴 곳이다.
* 콜로세움 (콜로세오, Colosseo)
- 고대 로마제국 최대의 공공 건축물. 제10대 황제인 티투스가 황제 통치 하에 시민의 관심을 효과적으로 돌리기 위한 수단으로 만든 검투사(글래디에이터) 대결을 하는 원형경기장
- 과거 외부가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로마제국 번영의 상징이었으나, 로마제국 말기 지진과 19세기 프랑스 나폴레옹의 로마점령 등을 거치며 외벽이 모두 손상되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그래도 원형 경기장의 일부에는 과거 화려한 장식을 가상으로 복원한 천을 덮어 원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 당연하게도 영화 ‘글래디에이터’을 보고 가면 좋다. 그리고 기왕이면 어떤 언어로든 가이드와 함께 설명을 들으면서 방문하기를 추천한다. 사람에 떠밀려 다니기 때문에 각오할 필요가 있다.
* 판테온 (Pantheon)
- 직역하면 ‘만신전’, 모든 신의 집이다. 로마의 다신교 시기에 모든 신들을 모시는 제단으로 건축된 뒤, 기독교 시기에는 예배당으로 쓰였고, 르네상스 이후부터 지금까지는 라파엘로 같은 거장이 묻힌 국립묘지처럼 사용되고 있다.
- 유현준 교수는 판테온을 ‘세계 최고의 건축물’로 꼽았다. 물론 그냥 봐도 아름답지만, 건축학적 구조를 이해하고 보면 감동이 배가된다. 위로 둥글게 쌓아 가장 많은 하중을 받아야 할 가운데 부분을 오히려 빈 구멍으로 두고 햇빛, 비, 공기를 통하게 한 2,000년 전 건축기술은 정말 경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