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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여행에 던져지다

by 김숲

동갑내기 변호사커플, 때로는 집 안까지 타인의 삶을 가지고 들어오는 우리가 오로지 우리를 위해 보낸 66일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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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일을, 타인의 권리를 대리하는 일을 하는 직업을 가진 우리 두 사람은 때로는 집 안까지 타인의 삶을 가지고 들어왔다. ‘법률자문이라는 명목으로 식탁에서, 차 안에서 때로는 침대에서도 각자의 사건이야기로 서로를 괴롭혔다. 혹시 평소에 우리의 이야기보다 타인의 이야기를 더 많이 한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 한 적도 있었지만 각자 밀려드는 사건들에 파묻혀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이대로는 안돼.”


동갑인 그와 사이좋게 서른다섯이 되던 해, 오로지 둘만을 위해 떠나기로 결심했다. 잠깐 모든 것을 멈추고 ’, ‘우리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 이 시간을 위해 나는 그동안 미뤄왔던 두 달의 안식월을 신청하고, 그는 퇴사를 하기로 했다.


2년의 연애, 2년의 결혼 기간 동안 대화의 주제가 이렇게까지 우리였던 적이 있었을까? 너무나 간절히 기다린, 언제 다시 갈 수 있을지 모르는 긴 여행이었기에 우리는 틈만 나면 이 여행이 각자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주제로 여행을 하고 싶은지, 여행이 끝난 뒤 어떤 것을 얻고 싶은지와 같은 대화를 나누며 자신을, 그리고 서로를 탐색했다.


긴 여행을 떠나자는 것에는 동의했지만, 어디서 어떤 여행을 할 것인지 정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십 대부터 지금까지 공부 또 공부로 쉼 없이 달려온 그는 모든 것을 비워내고 싶어 했고, 욕심 많은 나는 새로운 경험으로 최대한 많이 채우고 싶어 했다. 채우기 위해서는 일단 싹 비워야 했으므로 결국 목표하는 바가 그리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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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대화 끝에 우리 여행의 행선지는 유럽으로 정해졌다. 대학시절 짧은 방문동안 나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로마, 그리고 신혼여행지로 고려했으나 코로나로 인해 포기했던 베를린 이 두 도시를 고정으로 둔 채 다른 도시들을 살펴보았다.역사, 미술관, 책방, 카페, 자연 - 둘의 공통 관심사들을 마음에 담은 채 로마에서 베를린으로 가는 길목을 보니 금방 답이 나왔다. 로마 위 토스카나 지역, 그 위 피렌체, 그 위 빈 그리고 비로소 베를린이 우리의 최종 행선지가 되었다. 동선에 따라 정한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 고대(로마)에서 시작해 중세(피렌체), 근대() 그리고 현대(베를린)의 유럽 중심 도시들을 관통하는 심오한 여행이 된 셈이었다.


회사의 중요한 행사가 끝나는 날을 기준으로 안식월을 신청한 나는 출발 직전 주까지 행사준비와 사건 인수인계로 정신이 없었고, 퇴사와 여행 출발 간에 약 2주간의 시간을 두겠다고 호언장담했던 그 역시 담당했던 사건들을 마무리하느라 결국 출발 3일 전에서야 퇴사를 할 수 있었다. 향후 66일간 입을 옷, 필요한 생필품, 반드시 들고 가야 할 책들을 추리는 데 단 이틀의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되는대로 두 개의 캐리어에 짐을 챙겨 비행기에 탔고, 우리는 그렇게 비현실적으로 로마에 던져졌다. 여행 그 자체에 대해 그토록 거창하게 토론한 것치고는 당장의 하루하루에 대한 세심한 계획 없이, 주변 사람들이 일생일대의 기회라고 치켜주고 축하해 주는 여행은 이렇게 다소 갑작스럽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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