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대는 끌리는 대로
이번이 벌써 몇 번째 회사일까.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돌이켜 보면 난 언제나 ‘끌리는 대로’ 살아왔다.
대학 시절 나의 우상은 한비야. 전 세계 이곳저곳에서 구호활동하는 모습이 어찌나 멋져 보이던지. 나도 그녀처럼 이 단체 저 단체에서 활동했다. 하지만 엔지오 취업 문턱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그래도 공공기관에 합격했다. 나의 주요 업무는 외교부 초대로 방한한 외국인에게 한국을 소개하는 것. 전국 각지의 놀거리를 발굴하는 게 일이라니, 이보다 재밌을 수는 없었다. 여행 업계가 천직일 수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으니까.
다음에 연이 닿은 직장은 영국문화원. 이곳에서는 한국에 영국 예술가를 소개하는 업무를 맡았다. 터너상 수상자 제레미 델러의 강연을 진행한 날에는 퇴근하는 내내 온라인 후기를 읽었다. 재밌었다는 포스팅이 한가득이었다. 역시, 고생하길 잘했어.
언젠가부터는 나만의 국제교류를 기획하고 싶었다. 처음에 시도한 건 가이드 아르바이트.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까지, 날마다 다른 문화권을 만나는 재미가 쏠쏠했다. 서울에서 매일 세계를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인디 음악에 빠져 있었을 때는 말레이시아와 한국 뮤지션의 합동 공연도 기획했다. 어떤 뮤지션은 나와 베이징 투어에 다녀온 후 중국에 음원까지 유통했단다. 이래 봬도 나, 쓸만한 걸?
어느덧 삼십 대
여행지에서도 지도 없이 걷기를 좋아하는 나. 인생도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삼십 대가 되었다. 갈지자로 마구 흩어진 이력을 하나의 스토리로 엮어 보았다. 꽤 그럴싸했다. 그대로 글로벌 스타트업에 지원했다. 체험 상품이 도입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호스트 섭외는 물론이고, 멘토링부터 상품 기획까지 다 했다. 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 외국인에게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한국인을 이어준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매일 신명 나게 일했다. 일하면서 놀고, 놀다가도 일했던 시절이었다.
이 다음에는 어디로 가야 할까. 한 우물만 파는 모습이 멋지다고 말해준 사람도 있고, 이제 그만 정착하라고 한 사람도 있다. 모두 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또 한 번 새로운 선택을 시도했다. IT 서비스 회사로 이직한 것이다. 그동안 외국인에게 한국의 매력을 알렸다면, 이번에는 내수 시장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여행 업계에서 배운 기술은 하나도 적용할 수 없었다. 그래도 꿋꿋이 버텼다. 이대로 피해 버리면 내가 나약한 지 회사와 궁합이 안 맞는지 알 수 없으니까. 그렇게 4년이 흘러갔다.
나, 꽤나 끈기가 있었네
기분이 묘했다. 이렇게까지 근속한 건 처음이었지만, 이직을 거듭하며 경력을 쌓았던 시절보다 경쟁력이 없었다. 여행 업계로 돌아가기에는 큰 공백이 생겼고, IT 업계에서 이직하기에는 경력이 어중간했다. 나이는 먹을 대로 먹고, 그다지 열정도 없는데, 그렇다고 리더가 될 상은 아닌 후보자. 이 상태로라면 조만간 에이아이에게 대체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회사 밖에서 돈 벌 만한 무기도 없는데 어쩌지. 주변 선후배가 대학원도 가고, 자격증도 따고, 여기저기에서 모시는 인재로 성장하는 사이, 내 인생은 그대로였다. 왜 이렇게까지 꼬여 버렸을까.
나는 한 번도 목표를 정하고 거기에 맞춰 달려본 적이 없었다. 운동도, 공부도, 취미도, 시작과 그만두기를 반복했다. 꾸준히 해온 건 단 하나, 여행뿐이었다. 주변에서 나의 여행기는 재미있다고 했는데, 혹시 이것도 나의 강점이 될 수 있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내 인생에 여행이 가진 의미를 돌아보게 되었다.
여행은 나에게 단순한 여가 이상이다. 세상을 배우고, 나를 탐구하며, 삶의 방향을 정리하는 팁이다. 한 카페에서는 ‘공간이 생기면 어떻게 꾸밀까?, 한 사찰에서는 ‘‘백억이 생기면 어디에 써볼까?‘ 등등 길 위에서 수십 수백 개 질문을 마주한다.
때로는 영감을 만나기도 한다. 치앙마이에서 자유는 절대로 공짜가 아니라는 것을 배우고, 나만의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팁도 만났다. 안 되면 내일 또 하면 된다는 단순한 진리를 알려준 도시도 있었다.
어떤 여행에선 나를 발견했다. 미얀마에 다녀와서야 어린 시절 내 꿈이 그저 치기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제주에서 만난 에어비앤비 호스트 덕분에 나에게 잘 맞는 가이드 방식도 고민할 수 있었다.
때때로 여행은 마치 거울처럼 내 욕망을 비추어 준다. 디지털 노매드의 삶이 궁금했을 때는 치앙마이 현지에 사는 외국인을 만나러 갔고, 무역가가 되고 싶었을 때는 무작정 발리에 갔다. 여행 작가가 맞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내돈내산 해외여행도 떠났다.
그동안의 여행을 돌아보니, 이제야 선명하게 보였다. 여행할 때마다 매일의 감상을 에세이 스타일로 기록했던 나. 어쩌면 여행 작가가 내 운명이 아닐까? 내가 잘하는 것, 좋아하는 것, 지속 가능한 것이 여행이라면, 일단 걸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지극히 유난하고 사적인 여행‘ 브런치 북은
내 인생의 가장 긴 이력서이자
새로운 챕터를 향한 시작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