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에 부정적인 것은 없었다.
2020년 초 그분이 성지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해외 발 코로나19 바이러스 국내 첫 감염자에 대한 뉴스가 흘러나왔다. 나는 유럽 출장을 자주 다니는 그분이 걱정됐다. 당장 2월에 이스라엘 순례 일정이 잡혀 있어 그분에게 물었다.
“해외 다녀온 사람이 감염됐다는 거잖아? 뉴스에 나올 정도면 당신 2월 이스라엘 갈 수 있는 거야?
“괜찮을 거야. 감기 같은 거야. 나가는 데는 지장 없어. 무슨 일 있으면 이스라엘 관광청에서 말이 있을 거야.”
그때만 해도 그저 감기 바이러스 정도로 생각했다. 매사 그렇듯 별일 아니라며 그분은 긍정적 사고를 했고 여유로웠다.
우리의 생각과 달리 역시나 간단하게 넘어갈 사태는 아니었다. 유렵 현지 여행사 반응이 좋지 않았다. 2월에 잡혀 있던 성지순례 일정을 시작으로 모든 계약이 취소되고 말았다. 그분은 5월까지 기다려 보자고 나를 안심시켰다. 이미 매스컴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 얘기로 떠들썩했고 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불안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그분이 말한 5월은 금방 다가왔고 상황은 더욱더 나빠져 갔다. 비말로 전염되는 코로나19 감염 경로 차단을 위해 마스크 착용이 의무화 됐다. 체온측정은 어딜 가나 행해지는 통과 의례였다. 사람과 사람 간에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시행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코로나19 세계적 대유행 팬데믹 선언까지.
물리적인 상호작용이 차단되는 경험은 우리 정서에도 큰 영향을 줬다. 식당에서 각기 다른 메뉴를 시켜 나눠 먹는 행위는 금기시 됐다. 나 한입, 너 한입 오고 가는 한입 속에 싹트는 정은 마스크 너머로 숨었다.
업종별로 차이는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재난 상황에 너나 할 것 없이 힘든 시절을 맞아야 했다. 개방적 생활방식에서 폐쇄적 생활방식으로 바뀐 것에 대해 애, 어른 할 것 없이 힘들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폐쇄적 방식에서 유일하게 수시개방 되어야 하는 것이 있었다. 코로나19 검사를 위해 콧구멍은 수시 개방하여 내가 찌르던 남이 찌르던 해야 했다.
코로나19 확진자는 낙인이 찍혔다.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녔냐는 사회적 비난과 따가운 시선을 감내해야 했다. 환경의 변화는 낯설었고 앞으로 얼마나 더 이런 생활을 유지해야 할지 아무도 몰랐다.
그해 지자체에서 일자리 창출로 코로나19 체온체크 인력 채용이 있었다. 나의 빠른 행동력으로 가정주부에서 직장인이 되는 계기가 됐다. 그분은 여행업 말고 다른 일을 해본 경험이 없었다. ‘어, 어, 어.’ 하는 사이 1년 세월이 훌쩍 흘렀다.
뭐든 행동 옮기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그분을 보며 화가 치밀어 오를 때도 있었다. 가장으로서 오랜 시일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은 가족의 생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내심 생각만 하지 말고 대리운전이라도 해주길 바랐다. 나는 똥줄이 타들어 간다는 말이 뭔지 실감하고 있었다.
2021년 초 쿠팡 야간알바를 시작한다는 그분. 20년 넘게 여행업만 해오던 그분이 반백의 나이에 일용직으로 첫 야간출근을 했다. 아이들이 학교 가기 전인 이른 아침나절에야 그분은 천근만근인 몸을 끌고 끙끙대며 들어왔다. 낯선 업무에 야간근무로 밤낮까지 뒤바뀌어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집에 들어오기 무섭게 그분은 쓰러져 잠들었다. 그 시간 나는 출근을 했고 아이들은 학교에 갔다.
그분과 스치는 시간만 있을 뿐 마주하는 시간은 최소한으로 줄어갔다. 그분은 얼마간의 일용직 근무를 한 후 계약직으로 전환됐다. 내 친구는 쿠팡일이 무지 힘들다고 들었다며 그분의 의지가 대단하다고 추켜세웠다.
냉동 창고 일을 한 날에 그분은 한여름에도 손과 발이 시려 덜덜 떨었고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 덥고 잤다. 차가운 몸으로 집에 와 누워 있는 모습은 시체처럼 보였다. 유유자적 살아오던 그분은 온데간데없고 유배지로 끌려와 노역에 시달리는 생을 살고 있는 듯 보였다. 88kg이었던 그분의 몸무게는 73kg까지 빠졌다.
자신이 일하는 심야 조에서 PS사원(전산처리능력이 있고 실제 처리업무를 하는 사람)이 입는 노란 조끼를 가장 빨리 입었다며 해맑게 얘기하는 그분. 일이 힘들다고 유세 떨고 짜증 낼 법도 한데 한 번도 그런 내색을 한 적이 없었다. 집에 들어올 때마다 낑낑대며 기어들어 오는 한이 있더라도.
서로에 대한 미안함, 고마움, 안쓰러운 감정도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익숙함으로 대체 됐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기계적인 출퇴근과 가정 안에서 역할의 교대만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우린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의 역할에 최대한 충실했다.
우직하고 바른 성격 덕분에 그분은 2년의 계약직을 끝으로 정규직으로 전화됐고 캡틴으로 승진했다. 가장 고령에 정규직 전환이 되었다며 스스로 뿌듯해했고 내가 인정해 주길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대단하다.”라고 말했지만 뽕이 잔뜩 들어간 그분의 어깨를 보며 여행업을 잊은 건 아닌지, 쿠팡에 뼈를 묻을 참인지 의심됐다. 동료들과의 모임, 회식, 휴무일에 업무 관련 통화. 쿠팡에 대한 애사심까지 차고 넘치고 있었다. 왜 저렇게까지 진심인 거지.
정규직이 되기까지 그분은 무리한 다이어트를 한 사람처럼 얼굴에 주름이 늘었고, 관절은 낡아 삐거덕 댔다. 허리와 어깨는 구부정하게 굽은 채 어기적거리며 걸었고 저체온증상으로 사시사철 외투를 입었다. 미련 곰탱이 같은 사람이었다.
모든 일엔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었다. 시간이 걸릴 뿐 해결되지 않을 것도 없었다. 지난 3년의 세월은 우리 부부에게 다른 경험과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하도록 했다. 여러 사람과의 인연은 좁았던 생각의 폭을 확장시키는 기회였고 성장할 수 있는 계기였다. 그분과 난 또 다른 삶을 맛봤고 새로운 경험이 경력으로 바뀌는 시간이었다. 우리 삶에 부정적인 것은 없었다.
퇴사한 그분에게 바치는 꽃다발을 말없이 책상 위에 놓았다.
‘ 3년간 너무 고생 많았고 항상 열심히 애써줘서 고마워요.’
그분은 다시 순례객들과 유럽을 돌아다닌다. 몸무게는 80kg 중반대로 제자리를 찾았고 자다가 더워서 깰 정도로 체온도 돌아왔다. 무리한 운동은 절대 하지 않으며 즐겨하던 숨쉬기 운동만 유지하고 있다. 그분만의 느긋함을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