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라는 가면을 쓴 폭력의 굴레
최근 지인에게서 내겐 다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혹여나 지인이 알아볼까 싶어 다소 각색하자면, 소문으로 아이가 다니는 학교의 저학년이
동급생을 폭행했다는 이유로 지금 조사 중이라 충격적이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요즘엔 뉴스에서도 주변에서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걱정하는 지인에게는 아직 본인에게 일어나지 않은 일에 지레 걱정하지 말고
아이가 너무 불안해하지 않는 선에서 아이의 친구관계나 일상을 잘 관찰하면
그런 나쁜 일을 피해 갈 수 있을 거라고 다독여주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지인의 지인(이후 주변인이라고 칭하겠다)의 아이가
그 폭행으로 연루된 아이들과 어울릴 뻔했지만 그 주변인은 본인의 아이를 때려잡아
이런 사건엔 연루되지 않았다고, 다행이라고 전한 말이었다.
먼저 충격받은 것은 본인 스스로 아이를 때려잡았다는 말을 했다는 그 주변인이었다.
내가 여전히 챙겨보는 금쪽같은 내 새끼에서도 여전히 방송이라서 순화하거나 조심할 뿐,
아이를 때리는 부모가 나온다.
하지만 대부분은 쉬쉬하는 거 아닌가. 요즘 같은 시대에.
그 주변인이 "내 아이는 그 아이들의 느낌이 안 좋아서 미리 무리에서 빠져나와 다행이지 뭐야."정도로
말했다면, 정말 다행이다. 바르게 자란 아이들은 그런 불량한 무리를 알아보는 눈이 생긴다더라 하며
같이 동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들었을 땐 본인이 때려잡아 아이를 고친 것을 자랑스럽게 표현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본인의 아이를 때려잡은 것이 자랑할만한 것인가?
그리고 다음으로 충격받은 건 그 이야기를 전한 지인이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본인과 본인 아이의 이야기에
왜 그 때려잡아서 아이를 고쳤다는 주변인의 말이 필요한 것인가.
그건 본인도 여차하면 자기 아이를 때려잡겠다는 말로만 들려 여간해선 싫은 소리는 안 하려는 나는
그 이야기가 상당히 불편하다고 대꾸하였다.
그렇다. 나는 부모가 아이를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때리는 것이 매우 불편하다.
폭력에는 두 개의 대응책이 있다.
받아들이거나, 같이 폭력으로 되갚거나.
나는 물론 정당하지 않은 폭력에 그저 인간 샌드백이 되어 맞는 것 역시 싫다.
최소한의 나를 지킬 수 있는 정도의 방어는 해야 하는 것 같다.
그것이 정당방위이다.
하지만 그 정당방위도 대응이 지나치면 법적으로 처벌받게 되어있는데, 그 기준이 상당히 모호하다.
개개인마다 느끼는 폭력의 아픔은 타인이 보는 것과는 다른데
그걸 어떻게 '적절한 수준'에서 방어한다는 것인가.
그저 막는 것으로는 상대의 폭력이 그치지 않을 테니,
방어는 상대를 막을 정도로 강력해질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아동 폭력은 매우 큰 부작용을 낳는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아이는 부모에게서 태어나, 자라난다는 종속적인 관계의 존재이다.
또 대부분의 아이는 빨라도 청소년기가 될 때까지 부모보다 힘이 약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폭력을 행사하는 부모에게 아이는 한 가지 대응밖에 할 수 없다. 바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럼 부모의 폭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아이는 어떻게 될까?
여러 가지 방향이 있겠지만, 그중 최악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폭력의 되물림이다.
본인이 약해서 부모의 폭력을 받아들였다면,
반대로 본인보다 약한 상대에겐 본인이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부모에게서 배운 것과 똑같이.
인간의 폭력이 본능적으로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아이들의 행동은 정말 배운 것을 모방하면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 움직이는 것이기에
어딘가에서 '보고, 듣고, 배우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그 행동을 할 수 없다.
때문에 폭력을 저지르는 아이는 어딘가에서 폭력을 보고, 듣고, 배운 것이다.
이건 수년간의 금쪽이들을 보고, 또 내 아이를 키우며 내 아이와 주변 아이들을 키우고 확신할 수 있었다.
폭력은 극단적인 행위이기에 주변에서 듣기는 힘들어 좀 더 약한 욕설을 예로 들면,
TV 속 금쪽이들의 거친 언행은 부모나 주양육자와 똑 닮아있었다.
혹은 부모로부터 방치된 채로 온라인 매체를 통해 배운 것이었다.(이 경우는 유튜브와 같은 매체가 아이의 주양육자와 같을 정도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주변의 아이들도 동일했다.
나는 아이들이 크면서 그냥 욕설이나 거친 언행을 '저절로' 배우는 것인가 짐작했는데, 아니었다.
단적인 예로 우리 아이는 학령기 직전까지도 "이 녀석"이라는 단어가 가장 불쾌하고 나쁜 단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본인이 들어본 말 중에 억양이 세고 뭔가 나쁜 느낌의 단어가 '녀석' 정도였던 것이다.
우리 부부는 아이의 시청 연령을 넘는 TV 매체를 제한하고 있고,
가족 간의 대화에서 욕설은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반면에 또래 놀이가 막 활성화 되기 시작하는 6세 무렵부터 종종 나쁜 말을 하는 아이들을 보기도 했는데,
그 엄마의 말을 들어보면 대부분의 핑계가 "유튜브 보고 배웠나 봐요. 형/누나가 하는 말을 보고 배우네요."라고 했다.
나는 그저 듣고 배울 뿐인 아이의 죄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나쁜 말이 나오는 유튜브를 보게 놔두고,
형/누나가 가정 내에서 그런 말을 하게 두고 방치한 부모의 잘못이다.
그럼 다시 폭력으로 넘어가면, (언어폭력도 폭력이지만 오늘은 물리적 폭력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
실제로 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이 아니더라도 아이가 폭력적인 장면에 노출되면,
그 아이는 그 노출에 의해 폭력을 배울 수 있게 된다.
보는 것으로도 배울 수 있는데 그 폭력을 직접 경험하게 된다면 어떻겠는가.
아이는 받은 폭력 그대로 폭력을 학습하게 되는 것이다.
나 역시 어릴 적 폭력을 경험한 기억이 있다.
우리 부모님이 무자비하게 날 폭력했다는 것은 아니고, 이 역시 훈육을 위한 폭력이었다.
물론 99%는 폭력이라기보다 그저 매, 처벌이었다.
이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당시 부모님의 세대는 그러했고 교육 기관에서도 행해지는 방법이었다.
우리 집은 정해진 규칙을 지키지 않거나 무얼 하지 않았을 때 자로 손바닥을 맞았다.
사실 이건 나에게 그렇게 아픈 기억으로 남지는 않았다.
나 역시 어릴 때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이런 '매'는 정당하다고 배워서인지
그냥 맞기 싫으면 잘하자는 마음으로 넘겼을 뿐이다.
심지어 맷집이 늘어 엄마의 매에 비하면 학교에서의 '매'는 그리 아프지 않아,
선생님들의 처벌이 그리 무섭지 않았다.
다만 내가 무언가를 잘못하거나 안 해서 처벌받는 모습을 친구들에게 보이는 것이 싫어
단체로 혼날 때가 아니면 매를 맞지 않기 위한 노력은 했다.
그러나 딱 한번, 폭력으로 기억되는 경험이 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내가 하교시간보다 늦게 집에 들어간 것이었다.
어릴 적이라 얼마나 늦었는지 시간 가늠이 되지 않았지만,
난 그저 집에 가는 방향이 같은 단짝과 같이 돌아오기 위해
청소당번인 친구를 기다리다 출출해져 둘이서 문방구에서 떡꼬치를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엄마가 야구방망이를 들고 서있었다.
선명하진 않지만 고래고래 화난 엄마의 모습에 너무 무서워서,
친구집으로 달아났던 기억도 난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긴 해야 해서 다시 왔는데도 엄마는 여전히 화가 나있었고,
난 그 좁은 집에서 무서운 엄마를 피해 이리저리 도망 다니다 결국 그 야구방망이에 얼굴을 맞았다.
엄마는 엉덩이나 종아리를 때릴 생각이었겠지만,
스스로의 분노를 참지 못하고 휘두르던 방망이에 난 한쪽 눈이 시퍼렇게 멍들었다.
그다음 기억은 아픔보다는 수치심이었다.
나는 학교에 안대를 쓰고 갔고, 내가 피신까지 도왔던 그 친구는 날 안쓰러운 눈으로 보며
담임 선생님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표정이었는데
내 안대를 벗기며 공기가 통해야 멍이 빨리 사라진다고 하셨다.
물론 마구잡이에 의한 폭력이 아닌,
평소 시간과 다른 시간에 집에 돌아온 나를 전전긍긍 기다리다가 걱정이 화로 번져
본인의 화를 조절하지 못한 엄마의 거친 훈육이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이제 와서 엄마의 잘잘못을 따지는 건 아무 의미도 없기에 그건 제외하더라도,
나의 어릴 적 몇 없는 기억 속에 그 멍들었던 기억이 유독 아프게, 그리고 생생히 남아있다.
다행이랄까, 난 반면교사를 삼고 행하는데 특화되어 있었다.
특히 엄마의 행동 중에 본인의 화를 참지 못하던 행동들이 내게 지독히 나쁜 기억으로 남아서
나는 절대 아이를 때리지도 내 화를 전가하지도 않겠다고 결심했고,
때리지 않는 건 이제 당연하게 지키고 있지만 화를 참는 일은 종종 어려워서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난 진심으로 사과를 한다.
내가 부족해서 화가 터져 나왔지만, 이건 네 탓이 아니고 순전히 내 화 때문이라고.
부족한 엄마라서 미안하다고 아이에게 사과한다.
그리고 화의 조절에는 늘 생각하듯이 나의 컨디션 조절이 우선되어야 하기에,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려고 한다.
어릴 적 일과는 반대로,
바로 어제 나에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아이는 놀이터에 친구만 보이면 뛰어나가 해가 질 때까지 놀다 오는데,
놀이터의 위치가 집에서 보이기도 하고 아이의 자율성을 위해서 핸드폰을 쥐어주고는
혼자 놀다 올 수 있게 격려하고 있다.
다만 요즘 뉴스도 그렇고 걱정이 안 되는 것은 아니어서
수시로 창 밖의 놀이터 모습을 내다보거나,
아이가 우리 집에서 안 보이는 사각지대에 있을 때는 핸드폰의 위치추적 기능을 새로고침하고
또 그 안 보이는 시간이 20여분이 넘으면 전화로 안전 확인도 하고 있다.
그런데 해가 길어서 8시가 되도록 환히 보이던 여름과 달리
이제는 7시도 되기 전에 밖이 어두워지는 가을이 되었다.
창밖으로 아이를 내다보다 순식간에 하늘이 어두워진 것을 보고
위치를 확인해 보니 놀이터였고 아이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전화를 자꾸 받지도 않고 끊는 것이다.
한 번, 두 번, 세 번.
한 번은 실수로 끊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점점 더 전화는 빨리 끊겼고,
난 불안감이 엄습하여 아이를 찾아 나서려고 현관문을 열자,
아이가 바로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
왜 전화를 받지 않았냐고 하니, 집에 오는 길이라 굳이 받을 필요가 없어서 끊어버렸단다.
나는 우선 별 일 없이 아이가 돌아온 것에 안도했고,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해가 지기 전엔 무조건 집에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밖에서 실컷 엄마의 간섭 없이 놀 수 있는 자유를 누리려면,
이렇게 어두워지거나 네가 보이지 않을 때 걱정하는 엄마의 전화는 꼭 받아야 한다고 엄포도 놓았다.
그게 끝이었다. 내 마음은 순간 바닥까지 내리치긴 했지만,
매를 들 필요는 없었다.
폭력에 대한 노출에 대해선 생각지도 못한 면에서 내가 놀랐던 경험이 있다.
난 부부간의 싸움이나 만화, 드라마 등 그 어떤 폭력도 아이에겐 노출하지 않았다 자부하지만
아이가 어릴 적 생각지도 못한 폭력의 노출에 대한 아이의 반응을 보고 더욱 조심하게 된 일이 있다.
바로 아이가 4살 무렵 우리 집에 강아지를 키우게 되었는데,
그 아이가 워낙 활동적이고 1살까지 이갈이를 하느라 작은 입질을 하는 것이었다.
물론 본인의 인형 같은 걸 물고 뜯고 씹는 것은 상관없었는데,
아이의 인형이나 아이의 펄럭이는 옷자락을 씹고 구멍을 내서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고 강아지는 옆에서 눈치도 없이 계속 망가뜨리고 있는 걸 보면
혼내줘야지, 하고 강아지 궁둥이를 팡팡 때려주었다.
막 어마어마한 강도로 때린 것은 아니고,
나쁜 습관을 제대로 가르칠 마음에 "이놈! 그건 물면 안 돼!" 하는 낮은 목소리를 내며
한 두어 대 팡팡 쳐준 것이었다.
처음에는 제 물건을 망가뜨린 강아지가 벌을 받는 것 같아 만족하던 아이는
어느 순간 강아지가 혼나면 본인도 같이 기가 죽어버렸다.
특히 아빠의 낮고 굵은 목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아이는
똑같은 상황에서 아빠가 나와 똑같이 행동했을 때,
"우리 강아지 때리지 마.. 아파..." 하며 더 속상해했다.
강아지의 행동 교정보다 옆에서 맞는 강아지를 보며 마음 아파하는 아이를 보니 안 되겠다 싶어서,
열심히 훈련 교정 방법을 찾아보고 혼내는 게 아니라 칭찬 행동 강화로
강아지의 잘못된 습관을 교정해 주었다.
사실 이전까지는 그런 마음은 있었다.
아이 본인에게 해를 끼친 무언가에게는 폭력을 행사해서라도 되갚아주고 싶다는,
내 마음속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같은 방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강아지가 어릴 적 그렇게 말도 안 통하는 강아지 때문에 울고 속상해하면서도,
강아지가 맞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아 하던 아이를 보고 그 방식은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폭력은 옳지 않은 행동이기에,
특히 한창 세상 사는 법을 배워나가는 시기의 아이들에게는
문제가 생기면 폭력이 아닌 다양한 방식으로 해결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강아지는 우리 집만의 예이고, 모든 집에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은 '부부싸움'의 예가 있다.
부부가 살면서 물론 서로의 마음이 언제나 같을 수는 없기에
충돌하며 살아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 충동을 서로 욕설과 비난, 폭력으로 해결할 것인가
대화와 이해, 수용으로 해결할 것인가의 차이이다.
나는 폭력이 행해지던 어린 시절을 경험하면서, 확고한 생각이 들었다.
부부 싸움이 아이들 앞에서 욕설과 비난, 폭력으로 행해지는 부부라면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그냥 이혼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한다.
그 정도로 폭력의 노출은 아이들의 성장을 방해한다.
이전의 시대에서는 먹고살기에 바빴고,
육아에 무지했고, 또는 여러 명이 육아를 하며 한두 명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할 수 있는 사회였기에
지금의 잣대에서 볼 때의 어느 정도의 폭력도 용인되었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다.
많은 것이 변했고, '아이를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할 정도로 육아도 변했다.
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하면,
돌아오는 것은 부모가 늙고 힘이 없어진 때에 자식에게 폭력을 당하거나
혹은 아이는 부모 대신 자기 주위의 약자에게 폭력을 행할 것이다. 본인이 배워온 것처럼.
그런 아이를 키우고 싶지 않은 부모라면,
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하지도, 그 폭력을 자랑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