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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몇 번째 삶이세요? 저는 1864번째요

니체의 영원회귀, 그리고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제목만은 너무나 유명해서 다들 한 번쯤 들어보았을 테지만 실제로 읽은 사람은 거의 없는,

종이로 만든 벽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재밌는 소설을 기대하고 책장을 펴자마자 보이는 철학적 개념들에 대한 지루한 설명은 독자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유쾌한 네 남녀의 사랑 이야기일 거라 생각했는데, 곧바로 쏟아지는 영원회귀니 이데아니 하는 복잡한 용어들에 책을 덮고 싶어 진다. 


무시무시한 도입부와 반대로 사실 줄거리 자체는 단순하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충돌하는 1970년대의 냉전 시기, 소련의 침공으로 체코를 떠나 스위스에서 만나게 된 네 남녀, 외과의사에 화려한 여성편력을 가진 토마시, 그와의 진정한 사랑을 꿈꾸는 술집 종업원 테레자, 그리고 자유분방하며 어딘가에 얽매이는 것을 극혐 하는 사비나, 마지막으로 그녀를 사랑하게 된 학자 프란츠가 만나 서로를 매료시키고 밀어내며 갈등하는 이야기이다.

영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더 짧게는 “삶을 가볍게 살고자 하는 토마시와 사비나, 반대로 무겁게 살아야 한다고 믿는 테레자와 프란츠가 만나 겪는 허무와 권태에 대한 이야기”와 같이 요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줄거리 자체는 몹시 간단하지만, 작품 전반에 걸쳐 중요하게 차용되어 있는 '영원회귀'라는 개념이 어떤 메시지를 담은 철학인지 들어두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영원히 반복되는 삶’을 핵심으로 하는 이 사상을 이해한다면 영원히 반복되는 삶 속에서 그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토마시와 사비나, 혹은 반대로 앞으로 이어질 영원한 삶의 시작점에 서서 그 무거움을 감당하고자 하는 테레자와 프란츠의 심리를 명확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원회귀란 니체에 의해 제시된 사상으로 인간의 삶은 원의 형상으로 영원히 반복되기 때문에 인간은 그 삶의 모든 순간순간을 무한히 반복하게 될 운명이라는 주장이다. 내가 내일 옆집 미선이에게 고백하고 차인 뒤 이 삶이 끝난다면, 나는 다시 똑같이 형만이로 태어나, 똑같이 미선이에게 고백하고, 똑같이 차일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이 거지 같은 삶을 내가 바꿀 수도 없다는데 내가 계속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일까? 

니체는 분명히 있다고 말한다.


오직 현재에 충실한 자만이 운명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일견 극한으로 허무주의적인 사상처럼 느껴지지만, 그가 진정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우리 삶의 모든 한순간, 한 순간은 무한한 무게를 가진다’라는 점이다. 이런 주장은 곧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라"라는 윤리적 메시지로 확대된다.


영원회귀에 의해 똑같은 모습으로 영원히 반복될 사건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지는 전적으로 나의 ‘선택’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거지같이 살아왔다고 해서 앞으로의 모든 순간을 포기해 버리면, 나의 다른 모든 삶까지 엉망이 돼버리는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앞으로의 나의 삶을 긍정하면서, 열과 성을 내어 일궈나가야 한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다. 


다만 모두가 잘 알고 있듯, 삶의 방식에 정답 따위는 없다. 당연히 이 책에도 가볍게 혹은 무겁게 살아가고자 선택한 등장인물 중 어느 한쪽을 비난하려는 의도는 담겨 있지 않다. 가령, 테레자를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토마시가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쿤데라가 톨스토이를 선택한 의도를 정확히 알 수는 없겠지만,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을 통해 그 마음을 조금은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안나 카레니나>


톨스토이는 이 문장을 통해 우리가 가진 행복의 이상은 모두 유사하겠지만, 각자가 처한 불행한 현실이 우리 각각에게 서로 다른 고뇌를 안겨 준다고 교훈한다. 아마 쿤데라가 작품 속에 <안나 카레니나>를 등장시킨 이유는, 소설 속의 네 명의 남녀도 각자 서로 다른 불행과 고통을 겪을 뿐이지, 어느 하나가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만약 오늘의 현실이 그대를 고뇌하게 만들고 있다면, 그것은 내일을 더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함이지, 어제의 잘못을 덮으려 함이 아닐 것이다. 그대의 ‘오늘’을 응원한다.


Editor. 주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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