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anonymous
Apr 12. 2024
7. 레고랜드, 그리고 친정 부모님과의 점심
-왜 내가 미안해야 하지?
십 주년 결혼기념일이었다.
뭘 할까 하다가 애들의 행복이 우리의 행복이지 싶어 레고랜드 리조트를 예약했다. 이틀의 입장권이 포함된 1박 2일 리조트 숙박이었다.
우리가 사는 도시에서 춘천은 세 시간 남짓이어서 일박으로 보내고 오긴 아쉬웠다. 그렇지만 레고랜드 리조트에서 이박을 보내기엔 돈백이 우습게 깨지는 상황이라 나머지 일박은 근처에 아주 저렴하고 오래된 호텔을 예약했다.
드디어 레고랜드에 가는 길, 남편이 운전을 하며 가는데 어라, 친정이 있는 도시를 경유해 간다. 집에 올 때도 경유해서 올 수밖에 없는 루트이다. 자연스럽게 엄마, 아빠 생각이 났다. 그런데 뒷좌석에서 첫째가 말한다.
“어, 할머니 할아버지 집이다. 들렀다 가면 안 돼?”
그때가 9월이었으니, 엄마, 아빠 얼굴을 본 지도 좀 된 시점이었다. 두 분이 적적하게 계시던 터라 오는 길에 들러 점심식사라도 같이 하자고 하면 좋아하실 것 같았다. 사실 나도 엄마, 아빠가 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예정하고 온 것은 아니기에 일단 딸의 말에 “글쎄...” 하고 넘어갔다.
한 시간여를 더 달려 레고랜드에 도착했다.
역시 아이들은 레고랜드를 너무너무 좋아했다.
레고랜드 내 놀이기구 자체는 전부 개장이 아니어서 탈것이 모두 열려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빠와 함께 연신 힘을 써가며 소방차를 타고, 밧줄을 잡고 오르고, 레고 만들기 수업에 참여해 레고를 조립하며 즐거워했다. 리조트 역시 만족스러웠다. 예약을 할 때는 가격 때문에 망설여졌으나 막상 레고블록이 온천지에 깔려 있고, 커다란 미끄럼틀이 있는 실내놀이터와 작지만 바글바글한 수영장에서 알차게 놀고 나니 가격값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레고 수업을 들여보내고 둘이 방에서 좀 쉬고 나니 살 것 같았다.
쉬면서 남편에서 넌지시 물었다. 내일 다른 일정이 있는 게 아니면, 우리 집에 들러 엄마, 아빠와 밥을 먹는 게 어떻겠냐고. 남편은 선뜻 대답하지 않고 묵묵부답이다. 아마 내키지 않는 것이리라. 그런데 또 확실한 ‘노’도 아니어서 여지가 있는 듯 보였다.
다음 날 역시 하루 종일 레고랜드에서 하루를 보내고, 시내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숙소를 옮겨 짐을 풀었다. 신나게 놀고 배불리 먹은 아이들은 씻기고 눕히니 오 분이 안 되어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나는 남편에게 다시 확인차 물어보았다. “내일 점심 어떻게 할까? 자기 전에는 미리 말씀드려야 엄마, 아빠도 다른 일정 안 만들고 비워 두실텐데...” 남편은 내일 오전에 로봇박물관과 애니메이션 박물관이 가고 싶은 눈치였다. 그렇지만 네가 알아서 결정하라는 투였다. 아마 오전에 이 두 군데를 들르고 나면 부모님 집은 들르기 어려우리라. 점심이 어려우면 오후 늦게 넘어사 차 한잔을 하자고 해도 시내로 들어가면 30분이 더 걸린다는 둥 안 들를 핑계를 댈 것 같았다. 거기다 저녁 6시에는 가족사진 촬영을 예약해 둔 터라 서둘러 돌아가야만 했다. 춘천 일정이냐 부모님과의 점심이냐 선택해야 했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도 그럴수록 부모님이 더 간절히 보고 싶었다. 남편이 확실한 '노'를 하지 않았음을 핑계로 그럼 부모님을 보러 가겠다 얘기하고 아빠에게 전화를 했다. 예상대로 아빠는 너무 반가워하셨다. 요즘은 어디 식당이 스테이크와 파스타를 잘한다며 점심에 거기서 보자고 하셨다. 나는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때부터 남편은 매우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기분 좋은 가족여행에 웬 장인 장모님이라는..... 춘천은 집에서 멀어 일생에 다시 올까 말까인데(?) 굳이 나의 친정을 가려고 로봇박물관과 애니메이션 박물관을 포기해야 하냐고 했다. 입장 바꿔 생각해서(?) 우리가 경주여행을 갔는데 대구에 계신 왕할머니 할아버지(아버님의 부모님)를 뵈러 갑자기 들르자고 하면 좋겠냐고 했다. 내내 저기압인 채로 있다가 잠이 들더니 다음날에도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마치 내가 이렇게 큰 양보를 하니 너를 죄를 지었고 나한테 미안해해야 한다는 태도였다. 나는 기분이 나빴다. 물론 예정된 것은 아니지만, 레고랜드를 가려는 큰 목적은 달성했고, 남편이 다음날 일정에 대하여 꼭 가고 싶다고 피력한 것도 아니었으며, 집에 가는 길목에 떡하니 친정이 있는데 몇 달 만에 내가 우리 집도 들를 수 없다는 게 너무 속상했다. 춘천은 친정집에서 멀지 않아 조금만 시간을 내면 명절에도 충분히 들를 수 있는 거리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시부모님과 심지어 같은 아파트에 살고 매일 아침, 저녁으로 보는데, 자기는 우리 부모님과 명절을 합쳐 일 년에 서너 번 볼까 말까 한 상황에서, 근처 지나는 길에 점심을 한번 같이 먹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씩 시작된 말다툼은 어느새 큰 싸움이 되었다. 운전대를 잡은 그의 발이 엑셀을 마구 밟아댔다. 목소리도 높아졌다. 뒤에서 아이들이 그만 싸우라고 하다 포기한 듯 잠잠해졌다. 그는 악다구니를 썼다. 왜 내게 미안해하지 않냐면서. 당연히 미안해야 한다면서. 너의 태도가 잘못되었다면서.
식당 앞에 도착해서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씩씩대다 차에서 내려 식당 반대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식당에는 이미 엄마, 아빠가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우리보다 일찍 와서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엄마 아빠를 기다리게 할 수가 없어서 남편이 없이 아이들과 식당에 들어갔다. ㅇ서방은 어디 갔냐는 말에 잠시 뭘 좀 사러 갔다고 둘러댔다. 그러나 아마 부모님은 알고 계셨을 것이다. 나의 붉어진 눈시울과 떨리는 목소리에서.
금방 올 것 같았던 남편은 20분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전화를 했는데 전화기가 꺼져있었다. 잠시 후 전화가 와서 밖에 나가 받았다. 부모님과 아이들은 이미 시킨 음식을 먹고 있었다. 남편은 기분이 너무 나빠서 식사를 같이 할 수가 없으니 자기는 먼저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간다며, 나보고 아이들과 차를 타고 집으로 오라고 했다. 기가 막혔다. 저녁에 가족사진 촬영이 예약되어 있었고, 당일 취소가 안 되었다. 이 인간은 도대체 나를, 우리 부모님을 뭘로 보는 걸까. 도대체 뭐가 그리 그를 화나게 한 걸까. 우리 엄마 아빠와 밥 먹고 싶은 내 마음이 그를 그렇게도 화나게 한 걸까 아님 진작에 그의 의중을 살펴 내가 우리 엄마, 아빠 얼굴 보는 걸 포기하고 로봇박물관과 애니메이션 박물관을 먼저 가자고 하지 않아서 본인이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아서일까.
“너 정말 어리구나, 생각보다.”
나도 절대 좋은 소리가 나가지 않았다. 이건 경우가 아니니 일단 와서 밥을 먹으라고 했다. 그는 30분이 넘어서야 식당으로 다시 돌아왔고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본인이 계산을 했다. 아이들도 입맛이 없는지 음식이 많이 남아서 대부분 싸가야 했다.
그날 저녁 가족촬영은 숨이 막혔다. 그렇지만 아이들을 위해 최대한 티를 내지 않고 준비한 옷을 입혀 촬영을 했다. 내가 그렇게 찍어주고 싶었던 남매 사진과 아이들의 개인별 주니어 사진도 찍었다. 다행히 아이들이 너무나 잘해주어 짧은 시간 안에 예쁜 사진들을 많이 건질 수 있었다.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집에 오니 10시가 넘어있었다.
그렇게 시끄러웠던 결혼 십 주년 여행이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