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포근한 품 같다!
어머니는 올해 아흔이시다. 아버지가 15년 전에 돌아가시고 고향 시골 마을 넓은 종갓집에서 홀로 지내고 계신다. 어머니의 유일한 아들인 나는 그 적적함과 외로움을 헤아려 본 적이 많지 않다. 늘 건강한 척, 즐거운 척, 괜찮은 척하시는 걸 때론 알면서도 때론 진짜 몰라서 그냥 지나쳐온 세월이다,
시골은 저녁 7시만 되면 칠흑 같은 암흑이다. 젊은이들이 모두 도시로 떠난 요즘 시골 마을의 적막함은 소름이 돋을 정도다. 동네 어귀를 애처롭게 비추는 가로등 한 개와 이따금 울어대는 도둑고양이마저 없다면 동네는 마치 ‘산 자들의 묘지’ 같다.
전기를 아끼겠다고 집안의 모든 불을 끄고, TV 브라운관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에 기대 그 긴 밤을 보내시는 어머니. 가끔 시골집에 내려갈 때면 온 집안의 불을 다 켜놓으며, 제발 밝게 지내시라고 핀잔한다. 하지만 어머니의 밤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어두컴컴할 게 분명하다.
그 연배 시골에 사시는 어머니들의 삶이 대부분 그렇듯 나의 어머니도 자식, 특히 아들에 대한 조건 없는 희생과 사랑이 본인 인생의 전부다. 지금도 50이 넘은 아들에게 한 푼 두 푼 모은 돈을 용돈으로 건네시고, 끼니를 챙기고, 건강을 걱정하신다. 나도 자식을 키우는 부모이지만, 때론 그 넘치는 애정이 부담스러울 때도 많다.
서울의 부잣집 막내딸이었던 어머니가 충청도, 그것도 청양의 두메산골로 시집온 게 열아홉 살.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이모의 소개로 아버지를 만나 떠밀리듯 결혼하셨다고 한다. 꿈 많고 예뻤던 열아홉 살 처녀에게 산골 생활은 어느 것 하나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의 대학 졸업만을 기다리며 견뎌 냈지만, 도시에 나가 살자던 아버지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종갓집 큰아들이었던 아버지는 대대로 물려받은 땅이 많아 말 그대로 시골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하지만 결혼은 현실. 층층시하 시댁 어른들을 모시고 살아야 했던 열아홉 도시 처녀에게는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고 한다. 근동에서는 호랑이로 통했던 할머니는 어머니를 잠시도 편하게 놔두시지 않았다. 할머니가 어머니를 심하게 구박하던 광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초등학생이었던 나의 눈에 할머니는 엄마를 괴롭히는 나쁜 사람이었다. 나에 대한 사랑만큼은 각별하셨는데, 그 때문인지 할머니는 너무 아련하기만 하다.
어머니는 당시 그 시골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엘리트였다. 서울에서도 명문이었던 여자 고등학교까지 마치셨으니 말이다. 대외활동도 많이 하셨다. 청와대와 초청받아 영부인과 나란히 사진을 찍을 정도였다. 그게 할머니에게는 눈엣가시처럼 거슬렸고, 매일 집안에 큰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고 싶은 어머니, 이해 못 하시는 할머니, 어느 편에도 설 수 없는 나약한 아버지! 이 세분의 애증은 날이 갈수록 격해졌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해자였으며, 피해자로 깊은 상처만 남겼다. 그렇게 나와 누나들과 여동생은 행복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서로를 향해 퍼붓던 그 파괴적 애증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고 나의 트라우마가 됐다.
아마도 지금 어머니의 외로움을 애써 외면하고, 살갑지 않은 게 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할머니는 10년 넘게 병석에 누워 계셨고, 어머니가 오십이 넘어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런 와중에 아버지가 알코올성 치매에 걸리시면서, 어머니의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더 고달프고 팍팍해졌다. 우리 형제들은 모두 어렸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늘 뭔가에 쫓기도 급한 성격으로 바뀌셨고 밖으로 나가는 일도 거의 없었다. 네 명이나 되는 자식들에, 종갓집 큰살림에, 농사일까지 모두 다 어머니의 몫이 되었다. 그때 난 중학생이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20여 년을 완벽하게 혼자서 우리를 키워내셨다. 그 힘든 시절을 여자의 몸으로 어떻게 버텨내셨는지 나는 모른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대학에 가서도, 사회에 나와서도 마음으로도 행동으로도 돕지 않았다. 항상 부족한 사랑을 얘기했고, 무언가를 채워달라고 보채기만 했다. 내 상처가 더 아팠고, 더 힘들다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심정은 어땠을까? 자식을 키워보니 조금은 알 것도 같지만 다 가늠은 되지 않는다.
살갑지도 않고, 기쁨도 드리지 못하는, 그런 아들로 30년을 살았다.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한 집안의 가장이 되어서도, 중학생에 머물러 있다. 참 어른이 되지 못했는데, 어머니는 그사이 아흔이 되셨다. 허리가 많이 굽으셨고, 너무나 고왔던 얼굴에는 깊게 파인 주름만이 남았다. 서울에서 시집온 세련된 열아홉 도시 새댁은 낡고 빛바랜 결혼사진 속에서만 존재한다.
요즘 어머니의 일과는 너무나 단순하다. 아침을 드시고, 마을회관에 가서 저녁까지 드시고 집에 오면 오후 6시. 그때부터 어머니의 어두운 밤은 시작된다. 내 자식들이 성년이 되면서 돌아보게 됐다. 어머니의 삶을! 이제는 자주 내려가서 어머니와 밤을 함께 보내고, 이야기를 나누고 이해하며, 더불어 나를 성장시키고 있다.
어머니의 외출은 그 낯설고 험한 시절을 버티게 해 준 유일한 탈출구였다는 걸 이젠 안다. 할머니도, 아버지도, 자식들까지 극구 말렸지만 어머니에겐 분명 다른 선택지가가 없었을 것이다.
작년에서야 겨우 어머니의 성숙한 아들로 살아가기 시작한 나. 내려갈 때마다 뭐라도 하나 더 손에 들려 보내려고 애쓰시는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뿌듯하다. 평생을 괴롭히는 깊은 상처를 안겨준 어머니라 생각했는데, 다리가 불편해 절뚝거리며 챙기시는 모습이 이젠 뼛속 깊이 박힌다. 굳이 말리지도, 마다하지도 않고 꼭꼭 챙겨 온다. 그 사랑이 50대 참 어른으로 나를 키워간다.
작년 여름, 잠시 내려갔는데 어머니가 얕은 이불 한 세트를 살며시 꺼내 놓으셨다. 마을회관에 장사치가 들어왔는데 너무 곱고 편해 보여 사셨다고 한다. 예전 같으면 격하게 핀잔했을 일이다. 처음 받아보는 이불 선물에 처음으로 어머니 앞에서 단비에 망울을 터트린 꽃잎처럼 환하게 웃었다. 기쁘신지 따라 웃으셨다. 이렇게 쉬운걸.
나뭇잎이 그려진 알록달록한 이불과 침대 커버, 그리고 베개 닢이 한 세트다. 아내는 보자마자 촌스러운 걸 돈 아깝게 왜 사는지 모르겠다고 핀잔했다. 그 핀잔도 어머니의 사랑 앞에선 무용지물이다. 그해 여름과 가을, 겨울, 그리고 올해 봄과 지금까지 계속 그 이불을 덮고 있다. 얇은 여름 이불이지만 가을에도, 겨울에도 이상하게 따뜻하고 포근하기만 하다. 요즘 같은 삼복더위에 덮어도 신기하게 단잠을 잔다. 여름 낮잠에는 나무늘보가 된다.
얼마 전 아주 오랜만에 지방 출장을 가서 알았다. 이제 어머니의 이불이 없으면 잠자리가 편치 않다는 걸. 좋아하는 술보다 더 지독한 중독이다. 오늘도 어머니의 사랑을 덮고 잔다.
너무 포근한 엄마 품 같다,
나에겐 꽃이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