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 이벤트
독자분께서는 학창 시절에 유쾌한 추억이 있으신지요? 친구들 사이의 일탈행위가 아니면 학교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에서 얻어진 유쾌한 추억은 거의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수학여행 정도가 유쾌한 추억이려나? 지각하여 기합을 받거나 자율학습을 도망쳐 선생님께 벌 받던 추억이 많지 않을까 싶네요. 생각해 보면 학교라는 곳이 내가 원하여 간 곳도 아니니 뭐 그리 유쾌한 기관일까만은, 그래도 소소한 이벤트가 있으면 하루하루가 덜 지루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뭐… 한결같은 친구가 듬직하기는 하지만 약간 지루하고 심심한 것에 비유할 수 있으려나! 아무튼 학교의 기본 모드는 도를 닦는 수련기관 같은 것이겠지만, 가끔은 의외성이 있는 상황도 나쁘지 않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퇴직하고 유치원 학생들이 야외활동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니, 고 녀석들 무지무지 시끄럽더군요! 무슨 말이 그리 많은지 잠시도 쉬지 않고 질문을 쏟아내어 인솔 선생님이 힘들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생이 되면 거의 말이 없습니다. 잘 웃지도 않고요. 아마 가정에서도 그러겠지요. 뭐… 고등학생이 되면 자신이 희로애락을 다 알아버려서 그렇다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후 긴 시간을 살아본 우리네 생각으로는 건방진 생각임이 분명하지요! 암튼… 묵묵하게 공부하는 학생들의 얼굴에 웃음을 띄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다고 머리가 하얀 제가 댄스(실제로 코로나 시기의 졸업식에서 거북이의 빙고를 배경음악으로 댄스반 학생들과 함께 축하공연을 할까 생각하고 혼자서 미리 연습을 해보았는데, 저는 도저히 못하겠더군요!)를 할 수는 없으니 이런저런 이벤트를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자질구레한 것들을 다 소개할 수 없으니, 여기서는 「팔당라이딩」과 「하늘정원축제」를 소개합니다.
「팔당라이딩」은 중간고사가 끝난 다음 날, 대절 버스로 팔당에 가서 자전거를 임대하여 3시간 정도 자전거도로에서 라이딩을 하고 점심도 먹는 이벤트입니다. 저는 20년 정도 자전거를 타고 있는데, 어느 봄날에 팔당 자전거도로를 달리는데 학생들과 함께 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얼굴에 부딪히는 바람과 막 꽃을 피우는 유채꽃 향기가 너무 좋았습니다. 중간고사 이후 며칠간은 성적 확인도 하고 약간의 휴식이 필요하여 학습 진도를 나가지 않으니, 하루 정도 수업을 빠지더라도 큰 부담은 없는 시기이지요. 학생들에게 자전거를 타는 동안에는 휴대폰도 못 보게 하고 친구와의 대화도 금지합니다. 그냥 얼굴을 스치는 바람을 느끼고, 한강을 보고, 유채꽃 향기를 맡아보라고 합니다. 첫해에는 참여 희망자가 적습니다. 한번 다녀온 학생들이 소문을 내니 다음 해부터는 참가희망자가 넘쳐서 무언가 업적(예: 자율학습참여)이 있거나 교육적 수요(예: 요상담학생)가 있는 학생에게 참여 우선권을 줍니다. 위 사진은 팔당역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한 것입니다.
교감 교장을 하면서 팔당라이딩을 10번 실시했습니다. 간단한 액티비티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안전사고에 대한 부담으로 정년을 앞두고는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저 자신에게 쪽팔리는 것 같아 계속 실시했습니다. 맨 처음 남학교 교감으로 있으면서 팔당라이딩을 할 때가 기억나네요. 그때는 흡연이나 폭력으로 징계를 받은 학생들을 인솔하고 갔는데, 그 녀석들은 살벌하게 달리더군요. 왜 그렇게 말을 안 듣고 달리나 살펴봤더니, 미리 앞에 가서 담배를 한 대 피우려고 그러더군요. ㅠㅠㅠ... 저를 추월하여 몇 미터 앞에 가던 학생을 소리 질러 제지했더니, 앞브레이크를 급히 잡아 그대로 공중제비를 돌았습니다(달리는 자전거에서 앞브레이크를 급히 잡으면 자전거가 뒤집힙니다.). 지금도 그 모습이 슬로비디오로 기억이 납니다.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생각 중 하나는 ‘아… 나의 경력이 여기서 끝나는구나.’였습니다. 다행히 그 학생이 벌떡 일어나서 저도 경력을 이어갔습니다! 그 뒤로는 교육적 수요보다는 자발적 희망자를 중심으로 팔당라이딩을 실시했습니다. 저도 몸을 좀 사려야죠! 아래는 라이딩에 참여한 학생의 소감문입니다.
「하늘정원축제」도 중간고사 이후 1주일간 옥상정원에서 실시하는 이벤트입니다. 중간고사 이후에 이런 이벤트를 하는 것은 아무래도 시험 이후 정신적으로 편안한 시기에 이벤트를 해야 학생들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공모교장으로 부임하여 학교를 둘러보니 사용하지 않는 공간이 의외로 여럿 있더군요. 그중 하나가 옥상인데, 옥상에는 그늘막과 화단이 조성되어 있고, 화단에는 나무와 풀도 가꾸어져 있는데 문을 잠가두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학교가 학생들이 위험한 짓을 할까 봐 옥상을 개방하지 않는데, 제 임기 중에는 일과 중 옥상 개방을 했습니다. 어느 늦가을에 관리기사님께 얘기하여 옥상 화단에 유채꽃 씨를 뿌려두도록 했습니다. 다음 해 3월 중순쯤 하늘정원축제 계획을 공표하고, 축제를 기획할 팀을 공모로 뽑았습니다. 중간고사는 4월 중순쯤 있으니, 미리 기획팀을 뽑아 계획을 수립해야 중간고사 후 곧바로 축제를 실시할 수 있거든요. 아래는 하늘정원축제 안내 포스터입니다. 당시 생활지도부장이 열성적이고 창의적인 분이었는데, 부서의 젊은 선생님들이 이런 포스터를 어렵지 않게 만들더군요.
하늘공원축제를 구상한 이유 중에는 한류를 보며 본교에서도 문화예술 분야 기획자로서 관심과 재능이 있는 학생이 있을 수 있는데, 그런 학생에게도 자신의 아이디어와 열정을 구현해 볼 기회가 주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제 글의 15화까지의 내용을 보신 분은 알겠지만, 제가 실시한 프로그램 대부분은 학업 또는 인성과 관련한 활동이지 흔히 말하는 신명과 끼와 관련한 프로그램은 없습니다. 저에게는 어색하고 낯선 영역이지만, 인생을 풍요롭고 즐겁게 하는 것은 의지적이고 지적인 활동보다도 흥과 멋이라는 것을 저는 인정합니다. 옥상의 하늘정원에 봄에는 유채꽃을 가을에는 코스모스를 심어 축제분위기를 띄웠는데, 횟수가 거듭될수록 기획과 운영을 담당하는 학생들의 역량도 커지고 참여하는 학생들도 많아지고 즐기는 것 같더군요. 아마도 중간고사 이후 점심시간에 옥상에서 열리는 하늘정원축제에 참여한 추억이 학생들에게는 졸업 이후에도 오래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래는 하늘정원축제에 기획단으로 참여한 학생이 제출한 축제 소감문입니다.
학교에만 있었던 제가 학교와 사회의 연결 영역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은 아주 조심스럽습니다. 뭐… 그래도 이런 글을 쓰는 이유 중에는 그런 조심스러움을 깨고자 하는 욕망도 있겠지요. 고등학교 교원으로서, 긴 시계열 측면에서 다수의 우수한 학생들이 진출하는 분야와 국가사회 발전이 상당한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80학번인데, 70년대는 화공 섬유 계열 학과에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몰렸다고 들었습니다. 이 학생들이 이후 석유화학과 섬유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희 때부터는 전자계열 학과에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진학했습니다. 제 고등학교 동기들을 살펴보더라도 이들이 우리나라의 전자산업의 전성기를 이끌었다는 판단을 합니다. 90년대부터 똑똑한 학생들이 신문방송 콘텐츠계열 학과에 진학하는 경우가 늘더군요. 저는 약간 의아하여 생각하여 그런 학생들을 말리곤 했습니다. 나중에 한류가 세계적으로 알려지는 것을 보고는 제 안목의 한계를 깨달았습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의학계열과 법학 계열은 우수학생이 여전히 선호하는 계열이고요.
다른 이야기지만, 저는 우리나라 의료산업이 외국에 대하여 개방하고 국내병원에서는 외국인 환자를 적극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의학 분야에 대한 이해로부터의 판단은 아니지만, 수십 년간 최우수 학생이 몰린 의학 분야는 외국의 의학 분야에 대하여 경쟁력이 있을 것이라는 소박한 논리를 바탕으로 한 주장입니다. 의학처럼 최우수 학생이 몰려든 업종이 국제적인 경쟁의 장으로 나아가 국부를 창출하지 않는다는 것은 국가전략 차원에서도 이해하기 힘듭니다. 자연계열 출신인 저의 편견임을 인정하더라도, 법학 계열에 몰린 우수한 인재들은 법학의 특성상 국제적인 경쟁력과 국부를 산출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어, 이 분야는 다른 분야보다 국부창출이라는 측면에서는 존중받기 힘들다고 감히 주장합니다. 좀 편협한 판단이지요?
저는 교육을 사회적 경제적 발전의 수단이나 도구로 사용하자는 논리에 대하여 반대합니다. 일단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어떤 것의 수단으로 삼는다는 것에 대한 반감이 있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입니다. 논리적으로 따져봐도 국가사회 발전을 위해 교육을 수단으로 쓴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사회 발전의 내용을 무엇으로 정하느냐와 누가 어떻게 정하느냐와 그리고 설령 그것이 정해져 있다 하더라도 자라나는 아동에게 그 목적을 위해 교육을 받으라 하는 것이 타당한 것일까요? 교육은 인간의 ‘성장하려는 욕구’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학생 스스로의 선택과 책임을 중심으로 하여 추진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가치중립적이지 않은 내용에 대한 교육은 국가사회가 묵시적으로 합의한 가치를 바탕으로 조심스럽게 이루어져야 하고, 그 방법 또한 학생의 선택에 대한 존중을 기본으로 하여 실시되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