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자기주도학습도전단
공교육 기관인 학교에 근무하는 사람은 사교육에 대하여 여러 고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언론에서 제기되는 사교육비 문제에 대하여 응답해야 한다는 의무의 측면도 있고, 학교 현장에서 관찰되는 사교육에 길들여진 학생들의 학습은 물론 삶의 태도에 대한 걱정도 있습니다.
6년여의 장학사 근무를 마치고 학교에 돌아와 교감으로서 살펴본 학생들의 생활은 제가 기대한 모습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의 학습경험을 주된 지적성장의 장으로 여기지 않았고, 학교 구성원들도 이런 현상에 대하여 별다른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몇몇 학생들과 얘기해 보면 사교육을 많이 받는 학생일수록 스스로 계획하고 능동적으로 지식을 쌓아가는 자기주도적학습에 대하여 소홀히 한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자기주도학습도전단」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처음 생각한 활동명은 ‘자기주도학습결사대’라는 것이었는데, 이름이 너무 쎄다는 주위의 조언을 받아들여 자기주도학습도전단으로 네이밍을 했습니다. 그래도 학생들에게 활동을 설명할 때는 자기주도학습결사대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 또한 얼굴이 붉어지는 기억이지만 자기주도학습도전단에 진심이었다는 정도로 이해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활동은 크게 두 방향으로 전개하려 했습니다. 하나는 학생들이 방과후에 좀 더 학교에 머물면서 자율학습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고, 둘은 학생들의 학습 자체의 질을 높이도록 돕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떤 프로그램이든 그것이 활성화되고 지속화되기 위해서는 프로그램에 충성적인 일단의 사람들이 필수적인 요건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특히 잘되지 않거나 새롭게 시작하는 프로그램이라면 활동에 열성적인 사람들이 꼭 필요하다는 판단입니다. 방과후 자율학습을 모든 학생들에게 요구하고 설득하기보다는 자율학습의 필요성에 호응하는 학생 그룹을 우선 조직하여 이 학생들이 이루어내는 성취가 나머지 학생들에게 알려지게 함으로써 학교 전체의 자율학습을 활성화시키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제가 이런 전략을 생각하게 된 것은 어릴 적 시골에서의 놀이 경험 때문입니다. 시골에서는 봄이 되면 논둑에 불을 놓아 해충을 없애는 놀이를 하곤 했습니다. 볏짚에 불을 붙여 논둑을 쓸고 다니면 볏짚의 불똥이 논둑에 떨어지면서 논둑 전체에 불이 붙곤 했습니다. 그런데 봄비가 내려 논둑이 눅눅해져 있으면 불똥이 모두 꺼져 버리더군요. 이런 경우라면 볏짚을 한 군데 모아놓고 불을 붙여서 거기서 나온 열기가 차츰 주위 논둑을 말려가면서 논둑을 태울 수 있도록 하곤 했습니다.
운영 측면에서도 자율학습의 매력을 높이려는 방안이 필요합니다. 학교에서의 자율학습이 스터디카페에서의 자율학습보다 더 매력적일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고민했습니다. 자율학습을 하면서 도서관에서의 독서와 체육관에서의 운동을 연계하여 이용하도록 안배했습니다. 자율학습을 하다가 지루해지면 도서관에 내려가 독서를 할 수 있도록 도서관을 상시 개방하고, 몸이 근질근질한 학생들은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할 수 있도록 체육관도 상시 개방하고 운동기구들도 구비해 놓았습니다. 이 정도면 이상적인 학교 모습이지 않나요!
약간의 반대도 있더군요. 감독자가 없는 도서관과 체육관 개방으로 발생할 수도 있는 안전사고에 대한 책임을 걱정하는 분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까짓 껏 학교장이 책임을 진다고 선언하고 계속 진행했습니다. 혹시 책임선언을 믿지 못하는 분이 있을지 몰라 메시지로 학교장 책임선언을 내부망으로 보냈으니 불안한 분은 메시지를 저장하여 증거로 저장해 두었으리라 생각합니다(원래 공조직에서는 이렇게 하는 겁니다!).
학부모 반대도 일부 있었습니다. 이상적으로는 공부하다 지치면 독서도 하고 운동도 하는 것이지만, 현실의 모습은 공부를 하는 학생은 공부만 하고 운동을 하는 학생은 운동만 합니다! 아들이 방과 후에 학교체육관에서 운동만 하니 방과 후에 체육관을 폐쇄해 달라는 민원 전화가 오더군요. 저는 실제 이런 내용의 민원에 대하여 공감합니다. 저도 애들을 키워봤으니까요! 부모님의 마음은 운동할 시간조차 공부하여 성적이 더 올랐으면 하는 바람으로 전화를 했겠지요. 민원 학부모를 잘 위로하고 체육관에 가서 운동하는 남학생들에게 민원 내용을 얘기하고 공부도 하면서 운동을 하라고 설득하면 학생들은 자기 어머니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쩝! 제가 의도치 않게 모자관계를 상처내 버리고 말았네요!
자율학습에 성실하게 참여한 학생에 대한 인센티브도 필요합니다. 1년간 학기 중에는 주당 20시간, 방학 중에는 주당 30시간 이상 자율학습에 참여한 학생들에게는 아래와 같은 내용을 생기부에 기재해 줍니다. 물론 제가 자율학습 기록지를 직접 관리하고 생기부 평가내용도 직접 작성합니다. 좀 바쁘기는 하지만 나이 들어 심심한데 삶에 활기도 생기고 바쁜 선생님들 노고도 덜어준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자기주도학습도전단(2023.03.06.(월)-2023.12.28.(목)에 참여하여 주당 20시간(방학중에는 30시간) 이상 자율학습실에서 공부하며 스스로 학습계획을 수립하고 실천하는 태도를 함양함. 이 활동을 통해 사교육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자기주도적 학습을 생활화하는 계기를 마련함.
자기주도학습 지원을 위한 학교의 역할 중 다른 하나는 학습의 질을 높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비슷한 시간과 비슷한 정성을 들인 학생 간에도 학습 수준에 많은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저는 학습에서 비슷한 투입에도 불구하고 결과에 큰 차이가 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공부에 있어서는 투입하는 양과 질의 차이가 결과의 차이를 만드는 거라는 판단으로, 제가 학생일 때는 저 자신을 다그치고, 교사일 때는 학생들을 다그치곤 했습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사람에게는 외모나 신체능력에 개인차가 있는 것처럼 지적능력에도 개인차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개인차를 인정하고 개별 학생의 학습의 질을 높여주는 것이 교사와 학교의 주요 역할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개별 학생의 학습을 돕는 방안으로 학습진단, 학습클리닉, 학습돌봄의 개념을 생각합니다. 학생 개인의 현 학습 상황과 학습에서의 애로를 파악하는 학습진단, 진단된 학습 애로를 개선하고 교정함은 물론 학습계획을 수립하도록 돕는 학습클리닉, 학습클리닉 이후에 학생의 학습태도와 학습의지를 유지하고 격려하기 위한 학습돌봄이 학습의 질을 높이는 구체적 방안이라 생각하고, 이런 활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교사들로 구성한 ‘자기주도학습지원단’을 구성 운영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지원단을 구성하기 어렵더군요! 선생님 입장에서는 본인의 수업을 다하면서 지원단에 속해 도전단에서 활동하는 학생들과 면담하며 학습지원 활동을 하는 것이 물리적으로도 물론이고 심리적으로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고, 설령 제 제안에 공감하는 선생님이라 하더라도 개념만 있고 구체적 실천 매뉴얼이 없는 학습진단 학습클리닉 학습돌봄을 어떻게 수행하느냐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초임 교장을 하면서 다시 한번 자기주도학습지원단을 추진하기 위해 전문가를 모셔오고자 다방면으로 시도를 해보았지만 저와 함께 지원단 활동을 하고자 하는 분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6년의 교장을 하면서 학교교육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아이디어는 어떻게 하든 추진하고 성공적으로 정착시켰지만, 자기 주도학습지원단만큼은 추진하지 못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학습지원 활동이 빠진 자기주도학습지원단 활동만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사교육에 대하여 여러 생각을 합니다. 우선은 사교육이 생겨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조심스러운 주장이기는 하지만, 사교육은 공교육의 부실보다는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학생 학부모의 욕망이 본질적인 존재의 근거된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방증으로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하나는 초등학교에서의 학원수강입니다.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내용이 어렵거나 부실하여 학원을 다닌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다른 하나는 과학고 근무할 때의 경험입니다. 시설과 교사진에서 매우 우수한 여건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금요일에 기숙사를 나가면 많은 학생들이 곧바로 학원에 가서 공부를 하더군요. 오늘날에도 우수한 교육여건을 갖추었다고 믿어지는 특목고와 자사고 학생들이 학교교육이 부실하여 학원을 다닌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공교육 입장에서 사교육 현상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를 생각해 보곤 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방안은 자기주도학습도전단과 같이 사교육을 줄이려는 의지를 가진 학생들을 모아 방과후 자율학습을 하도록 하면서, 학습진단 학습클리닉 학습돌봄을 중심으로 하는 자기주도학습지원 활동을 하는 것이 공교육 기관에서 할 수 있는 사교육을 줄이는 실질적인 방안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활동을 통해 학습과 성장 그리고 입시에서의 성공적인 사례가 쌓여가면 좀 더 많은 학생들이 사교육에 목매지 않고 스스로 공부하려 한다고 믿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히 자녀교육에 관하여는, 성공적인 사례를 보고 나서야 결단과 실천을 한다는 느낌입니다.
학교는 학생과 학부모에게는 수업 이외의 특별한 교육적 수요가 있음을 인정하고 장기적인 계획하에 이러이러한 방향으로 학생 스스로 공부하고 입시를 개척하도록 돕겠다는 방안을 제시하고, 신뢰할 수 있게 자기주도학습을 지원해 나가면 점점 사교육을 줄이는 효과가 나타나리라 생각합니다.
결국에는 학생 입장에서는 학교교육을 중심으로 공부하고 입시를 헤쳐 나가려는 학생과 학원교육을 중심으로 공부하고 입시를 헤쳐 나가려는 학생으로 나누어질 것이고, 학교는 학교에서 구현할 수 있는 자기주도학습을 실천해 나가고 학원은 좀 더 효과적인 지도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되어, 결국에는 학생의 선택의 폭과 학습의 질이 개선되는 방향으로 사회 전체의 교육 지원 역량이 향상되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