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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랑 Apr 08. 2024

뭐먹살 ep1. 교대 졸업 후 pd가 되다

임용고시 낙방 후 뉴미디어 pd가 되기까지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기로 했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명수였다. 명수는 과 짝선배이자 친구이다. 나보다 1년 먼저 임용고시를 본 그는 시험이 끝나자 영상 편집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때쯤 우리가 놀았던 어느 날 명수는 한남동을 배경으로 내가 나오는 뮤직비디오를 만들어줬다. 예상도 못했던 고퀄리티 영상에 마치 선물 받은 기분이 들었고 얘가 영상 만드는 거에 진심이구나 싶었다. 누군가 교대 나와서 다른 거 하는 사람이 있냐고 물으면 난 제일 먼저 명수 얘기를 꺼낸다. 무에서 유를 찾아 새로운 길을 만들어간 명수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용기와 힘이 됐으면 좋겠다.


박명수(익명)

졸업 후 6개월 간 영상 편집 교육 수료

외주 제작사 조연출

모 언론사 대선 기획팀 인턴

현 모 언론사 뉴미디어 pd




안녕하세요.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언론사에서 pd로 일하고 있는 박명수입니다.


교대에 들어간 순간부터 명수 씨의 인생 얘기를  듣고 싶어요.  교대에 갔나요?

저는 자의 100퍼센트로 입학한 케이스예요. 고등학교 때 지역아동센터에서 꾸준히 교육 봉사를 했어요. 애들도 좋았고, 그땐 제가 가르치는 일에 소질이 있는 사람인 줄 알았죠. 고등학교 3년 내내 생활기록부 칸에 항상 초등학교 교사를 적었어요. 외길이었죠.


자의 100퍼센트라니 놀랍네요.

그때는 직업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해보지 않았어요. 그냥 가르치는 일이 좋으니까 교사해야겠다 이거였어요. 그리고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볼 기회가 사실 없었어요. 학교에서 공부만 하니까 이런저런 직업이 있다는 걸 별로 상상할 수 없었던 환경에 있었던 것 같아요. 부모님도 제가 원하는 걸 하라고 하시니까 나는 계속 교사만 생각했어요.


교대 다닐  교사와  맞는다는 생각했었나요?

아니요. 오히려 가르치는 일이 더 좋아졌어요. 교생 실습을 나가서 한 번도 싫었던 적이 없어요. 부담되긴 했지만 너무 재밌었죠. 애들도 괜찮았고 선생님들도 좋았고 내가 어떤 수업을 해볼 수 있다는 거에서 효능감을 엄청나게 느꼈어요. 1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는 강의 듣는 것보다 실습을 기다렸어요. 학점 관리는 안 했지만 실습은 열심히 했죠.


임용고시 공부할 때도 진로에 대한 고민이 없었나요?.

. 4학년 초반까지는. 근데 4학년 때 임용고시 공부가 너무 싫었어요. 임용고시 공부를 하면서 진로에 의심을 하기 시작했어요. 제가 1학년 때부터 교내 방송국 아나운서였는데 동아리에서는 아나운서도 pd 역할을 하거든요. 평소에 라디오 방송이나 영상을 만들고 편집하는 게 재밌다는 인식은 하고 있었죠. 근데 3학년 때까지는 그쪽에 생각이 없다가 임용고시 공부 시작하면서 마음이 기울었어요.


그래서 4학년  방송 장비를  건가요?

. 1학년 때부터 과외를 꾸준히 해서 돈이 모여 있기도 했고 영상 편집을 제대로 해보고 싶었어요. 솔직히 지금 와서 돌아보면 회피였던 것도 같아요. 임용고시 공부가 지루했고 내가 잘 하지도 못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눈을 돌리게 된 게 영상 제작이었고 그때 몇몇 다큐멘터리도 봤어요. 보면서 저런 영상 찍어서 만들어보고 싶단 생각을 했죠. 9월에 맥북을 샀어요.


그렇게 방송 편집을 배우게 됐나요?

그때 크게 흔들리고 1차 시험을 11월에 봤어요. 근데 시험을 붙어버린 거예요.


붙기 싫었나요?

붙기가 싫진 않았지만 이 공부가 너무 싫었어요. 떨어져도 괜찮다는 마음이었죠.


초등 임용고시가 단순 암기라서  맞는 사람들은 진짜 힘든  같아요. 완전히 질렸군요.

. 1차를 붙었는데 1.5배수 점수였고 면접을 기깔나게 보지 않는 한 어차피 떨어질 게임이었어요. 2차 시험을 봤는데 2월에 불합격 발표가 났죠. 그래서 '지금이다'라는 마음으로 미련을 버렸어요. 애초에 재수할 생각이 없었고 두 가지 선택지를 뒀죠. 첫 번째는 호주 여행을 혼자 간다, 두 번째는 영상을 제대로 배운다.

당시 *국민내일배움카드로 영상 편집을 배우는 과정을 찾았어요. 기획, 취재, 섭외, 촬영, 편집, 모션 그래픽까지 아예 방송 제작 시스템을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죠. 4월에 호주 갈 비행기를 예약해 뒀는데 그건 취소하고 여길 들어갔어요. 졸업 직후에 3월부터 9월까지 6개월간 나인투식스로 영상 편집을 배웠어요.

 *고용노동부로부터 적합성을 인정받아 훈련비 지원대상으로 공고된 훈련과정. 1인당 300에서 500만원까지 훈련비를 지원한다.

 *현직 공무원은 신청할 수 없다. 세부훈련정보는 직업훈련포털(hrd.go.kr)에서 직접 검색ㆍ확인 가능.


비전공자로서 직무를 배우는  어려움은 없었나요?

다행히도 거기 온 사람 중 전공자가 아무도 없었어요. 완전 초심자를 대상으로 취업까지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커리큘럼이었거든요. 서른 명 정도가 있었는데 다 전공이 달랐어요. 조경학과인 사람도 있었고 미술 하는 사람도 있었고. 전공자들 사이에 끼어있었으면 위축됐을 텐데 전공이 다 다른 사람들이라 오히려 다행이었어요.


그때 명수 씨가 에너지 넘쳤던  기억나요. 저에게 "거기 가보니까 우리 아직 어린 나이더라. 뭐든 시작할  있어"라고 말했잖아요.

제 인생의 황금기를 꼽으라면 그때예요. 살면서 가장 주도적인 순간이었어요. 진짜 배우고 싶은 걸 그렇게 적극적으로 배운 게 처음이었어요. 별세계였죠.

 

임용고시 재수를   거에 대해서는 아쉽지 않았나요? 공부한  아깝다거나 TO 줄어들까 걱정된다거나.

불안했어요. 그때 서울 임용 티오가 300명대였는데 여기서 더 줄면 못 붙는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그 공부에 환멸이 났어요. 다시 하고 싶지 않았어요.

 

 취업은 어떻게 했나요?

전문적으로 이 일을 하려면 크게 세 가지 선택지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언론고시 합격, 외주 제작사 취업, 방송국 비정규직. 근데 애초에 공채가 될 것 같진 않았어요. 대신 지상파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외주 제작사에 들어가기로 했죠. 전 주변에 물어볼 데가 없으니까 일단 현장에 가서 시작하면 인맥이 생길 것 같았고 무엇보다 당장 다큐멘터리를 찍어보고 싶었어요. 6개월 동안 공부하면서 제일 해보고 싶었던 게 다큐였기 때문에. 그 회사가 사무실 한 칸에 직원도 10명이 안 되는 작은 회사였어요. 면접보러 갔는데 아무도 없고, 최저임금이고. (웃음) 근데 대표님의 필모그래피가 괜찮았죠. 어쨌든 지상파 다큐멘터리니까. 그렇게 시작했는데 다행히 생각보다 괜찮은 팀이었어요.


그곳에서의 일은 어땠나요?

조연출로 19개월 정도 일했어요. 다큐는 예능과 달리 제작진이 많지 않아서 보통 저랑 pd선배 두 명이 짝을 지어 다녀요. 그래서 해볼 수 있는 것들이 많았어요. 제가 비전공자에다 경력도 없는데 현장을 많이 경험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열악하긴 했지만 확실히 재미있었어요. 어떤 사람을 찍고 편집해서 방송이 나왔을 때 느껴지는 뿌듯함도 있었고요.


제작사는 원래 비전공자를 많이 쓰나요?

. 열린 문이에요. 대신에 처우가 안 좋아요. 전문성은 좀 없어도 올 수 있어. 대신에 돈 적게 받고 구르면 돼. 이런 스탠스랄까? 부품처럼 일하게 하는 열악한 제작사들도 있어요. 규탄합니다. (웃음) 제가 다녔던 곳은 그래도 좋은 편이었어요.


 모든 과정에서 부모님의 반응은 어땠나요?

처음엔 터치를 안 하셨어요. 좀 하다 그만두고 나중에 임용고시를 다시 볼 줄 아셨던 거예요. 제가 원래 고집이 세고 누가 뭐 하라고 하면 절대 안 듣는 스타일이라 계속 참으시다가 일 시작한 지 몇 달 되니까 이건 아니다 싶어서 말을 꺼내셨어요. 맨날 늦게 퇴근하고 밤을 새는 일이 잦아지니까 제 건강이 걱정되셨던 것 같아요. 그때 엄청 많이 싸웠어요. 그래서 엄마아빠를 설득하려면 내가 공채를 보든지 해서 이 일이 지속 가능한 직업이라는 걸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여지껏 부모님이 반대하면 결국 그들이 원하는 길로 가게 된다고 생각해왔다. 보수적인 부모님을 둔 사람은 창의적인 직업을 못 가진다는 편견도 있었다. 명수가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해 처우가 더 나은 회사로 이직했다는 걸 듣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명수는 부모님과의 갈등, 다툼을 계기로 본인의 커리어를 업그레이드 했을 뿐 pd라는 꿈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명수에게 부모님의 반대는 장애물이 아니라 발전의 씨앗이 되었다. 내가 하고싶은 걸 하면서도 부모님을 내 편으로 만드는 건 결국 나의 태도에 따라 달린 거라는 걸 깨달았다.


 명수씨가 부모님과 싸우신  몰랐어요. 허용적인 부모님이실 거라 생각했거든요. 지난한 과정이 있었군요. 고집 얘기 나와서 하는 말인데 사주에서도 명수씨 고집 세다 그랬다면서요.

(웃음) 왜 이렇게 기억력이 좋아요? 사주를 보면 늘 맘대로 하는 팔자, 역마살이 나와요. 어차피 니 맘대로 할 건데 내가 말해주는 게 무슨 소용이냐는 말도 들었어요..


그건 타고난 건가요?

타고났죠. (웃음)


그때 다니던 제작사를 그만둔  그럼 부모님의 영향이 컸던 건가요?

그렇기도 했지만 마지막으로 했던 프로젝트가 너무 힘들었어요. 제작사에서 평생 있다가 건강도 버리고 돈도 못 벌겠더라고요. 일은 많이 하는데 여기서 내가 아무리 잘해도 크레딧에 메인 pd로 올라갈 일은 없을 거라는 한계도 느꼈고요. 여기서 이 정도 했으면 다음 커리어로 가기 위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좋게 끝내고 나왔어요. 그러고 처우가 더 나은 대형 제작사나 케이블 TV에 지원하는데 다 떨어지는 거예요. 그때 처음으로 비전공자로서의 한계를 느꼈어요. 제작사에서 나름 19개월이나 일하고 나름 잘한다는 평가도 많이 받았는데 생각보다 그걸 인정해 주지 않더라고요. 공채 시험도 떨어졌고요. 그러다 8월에 한 언론사 대통령 선거 기획팀에서 인턴을 뽑았어요. TF팀이었는데 큰 언론사고 대통령 선거니까 지원했죠.


대선 기획팀에서는 어떤 일을 했나요?

스무 명 정도의 인턴이 있었는데 단장님이 저를 되게 좋게 봐주셨어요. 실무 경험을 중요시하는 분이셨거든요. 8월 말부터 대통령 선거 날까지 6개월을 일했는데 다양한 일을 되게 많이 했어요. 생방송도 진행하고 예고편도 만들고 개표방송 VCR도 제작했어요.

 

인복이 있었네요.

. 단장님이 인재 영입을 좋아하고 자기가 뽑은 사람들에 대한 확신이 있는 분이셨어요. 결국 거기 있던 사람들 다 잘됐어요.


거기에 있을  명수씨 행복해 보였어요. 그때 만난 사람들과 굉장히 친하게 지냈죠?

. 그 친구들이랑 일하면서 다음 커리어도 스터디처럼 같이 준비했어요. 그 친구들이 공채 지원하는 걸 보면서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그 팀 끝날 때쯤 서류를 썼고 바로 입사해서 지금 회사에 들어왔어요.


지금 회사에서의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되나요?

지금은 데일리 프로그램을 하고 있어서 매일 방송을 내보내야 해요. 1-10으로 근무해요. 출근해서 뉴스 아이템 발제하고, 회의하고, 그날 방송에 들어갈 자료들을 만들고, 저녁에 방송할 때 진행 보고 방송 끝나고 후반 작업을 해요. 뉴미디어 pd라서 촬영, 편집, 섭외까지 제가 다 해요.


지금 하는 일이 pd 준비하던 시기에 명수씨가 했던 예상과 많이 다른가요?

처음엔 pd를 예술가처럼 생각했던 것 같아요. 원하는 주제를 잡아서 그에 대한 작품을 만드는 일일 줄 알았던 거죠. 회사에 들어와보니 데스킹이라는 과정이 쉽지 않더라고요.

 

데스킹이란 위에서 기사를 관리하고 승인하는 과정을 말하는 건가요?

그니까 내가 어떤 아이템을 취재하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닌 거죠. 예를 들어 이 카페를 운영하는 사장님을 찍고 싶다면 그걸 왜 해야 하는지 위에 설득해야 해요. 설득하지 못하면 찍을 수 없어요. 또 제가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 줄 알고 시사팀에 들어왔는데 여기 와서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걸 알았어요.


 명수씨가 대학교 때보다 사회 문제에 관심이 훨신 많아졌다고 생각해요. 518광주 민주화 운동 여성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거나 우리나라 결혼 문화의 악습을 꼬집기도 하던데. 원래 이런 것들에 관심이 많았나요?

아니요. 대학생 땐 사회 문제를 잘 몰랐어요. 우리 대학교 때 생각해 보면 중요한 일이 많았잖아요. 강남역 사건도 있었고. 근데 그땐 뭔가 행동해야겠다, 더 알아봐야겠다는 마음이 크지 않았어요.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다큐멘터리 팀에 들어간 이후예요. 이 일을 하면서 시야가 완전 넓어졌어요.

 

그런 문제 의식이 pd로서 필요한 자질과 관련이 있나요?

완전. 그게 없으면 할 수 없어요.


지금 시사 프로그램 pd 일하는 건 어떤가요?

잘 안 맞는 것 같아요. 다큐멘터리는 하나 잡으면 파고들 수 있잖아요. 시사는 휘발성이 강하고 뭐 하나를 뾰족하게 파고들기 어려우니까. 이건 모든 시사 pd의 고민일 수도 있어요.


사이드 프로젝트로 양양의 서핑 문화를 담는 다큐멘터리도 제작 중이잖아요. 이 프로젝트는 어떻게 하게  건가요?

평범한 사람들을 만나서 인터뷰하고 싶었어요. 지금 회사 다니면서 다큐멘터리에 대한 갈증을 느끼기도 했고요. 우연히 양양에 갔는데 거기서 신기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주말마다 양양에 가서 저랑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 강원도까지 가서 서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영상으로 담았어요.


명수 씨가 매력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스토리가 많은 사람을 좋아해요. 할머니 할아버지들 좋아하거든요. 그들이 하는 말이 귀엽고 그들 안에 얘기가 많잖아요. 또는 나랑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 나는 내가 여전히 방황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양양 가서 다른 사람들이 방황하는 모습을 보고 영감을 많이 얻었어요. 왜냐면 나는 방황이 우울함으로 표출이 되는데 그 사람들은 똑같이 방황을 하면서도 그걸 몸으로 부딪히면서 건강하게 그 시기를 지나가고 있으니까. 그런 거에 감명받았죠.


그런 부분이 명수 씨가 느끼는 pd 장점인가요? 사람들을 만나고 영감을 얻는 거요.

. 결국 사람이 좋아서 하는 것 같아요. 뭔가를 기획해서 사람을 설득하고 취재한다는 과정이 똥줄 타는 일이긴 하지만 그들의 얘기를 듣고 있는 순간은 너무 짜릿해요. 내가 언제 이런 사람을 만나볼 수 있을까? 이 생각이 커요. 언제 또 5.18 민주화 운동 때 도청에서 총 든 여성분을 만나볼 수 있겠어요.


pd라는 직업의 단점, 애환은 어떤  있을까요?

너무 많아요. 일단 매 순간 나를 갈아 넣어야 해요. 뭔가를 하겠다는 목표가 뚜렷하지 않으면 일을 하기 힘들어요. 보통 뇌를 빼고 일한다 그러잖아요? 주어진 일 하고 퇴근하고. 그걸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다 보니 번아웃이 쉽게 와요.


번아웃이 심하고 지칠  혹시 교사를 다시 하고싶다는 생각이 드나요?

절대요. (웃음)


어떻게 이렇게 미련이 없는지 궁금해요.

그러게요. 나도 궁금해요. 진짜 다시 안 하고 싶어요.


교직이 싫어질 특별한 계기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근데 어떻게 그렇게 미련이 없나요?

아직 이 일이 좋아요. 업계를 바꾸고 싶다는 생각은 없어요. 만약에 내가 강원도 양양에서 교사를 하면서 방학 때마다 다큐멘터리를 찍는다면 너무 좋겠죠. 근데 그럼 돈을 못 벌잖아요. 그래서 하겠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만약에 명수 씨가 임용고시 합격했으면 어떻게 살았을까요?

재미있는 질문이네요. 어땠을까? (고민) 했으면 열심히 했을 것 같아요. 5년 가까이 일을 하면서 느꼈는데 나는 아무리 싫은 일을 해도 대충 하는 사람은 아니더라고요. 교사를 했어도 열심히는 했을 거예요. 근데 뭔가 방학 때 방속 쪽 일을 도모했을 것 같기는 해요.


저는 교직을 그만두고 싶지만 아직은 다른  시작하기가 불안해요. 그래서 저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프로젝트를 시작했고요. 명수 씨는 불안함이 없나요?

저도 불안함이 되게 큰 사람이에요. 근데 진짜 다행인 건 여기 와서 만난 사람들이랑 불안을 나눌 수가 있다는 거예요. 사실 저는 교대 다니면서 집단에 섞여 있다는 기분이 안 들었어요. 교대 친구들이 저랑 비슷한 사람들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근데 진짜 신기한 게 업계를 바꾸면서 여기서 만난 사람들이랑 너무 잘 맞는 거예요. 불안하지만 다들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고 이 사람들이랑은 충분히 그걸 공유할 수 있어요.


공감돼요. 저도 지금 근무하는 학교에 제가 속해있다는 기분이  들거든요. 나만 다르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자기랑 결이 맞는 집단이 있는 것 같아요. 내가 만약 금융권에서 일을 한다면 안 맞을 거고.


지금 말하는 결이라는  어떤 거예요? 열정? 자기 일에 대한 애정?

무모함이요. 예를 들면 지금 저랑 사이드 프로젝트 하는 동료도 소위 말하는 '정석' 루트랑 거리가 멀어요. 늘 새로운 걸 하고 싶어 해요.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이 명확한 사람이죠. 그게 멋있어 보이는데 이 집단 안에 있으니까 저도 그런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불안하고 예민한 사람들 많지만 그마저도 저랑 잘 맞아요. 고민을 얘기했을 때 다들 충분히 공감해 주고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죠.


부러워요. 이게 제일 부럽네요.

돈이 전부가 아닌 사람들이라 좋아요. 말이 잘 통하고요.

 

그럼 앞으로 어떤 pd 되고 싶나요?

제 분야가 생겼으면 좋겠어요. 다큐멘터리 감독님들 중에 세월호 얘기만 하는 분, 동물권 관련된 것만 찍는 분이 있어요. 자기 분야가 명확한 사람들이 이 바닥에서 이름을 날리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이진주 pd는 환승 연애, 연애 남매 이렇게 연애 관련된 걸 잘 하잖아요. 지금은 제가 뭐에 관심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하고 싶은 게 명확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이번에 사이드 프로젝트로 양양의 서퍼들을 인터뷰하면서 제가 좋아하는 걸 오랜만에 발견했어요. 촬영을 잘 한다고 해서 효능감을 느끼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제 분야를 빠른 시일 내에 찾고 싶어요.

 

교사가 되기 싫은 교대생이나, 교사하면서 이직이나 퇴직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나는 지금 번아웃이 왔고 퇴사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그때 선택은 진짜 잘했다고 생각해요. 내가 대학 때 세상 물정을 몰랐다고 했잖아요. Pd를 안 했으면 계속 그렇게 세상의 많은 것들을 모르고 살았을 것 같아요. 맨날 투덜대면서 일을 하지만 그래도 그때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아요. 해서 실패할 수는 있는데 안 해보는 것보다는 낫죠.




  하고싶은 일을 업으로 삼는다고 마냥 행복하기만 한 건 아니다. 지난 5년간 내가 만난 명수는 때론 즐거워 보였고, 때론 지쳐 보였다. 인터뷰할 당시에도 시사 유튜브 pd 로서 부딪히는 한계와 어려움에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명수는 교사가 아닌 pd를 택한 자신의 선택에 매우 만족했다. 번아웃이 올 때도 임용고시를 다시 칠 생각은 절대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런 단호함이 단지 pd-교사 간 직무의 차이에서 오는 건 아닐 것이다. 5년 간 방송계에서 일하며 명수는 마냥 해맑던 대학생에서 다양한 사회 문제를 예리하게 짚어내는 pd로 성장했다. 성장의 배경에는 명수와 비슷한 문제 의식을 갖고 있으며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용기 있게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는 동료들이 있었다. 변화한 자신의 모습이 좋고, 힘들어도 동료들과 함께라면 버텨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에 명수는 힘들어도 계속 pd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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