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후, 유담이 추가로 하고싶은 말이 있다는 뜻을 전했다. '의원면직 하기 전 꼭 해야 하는 일'과 '나의 진로를 동사로 생각해보기' 등에 대해 알려주고 싶다고 했다. 덕분에 추가 인터뷰를 통해 유담의 근황과 계획에 대해 더 자세히 들어보았다.
먼저 의원면직 하기 전에 꼭 해야 하는 게 있다고 하셨는데, 그게 뭘까요?
내가 했던 걸 개인 드라이브에 저장해놓는 거요. 제가 일했던 학교는 학교 전체에서 공유 드라이브를 사용했어요. 그래서 제가 만든 수업 자료, 업무 관련 파일들을 다 거기에 저장해놨거든요. 마지막에 나올 때 복사 붙여넣기를 해온 줄 알았는데 제대로 안 된 거예요. 사실 그런 자료들 정리만 깔끔하게 하면 자기소개서나 포트폴리오에 써먹을 수 있는 게 진짜 많거든요. 그래서 의원면직하실 분들은 그동안 내가 했던 것들을 싹싹 긁어모아서 와야 한다고 얘기하고 싶어요.
진로에 대해 고민할 때 내가 선호하는 걸 명사가 아닌 동사로 찾아보라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요?
한참 이직 고민했을 때 의원면직한 초등학교 선생님께서 블로그에 자기가 교사하면서 했던 일들을 쭉 나열한 게 있었어요. 했던 일을 단순히 나열하는 게 아니라 최대한 세부적으로 단계화하는 건데요. 예를 들어 ‘수업’이라는 명사 안에 ‘수업 준비하기’, ‘수업하기’, ‘수업 끝나고 돌아보기’가 있잖아요. 수업 준비 안에서도 교과서 분석하기, 개요 짜기, 활동 정하기, ppt 만들기 이런 단계들이 있고요. 그걸 다 적어보고 싫은 거엔 엑스, 좋은 거엔 동그라미를 쳐보는 거예요.
그렇게 적어놓으니까 교사가 하는 일이 진짜 많더라고요. 그중에서 저한테는 수업 구상하는 게 가장 잘 맞았어요. 학생 수준을 고려해서 활동이나 수업 흐름 짜는 걸 재밌어했거든요. 자료를 만들 때도 개별 학생들 특성을 생각해 추가 학습지를 만들거나 매 단원과 어울리는 색깔, 디자인까지 신경 썼어요.
근데 수업만 하면 그렇게 재미가 없는 거예요.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었어요. 그래서 저한테는 실질적인 운영, 강연보다 아이디어 내고 기획하는 과정이 더 잘 맞는다는 걸 알게 됐어요.
하고 싶은 일을 동사로 찾는 거군요.
그게 편하죠. 다음 직업을 고민할 때 당장 직업을 정하려고 하면 막막하잖아요.
‘나 뭐하지?’라는 고민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한 걸 세세하게 나열해 보는 게 좋아요. 예를 들어 대학생 때 하는 팀플도 [자료 조사 / 자료 정리 / 개요 짜기 / ppt 제작 / 발표] 이런 식으로 나뉘잖아요. 이때 내가 좋아했던 게 뭔지 생각해 보면 나랑 잘 맞는 직무에 대한 감이 잡히더라고요.
저 같은 경우엔 산업군보다 하는 일이 더 중요해서요. 제가 ‘기획하기’라는 동사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구인란에 비슷한 활동을 하는 일이 있으면 냅다 지원해서 경험해 봤어요. 활동을 기준으로 잡고 경험을 쌓는 게 좋은 방법 같아요.*
*Ebs 최태성 선생님도 “여러분들의 꿈은 명사여선 안됩니다. 동사여야 합니다.”라는 말을 하신 적이 있다. 동사로 진로를 얘기하면 선택의 폭이 자연스럽게 넓어지고 내 욕구와 일치하는 직업을 찾기가 쉬워진다. 유튜브 <이조잘>님이 ‘꿈찾기 동사지’를 제시하는 동영상을 링크로 첨부한다.
https://youtu.be/tQgYSkstenY?si=E3ZJn82GisF-u71E&t=268
원래 교대 말고 신문방송학과를 가고 싶어 했잖아요. 기획이랑 관련된 일이네요.
네. 호주 오기 전에 방송 작가 설명회를 다니면서 문득 떠올랐는데요. 제가 고등학생 때 <30초짜리 광고 만들어보기 2박 3일 캠프>에 다녀온 적이 있어요. 거기서 제가 낸 아이디어들이 채택이 많이 됐었거든요. 제가 방향을 제시하면 다른 친구들이 촬영하고 편집해서 결과물이 나오는 게 재밌었어요.
근데 대학생 때 영상 편집 배울 때는 도저히 흥미가 안 생겨서 그만뒀거든요. 그래서 저는 제가 그 분야에 진심이 아닌 줄 알았어요. 돌이켜보면 그냥 포인트를 잘못 잡았던 거죠. 전 기획을 좋아하는데 제작만 배우고 있었으니까요.
방송 작가라는 직업은 정규직보다 프리랜서로 뽑는 경우가 많아 처우가 불안정하고, 페이도 적다고 들었어요.* 만약 한국에 돌아가 작가를 하게 된다면 부당한 대우와 열악한 노동 강도를 버텨야 할 텐데 어때요?
경험이 없기에 추측일 뿐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교사 처우가 더…
*이슬기, 서현주 <직업을 때려치운 여자들>
교사 처우가 최악이다?
네. (둘 다 웃음)
외부 사람들은 교사를 칼퇴근하고 방학 있는 ‘꿀 직업’으로 생각하죠. 사실 그게 다가 아닌데요. 어떤 점에서 교사 처우가 최악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작가 설명회를 갔다고 했잖아요. 9년 차 작가 분이 강의를 하시는데 요리 프로그램에서 작가들이 뒤에서 마늘 까고 재료 손질 다 한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근데 그 얘기에 대학생들이 엄청 충격을 받는 거예요. 저는 놀라운 게 하나도 없었거든요.
교사가 맨날 하는 거니까요?
마늘 손질이 뭐야, 온갖 허드렛일 다 하잖아요.
그렇죠. 제가 일하는 학교는 교실 급식이라 애들 먹은 음식물 치우고 이런 거 제가 다 하고요. 제 친구는 1학년 담임인데 학생 화장실 뒷처리까지 해줬대요.
그러니까요. 교사는 그런 일 다 하는 게 일반적이죠.
학부모들이 그걸 바라기도 하고요. 초등 교사는 특히 하는 일이 정말 다양한 것 같아요.
장점도 있어요. 하는 일이 많으니까 어떤 일이든 연결점을 찾기가 쉬워요. 연결 안 되는 데가 없거든요. 호주 가기 전에 해외 인턴도 준비했었는데요. 교사하면서 했던 일을 쭉 정리해서 해당 직무에 관련된 것만 골라 쓰니까 스토리텔링 짜기가 쉽더라고요.
맞아요. 아까 얘기했던 ‘기획’만 해도 그래요. 저도 컨텐츠 기획 강의를 들었었는데 교대에서 배운 수업 구상이랑 비슷한 부분이 많더라고요. 어쨌든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동기를 유발하고, 내용을 쉽고 재밌게 전달하는 거니까요.
제가 대학생 때 왜 그렇게 길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어요. 막상 관둬보니까 찾으면 방법이 다 보이는 거예요. 요즘엔 비전공자로서 취업하는 사람들도 생각보다 정말 많고요. 커뮤니티도 잘 되어 있고 학원도 많고, 내일배움카드로 배울 수 있는 경로도 있으니까. 내 마음과 선택에 달린 것 같아요.
지난번 비자 연장을 고민 중이라고 했는데요. 그건 어떻게 됐나요?
시골 가서 농장이나 공장에서 일하고 비자 연장하려고요. 근무 일수 88일을 채우면 1년 연장할 수 있어요.
농장, 공장이요?
네. 기피 대상 일을 해주는 대가로 비자를 연장하는 거죠. 가면 그래도 일찍 시작해서 일찍 끝난다니까 자기 계발할 시간은 넉넉할 것 같아요. 간 김에 계획했던 것들 싹 해보고 오려고요.
만약 축사 같은 데 가면 어떡해요?
그런 데로 가는 사람들도 있어요. 막 닭뼈 바르고. 솔직히 한국 가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더 나은 일을 할 수도 있긴 한데요. 새삼 ‘내가 뭐라고’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내가 뭐 그리 대단한 사람이라고 직업의 수준을 따지나. 그냥 이참에 제 생각도 고쳐먹고 오려고요.
얼마 전 읽었던 책에서 대기업 다니던 여자분이 퇴사 후 육체노동에 뛰어들었다는 얘기를 보긴 했어요. 회사에 있을 땐 감정기복이 적고 둔감할수록 일을 잘하는 사람으로 평가받는데 육체노동 할 때는 오감이 예민한 게 도움이 많이 돼서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세이노의 가르침>이라는 책을 읽었는데요. 거기서 사람들이 투자를 잘 못하는 게 현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서, 먼 동네로 이사 가거나 집을 월세로 돌리기가 겁나서 그렇다는 얘기가 있었어요. 제가 농장이나 공장 한번 갔다 오면 나중에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그때 그런 것도 했는데’라며 넘길 수 있지 않을까요? 제 하한선을 낮춰보고 싶어요.
*이혜민, <요즘 것들의 사생활: 먹고사니즘>
도전 정신이 엄청난데요.
당장 하게 생겼으니까 어떡해요. 질질 짜고 있으면 될 것도 안 된다고요. (웃음)
한편으로는 교사하면서 진짜 싫었나보다 싶어요. (웃음) 호주 외딴 시골에서 육체 노동하는 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라면요.
그런가 봐요. 여기서도 유치원 교사 자리가 있기는 한데 하기 싫어요. 왜 이렇게 싫은지 모르겠어요.
아이들이 아니라 성인 대상으로 수업하는 강사 일은 어떨 것 같아요?
잘 모르겠어요. 안 그래도 내년에 여기서 성인 대상 한국어 교육을 해볼까 싶긴 해요. 화상으로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는 일인데 시급은 다른 일의 절반 정도예요. 그래도 해보려고요.
다른 일은 시급이 높나요?
호주 최저 시급이 24불에서 28불 정도 해요. 야간 수당, 휴일 수당 다 주고요. 근데 생활 비용은 한국 물가랑 비슷해서 훨씬 살 만해요. 그래서인지 40대가 되어도 파트타임 하면서 배우고 싶었던 걸 배우거나 다른 일에 도전해 보는 사람들이 많아요.
교사 보결 수당이 만이천원인 게 한스럽네요. 그럼 시골 농공장에 들어가서 일하고, 한국어 화상 강의해 보는 게 당분간의 계획이네요. 장기적으로 해보고 싶은 일은 뭔가요?
방송 작가도 생각 중이고 아직은 열려 있긴 한데, 한국에서 취직을 한다면 인사관리 업무를 해보고 싶어요. 제가 좋아하는 기획 일이기도 하고 직원 교육 업무가 전공과도 관련 있어서요. 호주에서 그쪽 공부를 하는 것도 생각 중이에요.
저도 넥슨에서 직원 복지와 자기 계발을 위해 주최하는 ‘넥슨 포럼’ 교육팀의 인터뷰를 읽고 그쪽 일을 하고 싶었던 적이 있어요. 근데 제가 지원한다 한들 뽑힐 수 있을까, 이제 대학 졸업한 스펙 짱짱한 취준생들이 다 같이 뛰어들 텐데 나만의 경쟁력이 있긴 할까 싶었거든요.*
제 주변에 사범대 나와서 인사팀 취직한 친구도 있고, MD 일 하는 친구도 있어요.
그리고 제가 나와서 느낀 건데요, 교사만큼 스토리텔링 잘 되는 게 없어요. ‘초등교사하다가 그만두고 이쪽 분야를 준비하고 있다’ 이러면 면접관들이 일단 호기심을 크게 갖거든요. 사람들이 보기에 되게 괜찮은 직업을 놓고 온 거니까 1차로 관심 끌기 대성공이에요.
교사하면서 이런 일을 했는데 하다 보니 내가 이 분야와 잘 맞는 것 같다고 말하면 더 흥미로워하고요.
*컨셉진 104호 <당신은 환기를 하고 있나요?>
교사했던 게 나름 알찬 경력이 되는군요?
네. 나중에 제가 잘 되면 후속 인터뷰도 하고 싶네요. (웃음)
진짜 꼭 그렇게 해요. 그때 되면 이 컨텐츠 반응이 좀 있길 바라며..(웃음) 유담 씨 건강 챙기면서 잘 지내세요.
지난번 인터뷰에서 유담은 다음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은 채로 그만두는 자기 같은 사람들도 있다고 말했다. 유담이 어떤 시험에 합격한 것도, 다음 회사에 취직한 것도 아니지만 그녀는 제일 중요한 게 준비되어 있었다. 자기가 원하는 일을 찾고야 말겠다는 의지, 변화하는 상황을 받아들일 열린 마음,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할 용기.
특히나 유담이 호주 시골 농공장에서 어떤 일이든 해보겠다고 말하는 걸 보면서 나는 많은 걸 깨달았다. 닭뼈 바르는 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그녀의 씩씩하고 긍정적인 태도가 존경스러웠다. 친구지만 나보다 훨씬 어른스럽고 대단해 보였다.
나는 유담처럼 할 수 있나, 한편으로는 반성하게 됐다. 나는 과연 가진 걸 다 버리고 아무도 없는 외국으로 가 육체노동을 감수할 사람인가? ‘내가 뭔데’라는 겸손한 태도로 직업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어떤 고생이든 마주한 후 나중에 ‘그때 그런 일도 했었지’라며 흔쾌하게 추억할 수 있을까? (마침 <전지적 참견 시점>에서 연예인 최강희가 청소부 일을 하는 영상을 보기도 했다. 주연급 여배우가 청소, 고깃집 아르바이트를 하는 모습에서 유담이 겹쳐 보였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나는 소위 말하는 ‘온실 속의 화초’이고 유담은 온실을 나와 척박한 땅에 뿌리 내리는 큰 나무 같다. 교직에 불만이 많다면, 그래서 그만두고 싶지만 전문직 공부는 싫다면, 나도 유담 만큼의 용기와 책임은 가져야 하는 게 아닐까. 머리를 얻어맞는 것 같은 인터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