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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랑 May 22. 2024

뭐먹살 ep3-1. 임용고시 시험장 대신 코딩 학원으로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프로그래머가 되기까지

성공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누군가 나에게 “주변에 확실히 성공할 것 같은 사람이 있어?”라고 묻는다면 나는 단번에 부진(익명)의 얘기를 해줄 것이다. 임용고시 1차를 붙었지만 2차 시험장에 가지 않은 남다른 결단력을 가진 그는 그 길로 곧장 코딩을 배워 프로그래머가 되었다. 4년 차에 프론트엔드 팀장이 된 부진이 받는 급여는 나의 두 배. 그런데 중요한 건 그녀의 직함이나 월급이 아니다. 그보다 나는 부진의 태도를 믿는다.

부진은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운동하고, 재테크 공부를 한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책을 읽으며 회사에 도착해 일한 뒤에 퇴근길 지하철에서도 책을 읽는다. 저녁은 먹지 않는다. 퇴근 후에는 창업 스터디 멤버와 전자책을 쓰거나 퍼스널 브랜딩, 마케팅을 연구하고 (요즘엔 독서하며 휴식한다고 한다. 9시쯤 일찍 잠든다. 이 정도면 삼성 그룹 이부진의 삶과 견주어도 모자라지 않을 ‘갓생’이다.

고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부진의 삶과 가치관을 자세히 들어보았다.




이부진 (익명)

-서울교육대학교 졸

-사설 학원에서 프로그래밍 2년 정규 과정 수료

-웹 / 앱 제작 회사에서 프론트엔드 개발자로 일한 지 4년 째

-현 회사 프론트엔드 팀장

-챗 GPT 관련 전자책 출간 등 각종 사이드 프로젝트 진행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서울교대 졸업 후 프로그래밍을 공부해 관련 회사에 재직 중인 이부진입니다. 고객사들이 요청하는 웹페이지나 애플리케이션을 대신 만들어주는 회사에서 프론트엔드 개발 팀장을 맡고 있어요.


고등학생 때 부진 씨는 어떤 학생이었어요? 교대를 진학하게 된 이유가 뭐였나요?

참교사 지망생이었어요. (웃음)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장래 희망 란에 초등교사를 적었습니다.

제가 전라남도의 한 소도시에서 학교를 다녔었는데 아무래도 지방에서 서울로 대학 가기가 어렵다 보니 수시 위주로 준비해야 했어요. 그때 다니던 국어학원 선생님께서 “대학을 잘 가려면 중3 때부터 방향을 정해야 한다. 스토리를 만들어야 한다.”라는 말씀을 하셨거든요. 그래서 중3 겨울방학쯤 급하게 진로를 정했어요. 마침 부모님도 되게 좋아하셨고요. 저희 지역은 비평준화 지역이라 시험 쳐서 고등학교를 갔는데 저는 일부러 내신 잘 나올 학교를 선택했어요. 설립된 지 얼마 안 됐고, 수학여행을 가면 애가 생겨서 온다는 소문이 있는 학교였죠.


저랑 비슷하네요. 저도 중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서 지금 진로를 정해야 한다고 하셨거든요. 아예 의사랑 변호사 둘 중 고르라고 하셨었어요. 일주일 동안 고민해 오라고. (웃음) 그러다 의사를 하겠다고 했는데 부모님께서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그대로 고등학교 3년 내내 의대를 준비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시기가 너무 빨랐던 것 같아요. 진로라는 게 그렇게 쉽게 정해지는 게 아니잖아요.

저는 초등교사를 선택한 게 나름 제 의지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학생들한테 의지라는 단어가 좀 애매한 것 같아요. 많은 경험을 못 해봤잖아요. 주변 어른과 환경으로부터 주어진 작은 세계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고요.

근데 대학 입시만 놓고 보면 합리적인 전략이었다고 생각해요. 지방에서 서울로 대학 가는 게 쉽지 않고, 대치동 또래들을 이기려면 3년 간 일관적으로 스펙을 쌓는 게 유리하니까요.


학생 때의 진로 선택에 대해 말하며 부진은 이사야벌린-『자유론』의 한 장면을 보여줬다. 주변의 조언과 충고로 선택권이 사라지는 순간 그 사람은 무력해진다는 말도 더했다.



대학 입시에선 그렇죠. 근데 장기적으로 볼 땐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아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전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하고, 천천히 진로를 정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럼 교대 외에 다른 대학은 고려하지 않은 건가요?

서울대 교육학과를 준비하긴 했었어요. 근데 그때 ‘서울대 가도 취업 못 한다, 문과는 힘들다.’ 이런 말들을 주변에서 많이 했어요. 돌이켜보면 무게감 없는 말들이었죠. 정작 그 사람들 중에 진짜 서울대 나온 사람은 없었으니까요.


앞에서 인터뷰했던 유담 씨도 주변에서 ‘다른 대학 가봤자 취업 안된다’는 말을 질리게 들으셨다고 해요. 당시 있었던 괴담이었나 봐요. (웃음) 물론 일부는 사실이겠지만요. 대학 생활은 좀 어땠나요?

잘 놀았습니다. (웃음) 고등학교 때 수시로 대학을 가려다 보니 매 순간을 치열하게 살았어요. 수행평가, 중간고사, 기말고사 중에서 하나라도 1등급이 나오지 않으면 낙오가 될 거란 생각이 있었죠. 새벽 등교 시간부터 쉬는 시간, 자기 전까지 계속 공부만 했어요. 그런 삶이 너무 지쳐서 교대 들어가고 나면 얼른 미팅하고 놀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잘 놀러 다녔습니다. 1학년 1학기 때는 우리 과 뒤에서 3등인가 했어요. 사실 이런 걸 생각했을 때 교대 간 거 후회는 안 합니다. 제가 일반 대학을 갔다면 고등학교 때와 비슷하게 살았을 것 같아요. 완벽주의와 경쟁 심리 속에서 힘들었겠죠.


뒤에서 3등이요? 몰랐네요. (웃음) 그럼 본격적으로 진로 고민을 한 건 언제부터 였나요?

처음엔 ‘어떤 교사가 될까?’에 대한 고민을 주로 했어요. 교사 중에서도 전문성을 갖고 싶었고 특히 승진에 대한 관심이 있었죠. 과제나 시험공부는 대충 했는데 학교에서 해주는 외부 특강은 다 챙겨 들었어요. 그래서 장학사, 교장·교감 선생님께서 해주시는 강연들을 주의 깊게 들었는데요. 이걸 되기 위한 노력과 과정에 대해 알면 알수록 효율이 안 맞는 거예요. 인풋 대비 아웃풋을 생각해 봤을 때 ‘이게 맞나?’하고 의문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차라리 전문성이 있는 교사, 소프트웨어 쪽으로 특화된 교사가 되려고 했어요. 4차 산업혁명, AI 관련 특강을 찾아 들었고 관련 강사 님들 연락처도 받아 놓으면서 배경지식을 쭉 쌓아 나갔죠.


학점 공부보다 더 의미 있는 공부를 하셨는데요? 전 그런 특강들이 있는 줄도 몰랐네요. 그래도 그때는 고민의 범위가 교사 내에서 한정되었던 것 같은데, 프로그래머까지 선택지를 넓히게 된 건 언제였나요?

3학년 1학기 때였어요. 오래 사귀던 남자 친구랑 헤어지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니까 생각이 끝없이 깊어지더라고요. 처음엔 직업보다도 돈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졸업하고 나면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해야 하는데 의식주 중에 ‘주’에 대한 위기감이 들었달까요?

제가 실습 가면 만나는 선생님들께 매번 여쭤봤거든요. “월급이 얼마세요?”, “얼마나 일하면 월급이 올라요?”, “문제집 쓰면 돈 얼마나 더 벌 수 있나요?”, “몇 살 때부터 연금을 받을 수 있나요?” 이런 질문들을 하면서 하나씩 알아보는데 아무리 계산을 두드려봐도 수지타산이 안 맞는 거예요. 연금 개혁이 됐다는 것도 그때 알았고요.

 

부진씨 진짜 빨랐네요? 보통 발령 나고 서울에 집 구하면서 알게 되는 것들인데요. 그러고 보니 부진 씨가 쉬는 시간에 교수님께 “돈 많이 벌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여쭤봤던 것도 생각이 나요.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봤어요. 그러다 제가 느낀 게 있어요. 초등교사라는 직업을 가지면서 서울에서 중산층, 즉 아이들 학원 보내고 외식 자주 하고 집 있고 차 있는 정도의 생활 수준을 유지하려면 첫째로 남편을 잘 만나거나 혹은 둘째로 집안이 원래 유복해야 한다는 걸요.


맞는 말이에요. 저는 그걸 이제야 깨달아 버렸어요.

아니면 전문성을 확실히 갖춰서 강의를 다니거나 책을 쓰는 방법도 있기는 해요. 그래서 소프트웨어 전문 교사가 되려고 했던 거고요.

근데 어쨌든 ‘발을 잘못 들였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앞으로 할 수 있는 게 없고, 교대에서 배운 것들은 다른 곳에 써먹기 어렵다는 무력감에 갇히기 시작했어요. 고3 때 이화여대 초등교육과도 붙었었는데 거길 안 간 게 그렇게 후회되더라고요. 이대 초등교육과는 복수전공도 가능하니까요.

그렇게 사춘기가 늦은 나이에 찾아왔어요. 저 자신을 부정하는 시기였던 것 같아요. 3학년 2학기가 팀플이 가장 많은 시기잖아요. 그땐 팀플하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면 제 상태가 드러날까 두렵고, 뭔가를 얘기하면 그걸로 제가 평가받을 것 같아서요.


슬럼프였군요. 제가 옆에 있으면서도 못 챙겨준 것 같아 미안하네요.

근데 그 시기를 통해서 엄청난 정신적 성장을 이뤘어요. 그래서 저는 그 이후로 새로운 사람을 알아갈 때마다 인생에서 제일 힘든 순간이 있었는지 물어봐요. 누구나 이런 시기를 겪을 수 있거든요.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극복하는지가 그 사람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 같아요.


그런 큰 고민 이후에도 다시 임용고시를 선택한 이유는 뭔가요?

솔직히 그냥 휩쓸려 갔어요. 3학년 2학기 때부터 스터디 그룹을 만드는데, 어디든 속해야 하니까 얼른 정하고 스터디원들이 짜놓은 계획을 따라하는 정도로 공부를 했어요. 다른 사람한테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알량한 책임감은 있었으니까요. 근데 사실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어요. 스터디 외의 남는 시간에는 코딩 쪽 진로를 알아봤습니다.


코딩 쪽을 알아본 건 앞서 말한 소프트웨어 전문 교사가 되겠다는 마음에서 시작된 건가요?

그렇죠. 그리고 교대에서 하는 기본적인 코딩 수업에서 재미를 느꼈어요. 관련 유튜브 영상도 꾸준히 찾아보고 있었고요.


교대에서 하는 엔트리, 스크래치 수업이요? 저는 정말 힘들었는데요. (웃음)

그러니까요. 동기들은 싫어하더라고요. 상대적인 건데 저는 재밌고 좋아하니까 오히려 이게 적성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임용고시 1차를 붙었음에도 2차 시험을 보지 않았어요. 저한테 와서 2차 스터디를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간식을 나눠줬던 게 생각납니다. 어떻게 그런 큰 결심을 했나요?

1차 시험 끝나고 일주일 정도 쉬잖아요. 그때 학교 근처 국립중앙도서관에 매일 갔어요. 가서 소프트웨어 관련 책을 읽고 진로에 대한 고민도 하다가 2차 준비를 시작했는데요.

마음이 없으니까 입이 안 떨어지더라고요. 2차는 면접이라 교육에 대한 열정이나 조직에서의 순응적인 태도가 드러나야 하잖아요. 동기들은 다 준비가 되어있는데 저는 마음부터 없으니까 말이 안 나오는 거예요. 1차 시험 점수가 1배수에서 1.5배수 사이였는데 이러면 면접을 남들보다 잘해야 붙는 거거든요. 근데 자신이 없었어요.

그리고 부모님께 코딩 쪽 진로에 대해 말씀드렸을 때 저를 이해해 보려고 하시기보다는 빨리 달래고 교사를 시키려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니까 임용고시를 붙으면 그땐 더더욱 다른 진로를 모색하기가 어려울 거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어떻게 보면 4년간, 혹은 고등학교 때부터 오랫동안 준비했던 직업인데 내려놓고 새로운 분야에 도전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두려움이나 불안은 없었나요?

두려웠고 불안했지만 교직이 저한테 절대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달아 버려서 어쩔 수 없었어요. 저는 효율이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보상이 있어야 일에 몰입할 수 있거든요. 공무원 자체가 저랑 안 맞아요.


진로 고민 시기 부진이 찾아봤던 논문 목록

부모님 반응은 어떠셨나요?

기숙사 짐 빼고 전남 본가로 내려갔을 때 부모님께서는 임용고시 재수하라고 하셨어요. 코딩 학원 지원해 줄 생각도 없고, 독립하라고. 아버지께서 “네가 이때까지 보인 성취가 있긴 하냐, 너의 뭘 믿고 새로운 시도를 지원해 주겠냐.”라는 말씀도 하셨어요.


상처받으셨겠는데요. 제가 보기에 부진 씨는 고등학교 때부터 계속 열심히 사셨는데∙∙∙.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기도 하죠. 제가 진짜 코딩을 하고 싶었으면 대학교 때부터 준비를 했거나 알바를 해서 돈을 모으는 방법도 있었으니까요. 어쨌든 아버지께서는 당신을 설득할 자료를 가져오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보고서를 준비해 갔는데 “너는 보고서의 보자도 모른다.”라고 하시면서 빨간 줄 찍찍 그으시고 첨삭을 해주셨어요. (웃음)


진로 바꾸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가요? 보고서엔 어떤 내용을 썼어요?

첫 페이지에 1안, 2안, 3안을 표 형식으로 넣었어요. 각각 프로그래머가 될 때까지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을 썼고요. 그중 3안은 부모님께 지원 안 받고 제가 기간제 교사로 일해서 모으는 돈으로 학원에 다니는 방법이었어요.

총 16페이지인데 제가 식사를 어떻게 할 건지부터 식비, 교통비, 생활비, 주거비 등을 계산해서 자료로 넣어놓고 프로그래머 혹은 교사가 됐을 때 예상되는 각각의 평균 연봉도 그래프로 첨부했어요.

근데 아버지께서 계속 수정하라고 하시는 거예요. 10번 넘게 컨펌을 받았어요. 계속하다 보니까 결국엔 답이 정해져 있는 것 같다는 판단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서울 올라가겠다고 말씀드렸어요. “아무리 설득해도 의미 없는 것 아닌가요, 서울 올라가서 제가 돈 벌어서 스스로 할게요.”라고 말씀드린 뒤에 임용고시 때 갖고 있던 프린터, 스캐너, 아이패드 등을 팔아서 350만원을 마련했어요. 그 돈으로 바로 서울 어느 셰어하우스에 들어갔죠.


당시 아버지께 보여드린 계획서


부진 씨도, 아버님도 대단하시네요. 제가 부진 씨였다면 일찌감치 포기했을 것 같아요.

아버지께서 저한테 실망했다고 하셨는데 사실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저를 좀 믿어주고 이해해 주셨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근데 막상 공부 시작한 이후로는 갈등이 별로 없었어요. 처음에 제가 구한 셰어하우스가 치안이 안 좋아서, 부모님께서 올라와 보시더니 방도 바꿔 주시고 다른 지원도 해주셨죠. 나중에 첫 월급 타고 제가 선물도 드렸고요. 



 인터뷰는 다음 글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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