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르베르트 하프너,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B25. 오케스트라의 기준 /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 헤르베르트 하프너 지음, 차경아·김혜경 옮김, 까치
어떤 오케스트라를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열에 여덟아홉은 베를린 필을 꼽지 않을까요.
물론 세계 최고 수준의 오케스트라는 베를린 필 말고도 빈 필이나 뉴욕 필을 비롯하여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은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명실상부 최고의 오케스트라 단 하나를 꼽으라면 역시 베를린 필이 아닐까요.
적어도 베를린 필이 아닌 다른 오케스트라를 최고로 꼽고 나서 한 점 거리낌도 없이 마음이 홀가분한 사람은 아마 찾기 힘들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제 솔직한 생각입니다.
마치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가 누구냐는 질문에 베토벤 말고 다른 작곡가를 꼽고 나면 어쩐지 마음에 개운치 않은 앙금이 남는 것처럼요.
그렇습니다.
베를린 필은, 베토벤이 작곡가의 기준이듯이, 오케스트라의 기준입니다. 적어도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이 책은 바로 그 베를린 필의 탄생 배경과 성장 과정을 무엇보다도 지휘자를 중심으로 통시적으로 살펴봄으로써 독자가 베를린 필과 그 역사에 대하여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꾸며놓았다는 점이 특장입니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불빛이 적고 음울한 별 볼일 없는 도시’였던 베를린이 베를린 필을 보유하면서 ‘세계를 향해서 열린 문화 및 예술의 도시로 발전’하고, 마침내 ‘세계적 도시로, 그뿐만 아니라 유럽 정치의 구심점으로’ 자리매김하기까지의 과정은 마치 오케스트라가 아니라, 한 인물의 일대기를 읽는 듯한 감흥으로 독자를 사로잡습니다.
이 책에서는, 전설적인 지휘자 한스 폰 뷜로가 실질적인 첫 상임지휘자(이 명칭은 일률적이지 않습니다)를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베를린 필의 역사가 아르투어 니키슈,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클라우디오 아바도를 거쳐 사이먼 래틀 경이 음악감독으로 있었던 시기까지 이어집니다.
지금 베를린 필의 지휘봉은 러시아 출신의 1972년생인 키릴 페트렌코가 쥐고 있지요.
그들 모두가 나름의 개성이 워낙 뚜렷한 지휘자들이며, 또 다 하나같이 명실상부한 거장들이라, 그들의 손으로 베를린 필이 어떻게 체질 개선이 되었고, 또 어떻게 그들로부터 다양한 질적 영향을 받으면서 발전하여 마침내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발돋움하였는지, 그리고 어떻게 오늘날까지도 그 지위를 여전히 굳게 지키고 있는지를 우리는 이 책을 통하여 파노라마처럼 목격하게 됩니다.
더불어, ‘선교사’ 뷜로, ‘마술사’ 니키슈, ‘음악의 신’ 푸르트벵글러, ‘미디어의 제왕’ 카라얀, ‘지휘대의 민주주의자’ 아바도, ‘소통의 달인’ 래틀까지, 이 책 각 챕터의 소제목에서 각각의 지휘자를 짤막한 한마디로 규정해 놓은 이 말들이 그야말로 정곡을 찌르는 표현들이라 놀랍습니다.
저는 한스 폰 뷜로만 빼고는 아르투어 니키슈 이후 모든 지휘자의 베를린 필 연주를 다 들어보았는데, 직접 공연장에 가서 직관하며 들었던 지휘자는 사이먼 래틀 경뿐입니다.
래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의 연주는 언젠가 베를린에 갔을 때 베를린 필하모닉 홀의 객석에 앉아서 직접 들었으니까 최상의 연주 환경에서 감상한 셈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때 들었던 슈베르트 교향곡 제9번과 말러 교향곡 제4번의 ‘직관 청취’ 경험은 아직도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아마도 영원히 못 잊겠지요.
슈베르트의 9번은 예매를 해서 들었고, 말러 4번은 암표를 사서 들었습니다. 슈베르트의 소리가 황홀하리만큼 너무너무 좋아서 그 며칠 뒤의 예정에 없던 말러는 암표를 사서 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렇게라도 베를린 필을 베를린 필하모닉 홀에서 꼭 한 번 더 듣고 싶었던 것이지요. 돌이켜 보면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그 베를린 필에 대한 책입니다. 더 이상의 언급은 군더더기일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