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키 카우리스마키, 〈과거가 없는 남자〉
C08. 사랑하려면 과거를 없애라 – 아키 카우리스마키, 〈과거가 없는 남자〉(2002)
없는 것과 잊은 것
제목이 이상합니다.
이 영화는 분명히 ‘과거가 없는’ 남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과거를 잊은’ 남자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과거가 없다는 것과 과거를 잊었다는 것은, 언뜻 들으면 비슷할지 모르나, 엄밀히 따지면 서로 완전히 다른 사태를 가리킵니다.
세상에 과거 자체가 아예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란 역사입니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 나라는 존재가 잉태되는 순간부터 나의 역사는 시작되는 것이고, 그 역사의 궤적이 기억이라는 모양새로 고스란히 보존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과거를 잊는다는 사태는 있을 수 있어도, 과거 자체가 없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과거가 없다고 하면, 그것은 그 과거에 대한 기억의 주체가 없다는 뜻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까 그 주체라는 존재 자체가 애초 태어나지조차 않았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영화의 제목은 ‘과거를 잊은 남자’가 아니라 ‘과거가 없는 남자’, 곧 ‘without a past’입니다.
바로 여기에 이 영화의 주제가 지닌 가장 핵심이 되는 측면이 걸려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기억상실과 멜로드라마
영화가 시작되면 한 중년의 사내가 기차를 타고 헬싱키에 도착합니다.
왜 그가 헬싱키행 기차에 몸을 실었는지를 영화는 하나도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문제는 다음 장면입니다.
그 사내는 벤치에 홀로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가 느닷없이 나타난 불량배 셋한테 영문도 모르는 채 흠씬 두들겨 맞고 실신합니다. 그야말로 ‘묻지 마 폭행’이지요.
이때 그가 잃어버린 것이 소지품만이 아님은, 병원으로 옮겨진 뒤 사망 선고를 받고도 기적처럼 되살아난 그가 병원에서 도망쳐 어딘가의 변두리 마을 강가에 쓰러져 있다가 깨어났을 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으로 미루어 넉넉히 짐작할 수 있는 사정입니다.
요컨대 그는 기억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정확합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합니다. 중증의 기억상실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제부터 그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 과정이 펼쳐질까요? 천만에요. 아닙니다.
이제부터 영화는 기다렸다는 듯 아주 이상한 멜로드라마를 시작합니다.
무뚝뚝한 멜로드라마
오해는 곤란합니다.
여기서 이상하다는 것은 멜로드라마의 내용에 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용이라면 너무도 상투적인 내용입니다.
생면부지의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우연히 처음 만나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 호감이 차츰, 또는 급속하게 사랑으로 발전하는 이야기―.
뺄 것도 더할 것도 없지요.
문제는 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전혀 멜로드라마스럽지가 않다는 데 있습니다.
감미로운 음악이 보는 이의 감정선을 자극하는 바도 없고, 때깔 고운 연애의 장면이 펼쳐지지도 않습니다.
한 마디로 무뚝뚝하기가 그지없습니다.
특히 배우들의 연기가 그러합니다.
표정도 대사도 동작도 눈빛도 시종일관 뚱할 뿐입니다.
소리를 제거하고 화면만을 본다면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는지 종잡을 수 없을 게 빤합니다.
무뚝뚝한 것으로만 치면, 기타노 다케시의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1991)의 그것과 맞먹습니다. 아니,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습니다.
기타노 다케시는 숫제 주인공 남녀를 언어 장애인으로 설정함으로써 대사의 무뚝뚝함을 처음부터 제거해 놓았으니까요.
신기한 점은 그럼으로써 조장된 침묵 자체에 여타의 뚱하고 무뚝뚝함을 상쇄시키고도 남을 깊은 감정의 울림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매력적인 무뚝뚝함
하지만 〈과거가 없는 남자〉는 그런 감정의 깊은 울림 자체를 무뚝뚝한 대사가 계속해서 망쳐놓습니다.
대개 사랑하는 남녀는 말없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보는 이에게 깊은 감정의 울림을 전해 주는 법인데, 이 영화는 거기에 거의 삭막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무미건조한 어조의 대사를 부단히 끼워 넣어서 감정의 몰입을 거듭 방해합니다.
고의적이지요.
이것이 영화 전체에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생경한 정서의 파장을 그려놓습니다.
신기하게도 이 파장이 매력적입니다.
이 매력을 이해하고 느끼는 것이 이 영화의 감상 포인트라고 하면 될까요.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이 매력이 유머의 일종임을 아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요컨대, 빙그레 미소를 지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다면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1989)에서부터 〈성냥공장 소녀〉(1990)에 이르기까지, 핀란드 출신의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이 기왕에 펼쳐 보였던 저 무뚝뚝하면서도 유머러스하고, 동시에 거칠면서도 따뜻한 영화미학의 기이한 세계의 한 부분을 이 영화가 당당히 차지한다는 주장에 누구라도 충분히 동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억을 되찾아가는 여정
마지막으로 남는 문제는 결말입니다.
영화가 그냥 이대로 끝난다면, 그러니까 멜로드라마로서 두 남녀의 사랑이 결실을 맺는 지점에서 끝난다면 〈과거가 없는 남자〉는 정말 이상하기만 한 영화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다행히 영화는 후반부에서 기억상실의 테마로 다시 돌아옵니다.
이 ‘과거가 없는’ 남자가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그는 아내를 만납니다. 정확히는 아내의 집으로, 그러니까 과거에 그 아내와 함께 살았던 집을 방문하는 것이지요.
거기에서 그는 아내를, 정확히 말하면, 과거에 자기 아내였던 여자를 만납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만남은 그의 기억을 되찾아 주지 않습니다.
아니, 이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속기 쉽습니다.
이 가슴 저린 재회의 순간에조차 배우들은 너무도 무뚝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깜박, 문제의 그 사내가 기억을 되찾지 못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물론 그렇게만 해석하는 것도 나름의 의미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 그 사내가 어쩌면 기억을 되찾았을지도 모른다는 쪽으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과거 버리기
여기에는 두 가지 심리가 작용합니다.
하나는, 앞서 펼쳐진 멜로드라마의 흐름에 이미 마음을 빼앗긴 경우입니다.
그렇다면 그 새로운 사랑이 열매 맺기를 기대하는 심리가 되겠지요.
또 하나는, 잃어버린 그 사내의 과거에 대한 집착이나 궁금증을 버리지 못한 경우입니다.
그렇다면 옛 아내와의 재결합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심리가 될 것입니다.
어느 쪽이 더 옳으냐를 따질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영화의 태도입니다.
영화는 사내가 자기 옛 아내와 결정적으로 헤어지도록 만듭니다. 아내한테 이미 새 남자가 생겨 있음을 가차 없이 보여줌으로써요.
심지어 그 새 남자는 이 과거가 없는 남자한테 결투를 신청하기까지 합니다.
물론 영화는 그런 끔찍한 장면을 허락하지는 않습니다.
과거가 없는 남자는 아내와 새 남자의 관계를 ‘무뚝뚝하게’ 선선히 인정합니다.
영화는 이 과거가 없는 남자가 새로운 삶,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도록 이끕니다.
과거에 얽매인 채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지요.
그래서 영화는 그 문제의 과거를 없애준 것입니다. 아니, 그 남자가 스스로 자기 과거를 없앤 것이지요.
옛 아내를 만났을 때 되찾은 과거를 버리기로 결심한 그 남자의 마음이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려는 마음이었다고 표현한다면 지나치게 교훈적일까요.
그는 과거가 없는 것도, 과거를 잊은 것도 아닙니다. 다만 과거를 버렸을 뿐입니다. 이 버림의 행위가 귀하게 느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