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흑, 흑, 흑

by IndigoB

4월의 산은 온통 보물산이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서둘러 산을 탄 덕분에 망태기 안은 이미 터져나갈 듯 풍성했다. 발치마다 쑥쑥 올라온 냉이와 쑥, 향긋한 곰취와 명이는 보기만 해도 입안에 군침이 돌게 했다. 별다른 양념 없이 된장 한 숟갈에 슥슥 버무려내기만 해도, 그 쌉싸름하고 달큼한 향이 도망간 식욕을 단박에 붙잡아올 것만 같았다. 보리쌀조차 귀해 배를 곯기 일쑤인 형편이었지만, 초록빛 생기가 넘실거리는 망태기를 보고 있노라니 마음만은 곳간에 가득 쌀을 채운 부자가 부럽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이미지 생성 - Google_Nano Banana


집에 돌아오자마자 봉당마루 위에 강아지 세 마리가 픽, 엎어졌다. 제 몸뚱이보다 세 배는 됨직한 나무 짐을 지고 내려온 동생들이 허기에 지쳐 대자로 뻗어 있는 모습이었다. 어머니의 기분을 풀어드리기 위해 야산을 뛰어다녔을 녀석들의 깡마른 뒷모습이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론 우스꽝스러워 절로 웃음이 났다. 나는 동생들의 요란한 배꼽시계를 채워줄 궁리를 하며 슬금슬금 안방 동태를 살폈다.


방 한가운데 어머니가 들여놓은 밥상에 나물과 함께 푹 삶아진 푸르댕댕한 보리죽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죽이 이미 식었음에도 묘하게 윤기가 흘러 식욕을 자극했다. 아버지는 밥상에 손도 대지 않은 채 세상 근심 걱정을 혼자 짊어진 듯 벽을 보고 돌아누워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여윈 등허리에 대고 짐짓 밝은 목소리로 너스레를 떨기 시작했다.


일러스트 이미지 - Pixabay



- 아부지, 아직도 꿈나라여요? 고 제비 녀석 상처가 싹 나은 것 좀 보셔여. 그게 다 우리 아부지 은덕이 저 바다보다 넓고 깊어서 하늘이 감동한 거라니께요. 그니께 너무 상심해 허지 마셔여.


침이 마르도록 아부를 떨면서도 시선이 자꾸만 죽 그릇으로 향했다. 내 배에서도 천둥 같은 꼬르륵 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이 죽 한 그릇이면 기진맥진한 동생들의 배를 채워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앞섰다. 결국 조바심을 견디지 못하고 식어빠진 죽 그릇을 조심스레 들어 올리며 쐐기를 박듯 말했다.


- 아부지, 애들이 산에서 나무 하느라 기운이 쏙 빠졌는디, 지금 당장 안 드실 거믄 이거 쟤들 좀 먹일게요. 그래두 괜찮져?


아버지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냥 오냐, 한마디만 해주면 좋으련만 자꾸 조바심 나게 묵묵부답, 뒷모습만 보이는 아버지. 나는 슬슬 짜증이 밀려오고 마음이 답답해서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기다리던 대답 대신 고요한 방 안을 채운 것은 기묘하고 으스스한 소리였다. 마치 밤중에 도깨비가 훌쩍이는 것 같기도 하고, 낡은 문풍지 사이로 겨울바람이 새어 드는 것 같기도 한 요상한 울림이었다.


그다지 넓지도 않은 방에 그 희한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흑. 짧게 울리다 뚝하고 멈추는 소리. 거기에 맞춰 순간 내 동작이 절로 뚝 멈췄다. 흐흐흑, 꺼흑. 얼음처럼 몸이 굳어 차마 고갤 돌리지 못하고 두 눈동자만 옆으로 떼구루루 굴려 아버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새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여전히 내게서 등을 돌리고 앉아 아래로 고갤 푹 숙인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어깨를 들썩였다.

그리고 날 놀라게 한 요상한 소리가 또다시 들렸다. 흑, 흑, 흑. 그제야 난 소리의 정체를 깨달았다. 길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짧다고도 할 수 없는, 내 열두 살 생애에 들어본 것 중, 제일 이상하고 처량한 소리였다. 당황함도 잠시, 나는 어이가 없어 짐짓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미지 생성 - Google_Nano Banana


- 아이고, 아부지! 이를 어째. 그깟 보리죽 한 그릇 동생들 멕이겠다는디, 글케 아까브서 울기까지 허시는 거여요? 아부지, 지가 나중에 다시 보리죽 맛나게 끓여 드릴 테니께, 고만 좀 뚝하셔요,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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