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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 나는 파리의 비빔인간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는, 어디에도 없었던 나는

by 채박 Mar 05. 2025
채박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는, 어디에도 없었던 나는>, 2025, ©chaepark채박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는, 어디에도 없었던 나는>, 2025, ©chaepark


차가운 겨울바람이 창을 때리던 어느 늦은 밤이었다. 우연히 넷플릭스를 켰고, '흑백요리사'를 보게 되었다. 환한 조명 아래 부드러운 미소를 짓던 에드워드 리 셰프가 "저는 비빔인간입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가슴 한켠이 먹먹해졌다. 7년 전, 파리에 정착하기 위해 방황하던 내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고 그때의 두려움과 좌절감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그의 담담한 목소리에 실려 온 말이 잊고 있던 기억들을 하나둘 불러왔다. 홍콩에서 잘 다니던 직장을 스스로 그만두기로 결심했던 날, 파리 공항에 다시 첫발을 디뎠을 때의 설렘,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진 수많은 날들이 물결처럼 밀려왔다. 또 다시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했던 순간들, 선택에 대한 끝없는 물음들, 작은 성공에 가슴 벅차하던 시간들까지. 피하고 싶었던 그 시절의 기억들을 이제는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메트로를 타고 출근하며, 파리의 곳곳을 산책하는 일상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지금, 이제 겨우 파리에 안착했다고 느끼는 이 시점에서,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과연 이곳에서 얼마나 잘 어우러져 살고 있는걸까? 아침엔 베이커리에서 바게트를 사고, 저녁이면 비스트로에서 와인 한 잔을 즐기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된 지금 나는 얼마나 잘 비벼지고 있는 걸까?


특별할 것 없는 내 이야기지만, 어딘가에서 낯선 땅을 밟으며 자신만의 자리를 찾으려 애쓰는 누군가에게, 한밤중 이국의 도시에서 고독을 삼키는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길 바라 본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방식으로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비벼지고 있을테니까.


젊은 시절 한때를 파리에서 보낼 수 있는 행운이 그대에게 따라 준다면, 파리는 '움직이는 축제'처럼 평생 당신 곁에 머물 것이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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