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Darth Vader
Sep 26. 2024
죽기로 결정했다는 농담
『살고 싶다는 농담』(허지웅)를 읽고
#3. 죽기로 결정했다는 농담
흔하디 흔한 연애상담 프로그램에서 처음 본 그는 당당함과 거만함의 묘한 경계선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보이는 약간의 미소는 경청이라는 느낌보다는 평가의 느낌이 강했다. 내 속에도 있지만 차마 용기(?)를 내어 쏟아내지 못한 말과 감정을 여과 없이 쏟아내는 그에게 처음 느낀 감정은 불쾌감이었다. 나는 이유도 정확히 모른 채 거만해 보이는 사람을 싫어, 아니 정확히는 질투한다. 그는 차가워 보였고, 그가 살아온 그리고 앞으로 살 세상도 차가워 보였다. 처음엔 ‘참 나랑 다른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달라서가 아니라, 마른 체격만큼이나 너무 같아서 싫은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한편으로 그를 보고 느낀 불쾌감을 질투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 그가 달라져 있었다(적어도 내가 보기엔….). 언 듯 투병 생활을 했다고는 들었지만 크게 관심은 없었다. 그런데 투병생활을 마치고 온 그는 분명 달라져 있었다. 내가 느낀 변화는 단순히 말이 아니었다.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 말하며 보이는 작은 미소, 그런 것이었다. 그의 미소는 여전히 조금 어색해 보였지만, 차가움은 줄었고, 따뜻함이 늘어 있었다. 매일 수 백명의 메일에 일일이 답장을 한다는 모습에 놀라고 처음으로 이 사람에게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엇을 경험한 것일까? 정말 오랜만에 다른 사람의 삶에 관심이 생긴 거 같다. 그렇게 책을 펼쳤다. 그리고 친구와 대화를 하듯 책을 읽었다. 책을 읽을 때 항상 들었던 줄을 긋기 위한 펜을 놓았고, 공부하기 위해, 설교하기 위해가 아니라, 그저 이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싶어 계속 책을 넘겼다.
“도대체 무슨 경험을 한 거야?”
“그 시간이 형(?)에게 준 것이 뭐야?”
“나도 그랬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아.”
책을 읽는 내내 공감과 동의 그리고 비판과 토론도 이어졌다. 그의 글은 가볍지 않았고,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었고, 무엇보다 진솔하며, 한편으로 친절했다. 살아가기로 결심한 그날의 경험 이후 주변의 삶을 담고, 청년들이 나 같은 20대를 보내지 않게 하기 위해 썼다는 책. 이 책은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의 것은 아니었다. 답을 찾아가고 있는 여정에서 똑같이 답을 찾아 헤매는 청춘들에게 대화를 거는 책이었다.
책에 담긴 모든 내용을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모르고 있는 것을, 그래서 찾고자 하는 것을 내가 알고 있는 것도, 정확히 말하면 알아낸 것이 아니라, 주신 것도 있다. 나 역시 그가 이 책에서 인용한 고린도전서 13장 12절의 말씀대로 거울과 같이 희미하게 보는 진리이지만 말이다. 그는 책에서 투병 생활이 전처럼 절망적이지 않은 이유가 살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결정의 한계와 모순도 아는 것처럼 보였다. 그 결심이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이내 곧 못살겠다!라고 외치는 것이 나 그리고 그 사람 그리고 모든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을 사는 힘은 “살겠다”는 나의 의지가 아니라, “살게 하신다”는 은혜이며, “살게 하실 것이다”라는 소망임을 희미하게나마 알고 있다. 그가 그 고된 경험을 통해 깨달은 바가 삶을 받아들이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면 내가 고된 경험을 통해 깨달은 바는 삶을 받아들이는 것은 한편으로 나의 약함을 말로만이 아니라 진짜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분의 강함을 말로만이 아니라 진짜 의지하는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는 그는 나와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
성경이 말한 것과 같이(그리고 그가 인용한 것과 같이) 주를 대면할 때도 온전히 남아 영원할 사랑은 그날까지 역할을 하고 사라질 믿음과 소망에 비교할 수 없지만(그래서 사랑을 제일이라 말하지만) 그렇다고 믿음과 소망이 작은 것은 아니다. 살자 죽자를 반복하는 이 생에서 믿음과 소망은 온전한 사랑으로 가는 여정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이다. 그렇기에 성경 가득히 우리가 믿어야 할 바와 소망해야 할 바가 적혀 있는 것이다. 그가 그것을 진리로 여기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스스로 가장 힘들 때마다 자신을 구원해냈다고 한 바로 그 구절(고전 13:12)이 가리키는 진리가 이 사람을 참으로 구원해 주길 바란다.
그 사람과 같이 내게도 천장이 내려앉고 바닥에 뒹구는 시간이 왔었다. 천장에 맺힌 피해의식과 바닥에 깔린 현실이 짓누를 때 말이다.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작은 시련이지만 그 작은 시련도 내게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땅이 꺼지는 것 같은 절망을 주었다. 날씨가 좋던 봄날. 왜소한 체격만큼이나 왜소한 멘탈을 뒤흔들만한 말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에게 들었다. 힘들었던 경험이 오래된 것만큼이나 오랜 시간 사랑하는 이가 겪었다는 불안증과 우울증. 어렴풋이 “힘들구나”라고 생각만 했던 것을 의사에게 직접 확인하니 여러 가지 감정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도대체 내가 그동안 이 사람에게 얼마나 가혹했던 것인가?’라는 자책과 ‘사랑하는 이에게 내가 무엇을 해줘야 하지?’ ‘또 어떻게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가야 하지?’라는 막막함이 몰려올 때 가슴에는 이제 6개월이 막 지난 연약한 아들이 매달려 있었고, 힘들지만 내색을 하지 않으려는 사랑하는 이가 옆에 앉아 있었다. 앉은 버스에서 들키는 것이 창피하여 창문을 보고 하염없이 울었다. 그 눈물은 한편으로 자책의 눈물이었으며, 한편으로 자기 연민의 눈물이었다. 내 사랑하는 사람이 가엾고, 동시에 그런 내가 가여웠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통해 느꼈을 거절감에 대한 미안함의 눈물이었고, 이런 상황에서도 버스에 앉아 있는 내 신세에 대한 연민의 눈물이었다. 그 눈물은 한편으로는 나를 향한 분노였으며, 한편으로는 이 상황의 주인인 분을 향한 원망이었다. 사랑하는 이에게 “괜찮아.”라고 계속 말하며 달래주려 했지만, 괜찮지 않았다. 그리고 괜찮지 않은 내 맘은 그 어떤 말로도 달래질 거 같지 않았다. 그렇게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눈물을 쏟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무기력함과 자기 연민을 지나고 그날 내가 한 결심은 “살아야겠다”가 아니다. “누군가에 대해 안다고 자신하지 말자”였다. “언제든 정답을 줄 수 있다고 자신하지 말자”였다. 이 말이 내가 아는 정답을 버리겠다는 말도 아니고, 그 정답이 정답이 아니라는 말도 아니다. “나는 다 알아”라는 한 편의 폭력을 멈추자는 것이었으며, 그래서 “나는 모를 수 있다.”는 것을 마음 저변에 까는 것이었다. 한편으로 그날 내가 한 결심은 “살자”가 아니라, “죽자”였다. 그날의 변화는 주신 소명의 특성상 정답을 기대하고 찾아오는 사람을 계속 보아야 하는 나에게 완전히 새로운 마음을 주었다. 더 듣게 되었고(여전히 힘들지만), 섣부르게 진단하지 않게 되었다(이것도 여전히 힘들지만). 함께 고민하게 되었고, 그저 인사가 아니라 진심으로 “같이 기도하자.”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상황의 주인을 더 바라보게 되었다. 내가 가졌다 하는 모든 것이 선물임을 더 누리게 되었고, 살자, 죽자를 반복하는 이 고된 여정이 은혜의 여정임을 깨닫게 되었다.
"여러분의 고통에 관해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고통이란 계량화되지 않고 비교할 수 없으며 천 명에게 천 가지의 천장과 바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기로 결정하라고 말하고 싶다. 만약 당신이 살기로 결정한다면, 천장과 바닥 사이의 삶을 감당하고 살아내기로 결정한다면, 더 이상 천장에 맺힌 피해의식과 바닥에 깔린 현실이 전과 같은 무게로 당신을 짓누르거나 얼굴을 짓이기지 않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다. 적어도 전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는 않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다. 허지웅 『살고 싶다는 농담』
천장이 내려앉고, 바닥이 꺼지는 경험을 통해 내린 결론은 반대지만, 비슷한 변화, 사람들을 향해 더욱이 열린 마음을 갖게 된 친구를 만난 건 행복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