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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 Jun 06. 2024

#9. 우리, 셋째 가질까?

꿈속에라도 만나러 와주겠니?

둘째는 또래보다 매우 작고,

성장곡선 1% 그래프에서도 한참 밑에 머물렀지만,

느려도 자신만의 속도대로 건강하게 자라주었다.

자랄수록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아이가 내 아이라니!


하루하루 행복한 마음이 커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하루하루 마음속 숨겨 놓은

허망한 구멍도 점점 짙어져 갔다.


     ‘달콩이가 함께였다면 더 좋았을 텐데.’

     ‘달콩이도 이렇게 예뻤겠지?’

     ‘일란성 쌍둥이니까.

      둘은 판박이처럼 똑같이 생겼을 테니까.

      눈코입 모두 이렇게 생겼겠지?’


둘째가 혼자 누워 있거나 앉아있을 때, 울고 웃는 모든 모습에서 달콩이가 보였고,

그 그리움이 점차 커져 둘째를 바라보기만 해도 눈물이 흐르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아마 그즈음에 둘째는 엄마의 웃는 미소보다 울고 있는 슬픈 눈을 더 많이 바라봤을지도.


그 어떤 것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공허하고 외롭고 아픈 마음이 지속되던 때,

조심스럽게 신랑에게 말했다.


     “여보. 우리, 셋째 가질까?”


신랑은 놀라면서 걱정되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난 자기가 원하면 그렇게 할 수 있어. 근데 괜찮겠어?”

      “뭐가?”

      “자기 너무 힘들어하고 있잖아.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어하는데 셋째 가지는 거 괜찮겠냐고.”

       

        “.....”     





사실 그 당시 나의 몸은 매우 좋지 않았다.

임신 기간 운동이란 건 하지 못했고, 출산하고 나서도 제대로 된 산후조리를 하지 못했다.

그냥 나를 위한 모든 것이 사치처럼 느껴지던 때였다.

체력의 기본 바탕은 건강한 정신이어야 했는데, 가장 중요한 그 정신이 온전하지 못했기에

산후우울증의 늪으로 끊임없이 빠져들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나의 정신도, 마음도, 육체적인 힘도 없어질 즈음.

첫째 딸의 사(4살) 춘기가 시작되었다.


4살이 된 첫째는 이제 갓 100일이 된 둘째보다 더 자주 깼다.  밤에 잠을 자다가 잠시라도 내가 몸에 붙어있지 않으면 일어나서 나에게 왔다. 겨우 몸을 때어놓고 둘째 수유를 위해 자리를 옮겨 누우면 어김없이 나를 찾아왔다. 꿀을 찾아 윙윙대는 꿀벌처럼 나를 쫓아왔다.

내 몸에 꿀이 발려있는 것이 분명했다.


둘째가 배고프다고 새벽에 ‘응애’하고 울며 깨면,

첫째는 ‘으아아악앙앙앙’ 하며 소리를 지르며 울며 깼다.

밤 기저귀를 뗐음에도 불구하고 밤에 실수하는 일도 잦아졌고, 잠도 편하게 들지 못했다.

자러 가는 시간은 12시를 넘기기 일쑤였고,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으며,

늦은 등원으로 어린이집 문 앞에서 들어가지 않겠다고 떼쓰는 시간도 길어졌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당시 첫째는 야경증을 앓고 있었던 것 같다. 야경증의 원인 중에는 정서적 불안, 스트레스, 수면 부족 등이라고 한다.

그렇게 첫째는 본인이 가지고 있는 모든 불안과 스트레스를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주변을 돌아볼 힘이 없었던 나는.

    이미 에너지가 고갈된 나는.


그저 딸이 ‘미운 네 살’ ‘사(4살) 춘기’

그 예민함이 멈출 줄 모르고 폭주하는 기차처럼 보일 뿐이었다.     




내가 힘들었던 그 시간 속에서의 딸의 힘듦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한 번도 엄마와 떨어져서 잠을 잔 적이 없었던 딸은

달콩이의 심장이 멈춰버렸던 그때, 처음으로 엄마와 떨어져서 지내게 되었다.

하룻밤도 아닌 일주일이 넘는 시간을 그저 엄마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다는 슬픈 소식만 접한 채,

고스란히 자신의 외로움과 불안과 걱정을 견뎌냈다.

 

그리고 동생이 태어난 날.

동생이 태어난다는 기쁜 소식을 듣고 기분 좋게 하룻밤을 할머니와 보낸 다음 날.

외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친정 부모님, 바로 옆에 사는 언니 모두 장례식장으로 가게 되어 딸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네 언니 집에서 잠을 자게 되었었다.

제왕절개로 아이들을 출산하게 되었고, 나의 몸이 좋지 않아 밤새 돌봄이 필요한 상황이라 신랑이 딸에게 갈 수 없었고, 딸을 봐줄 가족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후에도 친정 부모님은 외할머니의 장례절차로 지방에 며칠 더 머물러야 하셔서, 딸은 본인이 사랑하는 따뜻한 우리 집이 아닌 이모의 집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엄마 껌딱지에 예민함을 가지고 있던 나의 딸은 힘든 내색 한번 하지 않은 채 그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모두


      “누나가 되더니 딸이 많이 큰 것 같아.”

      “엄마 아빠가 없어도 잘 지내고 있으니 너무 대견하다.”


라며 칭찬을 해주었고,


딸 역시 어깨를 으쓱해하며 큰 누나가 된 것처럼

   

     “나 엄마 없어도 하나도 안 무서웠어!

      나 진짜 대단하지!”


라며 우리 모두를 안심시켰다.


그랬었다.

모두의 걱정을 감싸 안았던 그런 딸이었다.

아니, 그런 줄 알았었다.


엄마와 아빠, 동생이 모두 집으로 와서 안정을 찾아갈 즈음.

딸의 감춰두었던 불안은 조용하다 터지는 폭죽처럼 다채로운 색과 모양을 내보이며 팡팡 터졌다.  

그저 그때까지 아무도 몰랐을 뿐이었다.      





산후우울증의 보이지 않은 무거운 그림자가 몸에 덕지덕지 붙어 빠져나오지 못하는 늪으로 끝없이 끌어당기고, 딸의 사(4살) 춘기는 내 머리에 엉겨 붙여 끝없이 위로 잡아당길 때.


나의 감정 버튼은 그대로 멈춰버렸다.


아이들에게 사랑표현을 해주다가, 울다가, 재미있게 놀아주다가, 화를 내다가.

오락가락 예측 불가의 상태로, 나도 내가 어떤 감정인지 모르는 상태로 하루를 보내다 보면 죄책감이 들었다.


      ‘고작 아이 두 명 가지고도 이렇게 힘든데.

       쌍둥이었다면 얼마나 더 힘들었겠어.

       그래.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엄마라서.

       그래서.

       달콩이가 떠났나 봐.

       그런 거였나 봐.’


그렇게 또다시 자책이라는 수많은 송곳을 내 마음에 찔러대길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달콩이를 만나고 싶은 욕심에

셋째를 바라는 마음이라니.


이보다 더 이기적인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달콩이를 떠나보냈지만, 떠나보낼 수 없었기에 늘 달콩이를 그리워했다.

달콩이가 다시 찾아와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수만 있다면 이 모든 힘듦, 아니 이보다 고통이 있더라도 견딜 수 있을 텐데.

그렇게 셋째를, 아니 달콩이를 만나길 바랐었다.                     


신랑에게 울면서 내 마음을 토해냈다.


      “나도 알아.

       내가 체력적으로 힘든 거 모두 아는데.

       그래도 우리 셋째 가지면 안 될까?

       달콩이가 와줄 수 있잖아.

       그럼 나 힘든 거 다 견딜 수 있어.

       진짜야. 진짜라니까."

  



사실 알고 있었다.

셋째를 가진다 하더라도,

아기 천사가 다시 나에게 찾아온다 하더라도

그 아기는 달콩이가 될 수 없음을.

나의 욕심이었음을.


그렇게 셋째에 대한 바람도 내 마음에 묻어두었다.


그저 지금 잘 자라고 있는 알콩이가 달콩이의 몫까지

건강하고, 즐겁고, 행복한 삶을 오랫동안 누릴 있기를.


그러기를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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