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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표 쓴 이선생 Apr 23. 2024

실패와 시행착오가 필요한 아이들

<졸업생들에게 쓰는 편지> 1장

지금 돌아보면 익숙해진 보고서 작성이나 학생회장 활동까지도 실패에 대한 걱정으로 선뜻 시작하지 못한 적도 있었지만 모든 성장과 발전은 실패 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 실패는 두려운 것이 아니라 성장의 기회라는 걸 배울 수 있었습니다. (중략) 앞으로의 대학생활에서도 선생님이 주신 이 가르침을 그대로 가져가려고 합니다. 바로 대학교에서의 시간을 저의 꿈을 확장시키고 더 다가가기 위해 계속해서 부딪히고 실패하는 데 사용하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남 다르게 성장한 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 졸업생의 편지 中



2020년 6월 3일, '오프라인 개학일'이라는 괴상한 용어의 학사일정 당일이 되자 내가 맡은 1학년 학생들의 등교가 시작되었다. 오전에는 기숙사 방을 배정한 후 담임선생님과 만남 시간을 가졌고 오후에는 1학년 전교생을 시청각실로 모이게 하여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했다. 매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오리엔테이션 시간을 마련하여 학년에서 준비한 교육활동을 설명하고 해당 학기에 무엇을 중점적으로 노력해야 할지 알려주었다. 학교생활에 대한 예측 가능성을 높여 학생들의 불안감을 줄이는 것이 목표였다. 시청각실에 모인 앳된 표정의 아이들을 바라보며 학년 교육활동의 기본 방침을 소개했다. 아래는 당시 활용했던 프레젠테이션 자료의 일부다.



학년 교육활동의 첫 번째 방침으로 "성인이 되기 위한 독립의 과정으로써 선택과 책임, 실패와 시행착오의 경험"을 강조했다. 나는 성인이 다는 것을 "자신의 가치 판단에 의해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무엇이 나와 세상에 유용한 것인지에 관한 가치 판단은 경험과 비교에 의해 성숙해질 수 있는데, 이를 위한 훈련 과정이 10대 시절에 꼼꼼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오리엔테이션에서 스스로 선택하고 실패와 시행착오의 경험을 많이 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학생들이 이 말을 얼마나 수용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지만, 누군가는 알아줄 거라는 마음도 있었다. 서두에 소개했던 편지에 이 졸업생은 "실패는 두려운 것이 아니라 성장의 기회라는 걸 배울 수 있었다"라고 적었다. 오리엔테이션 이후 2년 반 만에 답장을 받은 기분이었다.


고려대 한국어 대사전은 실패를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거나 뜻한 대로 되지 않고 그르침"으로 설명한다. 시행착오는 "학습자가 어떤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여러 가지를 실행하고 실패를 되풀이하는 "이라고 풀이한. 두 단어의 뜻을 종합해 보면 "어떤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 우리는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때가 많지만, 이 과정의 반복을 통해 실패를 줄이고 성장하게 되면서 목표에 가까워진다"는 의미를 얻는다. 여기에 중요한 교육적 시사점이 있다. 첫째, 시도하지 않으면 실패하지 않지만 성장도 없다. 둘째, 실패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학교 현장에서 지켜본 학생들은 실패와 시행착오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하며 아이들은 무언가를 시도한다. 보통 한 달 이내 단기간의 노력이다. 노력했으니, 보답이 오기를 기다린다.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왔을 때 실망한다. 실망감이 커 같은 노력을 반복하려 하지 않는다. 마치 점심시간에 축구하자는 제안을 받고 뛴 경기를 패배하자 다시는 축구를 안 하겠다는 마음가짐 같달까. 특히 학년이 올라갈수록 실패를 예상하고 시도하지 않는 학생들이 많아지는 경향이 보였다.


이러한 경향을 문제 상황으로 인식하게 된 뒤로 "학교는 실패와 시행착오가 충분히 허용되는 공간인가?"라는 질문던지곤 했다. 학교 내신 성적이 입시에서 결정적인 요소로 자리 잡게 된 후, 1학년 1학기 중간고사부터 3학년 1학기 기말고사까지 매 시험 기간 학교는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인다. 내신 성적은 상대평가이므로 나름으로 열심히 공부했다고 하더라도 더 열심히 한 친구들이 많다면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기 힘들다. 상위 5퍼센트에서 11퍼센트까지 2등급의 성적을 얻게 되는데, 1등급 못 받은 걸 아쉬워하는 학생들이 다수일 거다. 3등급은 2등급을, 4등급은 3등급을 그리워한다. 다들 열심히 하니 '죽도록 열심히 해도' 성적이 오를지 알 수 없는 과열 경쟁이 지속된다. 결과에 만족하는 소수와 불만족한 다수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3학년 1학기까지 치르는 열 번의 시험은 다수의 학생에게 성장의 밑거름이 아니라 입시 성패의 예측 요인으로만 기능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시험은 결과일 뿐, 과정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내신에 방해가 될 수 있활동에는 참여하지 않는 아이들, 내신 공부는 하지 않고 일찌감치 수능 공부에만 매진하는 아이들 모두가 이해될 수밖에 없다.


수업과 평가를 계획하는 교사들도 실패와 시행착오를 염두에 두지 않을 때가 많다. 중간고사를 못 본 학생들이 많다면 시험을 더 잘 보기 위해 어떻게 노력해야 할지 알려주기보다 기말고사를 쉽게 출제하는 것으로 간단히 문제를 해결한다. 입시와 직결된 문제이기에 시험의 공정한 출제와 적절한 변별이 평가의 환류(feedback)보다 더 중요해져 버렸다. 교사 개개인이 흡사 수능 출제자가 된 것처럼 출제 오류는 없는지에 더 신경 쓴다. 시행착오 과정을 더 세밀하게 파악하여 피드백을 제공할 수 있는 수행평가도 마찬가지다. 결과를 수용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성장을 위한 시행착오가 작동할 수 있는데 수행평가 역시 학기 말 성적에 포함되기 때문에 결과에 민감하다. 평가의 수준을 매우 낮춰 거의 모든 학생에게 만점을 주는 경우도 있다. 내가 세운 평가 기준에 따라 부족함이 없다고 채점했으니, 피드백도 없다. 100점을 받은 20명이 부족함은 없을지라도 각자 더 나은 수행 역량을 갖추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지 고민해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100점이면 성공한 거라 여기고 그냥 넘어간다. 상한선을 정해 놓고 굳이 더 안 해도 된다는 인식이 개별적인 성장 기회를 가로막는다.


실패와 시행착오는 자기가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20대가 되어도, 30대가 되어도 내가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는 경우가 다반사다. 부모나 주변 어른들의 욕망이 아니라 나의 바람대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려면 실패를 맛보면서 나의 이상과 현실이 어느 수준인지 알아보고 조정해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학교는 결과로써의 성적에만 집중하는 공간이 되어 실패가 배움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인류가 축적한 인간의 모든 경험에 성공보다 실패가 훨씬 더 많다는 점은 자명하다.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실패의 역사가 인류 진보의 토대가 된 것처럼, 실패한 역사로 아이들의 미래를 예단하지 말아야 한다. 아이들에게 실패의 역사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물어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내린 결론은 지금 당장 입시 제도를 뜯어고칠 수 없다면, 실패와 시행착오가 교육 효과를 얻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필평가나 수행평가가 실패와 시행착오의 경험을 제공해 줄 수 없다면, 성적과 연결되지 않는 교육활동을 마련해야 했다. 학교 성적이 측정할 수 없는 역량과 잠재력키우위해 여러 교육프로그램이 존재하고, 그 교육프로그램들이 성적만큼 중요한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도 중요했다.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여 무엇에 참여하고 집중할지 아이들 스스로 선택하게 했. 매주 월요일 1시간짜리 자유 주제 포럼에서 아이들은 100명 앞에서 소통하고 경청해 보는 경험을 쌓아 나갔다. '예술&논술 프로젝트'에서는 스스로 글을 작성하며 예술 작품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관점을 어떻게 확장할 수 있을지 고민보았다. 'After You Recommendation'을 통해서는 타인의 장점과 칭찬거리를 찾고 추천 글을 작성하며 이타심을 발휘해 보기도 했다. '학술적 글쓰기 프로젝트'에서는 의 지식과 의 지식을 구별하는 법, 가치 있는 주제와 타당한 문제의식을 발견하고 탐구하는 법을 스스로 깨달아 갔다. 처음엔 어설펐지만, 조금씩 익숙해지며 나아지는 모습이 보였다. 수업에서 특징을 찾을 수 없었던 아이들이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성적 외에도 우수성이 발견될 수 있다는 점이 반가웠. 시간이 허락하는 한 어떠한 형태로든 피드백을 주고자 . 성적과 관계가 없으니 비판적 조언이 더 깊이 수용될 수 있었고, 보완할 점이 무엇인지 먼저 물어보는 학생들도 생겨났다. 3학년 때는 '난제 풀이 프로젝트'라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프로젝트를 구상하기도 했다. 8정도가 자발적으로 도전했는데, 결과 보고서를 제출한 학생 중 아무도 타당한 결론을 도출해 내지는 못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민의 과정에서 스스로 배운 게 있다면 이 프로젝트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었기에 도전 그 자체가 더 중요했다. 전국의 많은 교사들이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각자의 방식으로 노력하고 있는 것처럼, 나도 실패와 시행착오의 경험이 배움으로 이어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매일 야근해야 할 정도로 힘에 부칠 때도 있었지만, 교육에 관한 나의 믿음을 실현하는 일이었던 만큼 즐거웠던 적도 많았다.



서두의 편지를 건넨 졸업생은 내가 지금껏 만난 최고의 학생회장이었다. 학생회장이라는 권위에 기대지 않고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 후배들로부터 신망이 높았다는 점에서 배울 점이 많은 아이였다. 여러 활동에 최선을 다해 참여했기에 시행착오의 수준도 높았을 거라 짐작한다. 그 덕분인지 확신할 순 없지만, 적으로 큰 성장을 보인 학생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엄격한 교사 역할에 충실히 하고자 1, 2학년 시절 내가 담임선생님이었음에도 칭찬을 많이 못 해준 것이 마음 한편에 남는다. 졸업한 지 1년이 지났지만, 이 글에서라도 마음껏 칭찬해 주고 싶다.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다는 네 진심을 너무나 잘 알고 그 나이에 흔치 않은 매너와 이타심을 늘 칭찬하고 있었다고. 1학년 시절 '침묵의 봄'을 읽고 쓴 북리포트에 대해 균형감을 잃었다 나의 냉정한 피드백을 잘 수용해 주어서 고맙다고. 대학 생활을 계속해서 부딪히고 실패하는 데 사용하겠다는 편지를 써 주어서 감동했다고.


3년 실패와 시행착오의 중요성을 가르쳤던 제자들이 학교를 졸업한 지 1년이 훌쩍 넘었다. 벌써 20대의 막막함을 느끼기 시작한 건 아닌지, 자신의 현재를 의심하고 있는 건 아닌지 약간 걱정이 된다. 인간은 진화의 관점에서 걱정을 달고 살 수밖에 없는 존재다. 나 또한 그렇다. 그러니 나의 제자들이 무언가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면 조금만 걱정하고, 되든 안 되든 도전하고, 실패와 시행착오를 두려워하지 않마음가짐 유지하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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