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aglecs Aug 02. 2024

무더위 속 단상(斷想)




 오늘따라 더 발악하듯 맹위를 떨치는 극악의 한 여름 더위로 이미 15층 아파트 거실의 온도는 30도이다. 겨우 오전 9시인데도 방안이나 거실이나 온 집안이 찜통이다. 건너방 이중창틀에 죽어서 말라비틀어져있는 이름 모를 날벌레는 분명히 거실창을 통과하면서 그 열기가 증폭된 태양 빛에 타 죽었음이 틀림없다. 처음엔 멋도 모르고 따뜻한 태양빛을 즐기면서 한가롭게 창틀에서 노닐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어느새 잔인하고 능글맞은 열기에 온 몸이 노곤해져서 정신을 잃었으리라. 그 날벌레의 검은색 날개와 몸체는 뭔가에 짓눌린듯이 35도 정도 꺽여 있었는데 어쩌면 그 벌레가 온 몸이 검은색이라서 태양빛을 너무 과도하게 흡수하였고 그 열기가 벌레를 몸 속에서부터 서서히 말려 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천천히 수분이 제거되면서 벌레의 몸체는 더 이상 온전한 형태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이내 한쪽 방향으로 꺽여 버렸을 것이다. 죽기 전에 몸이 뒤틀려 꺽이는 고통을 느끼지는 않았을테니 벌레에겐 다행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이대로는 나도 몸 속에서부터 수분이 증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검은색 벌레처럼 고꾸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벌써 2주 정도 계속되는 더위라서 이제는 몸에 익을만도 한데 점점 더위가 절정에 도달해 가면서 나의 인내심도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멍하니 쇼파에 앉아 있다가 마침 은행에 볼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옷을 챙겨입기 위해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면 나도 그 애처로운 벌레처럼 몸 속에서부터 말려졌을지도 모른다. 무말랭이처럼 수분을 다 빼앗기고 몸체가 뒤틀려진채 퍼석퍼석한 낙엽과 다를 바 없이 바싹 말려지기 전에 생각만 해도 시원한 은행으로 가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오늘 우리는 이상 의미가 없어진 청약저축통장을 해지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아내 명의로 내가 불입해 놓은 것인데 명의자가 아내이기 때문에 반드시 아내가 직접 와야 한다는 은행의 어거지 때문에 교사인 아내가 방학을 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방학을 하고 몇 일 볼 일을 보고 이제야 겨우 집에 있게 된 아내를 앞세워서 은행으로 향했다. 은행의 내부 규정에 따른 것이긴 하겠지만 청약 통장을 개설할 때는 남편이 개설하는 것은 마음대로 허용해 주더니 막상 해지를 하겠다고 하니 반드시 본인이 와야 한단다. 관공서의 경우 어지간한 서류도 위임장을 작성해서 가져오면 대신 발급을 주는데 금융 기관의 주택청약통장은 위임장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했다. 두어달 전에 방문했을 은행 직원이 어떤 이유 때문이라고 설명을 주긴 했지만 나로써는 도통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건 오롯이 사정이기 때문에 아내와 다시 방문하기로 한 것이다. 


 시원하게 에어컨을 켜고 자가용으로 이동해서 은행 뒷 편에 있는 공용주차장에 주차한 후에 은행으로 빨리 발걸음을 옮겼다. 주차장에서 은행까지는 불과 50미터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거리였지만 그 잠깐 동안 내 머리통위에 쏟아지는 작열하는 태양빛은 내 피를 빨기 위하여 달려드는 모기때 군단 만큼 성가셨다. 모기때는 손을 휘휘저어서 잠시라도 쫓아버릴 수가 있지만 태양빛은 어떻게 해도 완전히 피할 도리가 없었다. 모기는 기껏해야 요리조리 내 손의 허우적거림을 피하면서 내 몸 두 세 군데에 가느다란 주둥이를 꽂는 정도로 날 괴롭히지만 태양빛은 내 온 몸에 뻘겋게 가열한 탐침기를 뭉텅이채 그야말로 한 방에 꽂았다. 옷으로 가려진 부분도 태양빛의 강렬한 열기는 그 옷은 물론 피부까지 광속으로 뚫고 내 몸의 안쪽까지 기어이 비집고 들어왔다. 그런 무시무시한 태양빛을 계속 받아낸다면 내 몸은 그런 식으로 이중창틀에서 '말려져서 죽은' 그 벌레처럼 서서히 말려질 참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은행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할 수 밖에 없었다. 


 은행 안은 이미 많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그들도 온 몸이 말려지기 전에 서둘러서 도착했음이 틀림없다. 그런데 사실을 말하자면 나보다 먼저온 분들은 이미 몸이 상당 부분 태양빛에 충분히 말려진 상태였다. 언제부터인가 은행 창구를 찾는 사람들 중에서 젊은 사람을 찾기가 너무 어려워진 것이다. 은행은 이미 온 몸이 말려질대로 말려진 노인들의 피난처였다. 다들 인터넷 뱅킹을 하고 주요 투자도 휴대폰으로 주식을 한다던지 하기 때문에 일반 시중은행을 찾는 젊은이가 드물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같은 평일에는 일을 나가야 하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이 은행에 올 일이 더 적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은행안에서 이미 창구에 자리를 잡고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은 전부 오랜 세월 태양빛을 받아서 이미 온 몸이 말려진 어르신들 밖에는 없었다. 대기석에 앉아있는 10여명 남짓한 사람들 중에서 외형상 나보다 젊어 보이는 사람은 나의 아내를 제외하고는 단 한 명 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한 눈에 봐도 노인이라고 인식할 수 밖에 없는 분들 뿐이었다. 그 시원한 은행은 그렇게 메마른 생명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의례 그렇듯이 어르신들은 많은 연세를 잡순 덕분에 말도 느렸고 직원들이 건네는 말도 잘 알아 듣지 못하여 한분 한분이 볼 일를 마치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물론 그 덕분에 가차없는 태양빛 때문에 몸 속 수분이 말라가던 나는 충분한 냉기를 몸에 쏘일 수 있었다. 어쩌면 그 어르신들도 이젠 더 이상 태양에 말려지기 싫어서 은행 업무를 천천히 봤을지도 모르겠다. 일을 끝내고 밖에 나가봐야 딱히 급한 일도 없다면 굳이 서둘러서 볼 일을 마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은행 내부의 공기는 약간 시원한 냉기를 품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쾌적했다. 그래서인지 그 누구 보다도 느긋하게 일을 보는 그분들의 구부러진 등을 가끔씩 고개를 돌려서 쳐다보면서 대기하던 나는 길어진 기다림에 대한 조바심이나 불편을 거의 느낄 수가 없었다. 이런 기다림은 나에게도 대환영이다. 


 이렇게 이날 은행에 방문한 대부분의 노인들은 몸에 수분이 별로 없었다. 나이가 들어도 평소에 잘 챙겨 먹는 사람들은 기름기가 줄줄 흐를텐데 오늘 나의 은행 방문 시간에 그 공간을 함께 나눈 그 분들은 약속이나 한듯이 하나같이 무말랭이처럼 몸이 비틀어져있었다. 그리고 주변의 습기를 순식간에 흡수해 버릴 것만 같이 건조해 보이는 창백한 피부를 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의 통장 잔고도 바짝 말라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딱 한사람만 빼고 말이다. 그 노인은 어디에 쓰려는지 모르지만 몇 천 달러를 환전한 후에 대기실 의자에 앉아서 씩씩하게 빳빳한 지폐를 세고 있었다. 차림새를 보니 여행을 가기 위한 준비로 보였다. 다른 이들과 달리 체구도 건장했고 살집도 꽤 있었다. 손에 달러를 잔뜩 쥐고 있어서인지 온 몸의 땀구멍에서 버터가 흘러나온 것처럼 기름기도 제법 보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그 어르신'은 아직 태양 빛은 물론 세월로부터도 몸의 수분을 많이 빼앗기지 않아 보였다. 뚫어지게 달러를 쳐다 보면서 신중하게 몇 개의 봉투에 돈을 나눠서 담는 그의 모습은 왠지 활기차 보였다. 이분 이라면 이런 가혹한 무더위에 다시 밖으로 나가도 쉽게 고꾸라지지 않을 것만 같은 견고한 힘이 느껴졌다. 돈의 힘인 모양이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거실의 온도는 여전히 30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태양 빛을 가리기 위하여 블라인드를 쳐 놨기 때문에 더 올라가진 않은 모양이다. 그 검은 날벌레가 숨을 거둔 건너방에 가서 온도계를 확인해 보니 30.5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방에도 역시 블라인드를 쳐 놨지만 거실보다 좁은 공간이라서 미세하게 더 뜨거운 열기가 방안의 온 대기에 퍼져있었다. 몸이 꺽인채 방치된 검은색 날벌레는 여전히 애처로운 모습으로 여전히 고통을 모른채 창틀에 끼어있었다. 내가 그 사체를 치울 생각이 별로 없기 때문에 아마 거기에서 자연의 기운을 오랜 기간 받으면 그 벌레는 천천히 없어질 것이다. 아마 몇 주가 지나면 언제 있었냐는 듯이 완전히 이중창틀에서 자취를 감출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그 벌레를 참혹하게 죽인 태양빛도 열기를 잃어가고 있을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