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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하는 존경하는 아버지 조영동 화백

by Siesta


1933년 한국이 일제 지배하에 있던 시절 나의 아버지 조영동 작가는 생골이라는 40명 남짓한 인구의 작은 충청북도의 한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조영동 성신여대 근무 시절 1995

한국이 어떤 모습으로 있었던 시대인지 잘 알 수는 없지만 그 시대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유복한 집안의 사람들이었거나 아마 일본 등에서 태어난 사람들 동경 유학의 기회가 있었던 귀족 집안 같은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집안은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는 집안이었다.


한양 조 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아버지는 위로 큰형님과 남동생 그리고 여동생이 셋 있었다.


나의 고모들 아버지의 여동생들은 특히 아버지를 속이 깊고 다정하고 감수성이 예민하고 똑똑한 오빠로 기억하는데 그때 아버지는 여동생들에게 여자도 꼭 글을 배우고 공부를 해야 한다고 등록금을 내주시곤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모든 면에서 보통 사람들과 아니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과 다른 생각으로 세상을 사신 분이다.


남성 우월 시대에 여동생을 보살피고, 아무도 알아볼 수 없다는 추상을 하시고 딸들에게 못 박고 톱 쓸 수 있는 여자들이 되라고 하셨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항상 많은 생각에 잠겨 있거나 슬픈 얼굴 아니면 술에 많이 취해 있는 얼굴들이 생각난다. 모든 진정한 예술가가 그렇듯이 아버지는 세상을 이해하지도 또 세상과 타협하지도 못하셨다.


그냥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는 화가셨다.

조영동 성신여대 근무 시절 1995

예술보다 예술의 비즈니스가 예술이 되고 예술혼과 철학보다는 돈이 위대한 사회에 아버지가 그림을 그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항상 우리 네 자매의 건강과 교육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시고 작가로서 많은 부분을 포기하신 것에 대해 지금 너무 감사드리고 아버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뿐이다.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던 그의 어린 시절에 감수성이 예민하고 사람들과의 교류를 별로 좋아하지 않던 그는 그림 그리는 일에 몰두했다고 한다.


어려서 소를 몰고 나갔다가 하늘을 보고 누워 구름이 모였다 흩어지는 것들을 보고 그것을 연필로 그리고 했다는데 바로 이것이 그의 추상 세계의 자연과의 만남의 첫 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점” 시리즈에서 보이는 점들의 모임과 흩어짐의 영감이 시작된 시기 일 수도 있다.


자신을 유일하게 이해했다는 자신의 외할머니가 소를 몰고 돌아와 저녁을 먹으라고 불던 풀피리 소리가 귀에 선과 선이 되어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는 그때 그의 세상과의 추상적 교류가 시작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이 피리 소리가 만들어 낸 것들이 그의 “선” 시리즈 일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때 배가 고파서 허기져서 집으로 돌아오면 이 외할머니가 퍼준 매실주의 찌꺼기와 매실 2알에 얼추 취해 바라본 들녘의 붉은 색깔들이 하늘의 파란 색깔들이 그의 내면세계의 추상의 문을 열고 있었을 수도 있다.

선, 1974

하루 종일 봄볕에 호미로 어머니와 함께 밭을 갈던 일을 회상하면서 그렸다는 그의 “토양” 시리즈에서 그가 땅을 통해 교감했던 그의 추상 세계의 시작이 어디였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던 무서운 일들 일제의 강제 점검과 한국 국민들의 불평등한 차별 가난과 굶주림 인권의 박탈… 그리고 섬세하고 민감한 작가의 내면의 아름답고 완벽한 세계에 대한 동경이 만나 그의 무섭도록 아름다운 색깔과 형태의 추상을 만들어 냈을 수도 있다.


일제 세대를 지나 6,25라는 전쟁사를 겪은 한국에서 작가 조영동은 인간의 가장 잔인하고 추악한 면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는 천주교에 완전히 귀화한다

율동, 천지창조 1992

80년 서울 국립 현대 박물관에서 매입한 공상 시리즈는 그 이후로 나오는 종교적 색채의 시작을 암시하는 고요의 상태와도 같다.


스크린의 종료 상태와도 같은 이 공상 시리즈를 계기로 아버지 조영동 화가의 그림은 종교적인 테마로 접어든다.


너무나 예민한 그의 예술적 감수성에 대한민국 사회에 일어나고 있었던 독재, 광주항쟁, 고문 경찰 사건… 등을 겪은 70년대 80년대… 이렇게 공상 시리즈들이 막을 내리고 90년대에 쏟아져 나오는 밝은 색채와 거의 광기에 달하는 긁기는 대한민국이 드디어 진정한 민주주의에 돌입하는 기간과 일치한다.

그렇지만 서울대 조소과를 나와 아버지의 가장 친밀한 정신적 매니저였던 둘째 언니가 갑자기 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아버지는 개인전 활동을 모두 접으시고 우울한 개인적 현실을 표현하신다.


이 시대에 집착적으로 그린 “ 순교자의 얼굴, 예수의 얼굴” 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인간의 얼굴을 반 추상으로 그린 것으로 아직 세상에 전혀 보이지 않은 상태로 그의 마지막 작업실인 저택에 쌓여 있다.

언니의 죽음으로 아버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과 절망 인간의 한계를 경험함으로 거의 세상과의 교류를 접는다.


이렇게 방에 틀어밖혀 그려낸“ 순교자의 얼굴, 예수의 얼굴”시리즈는 고통받는 얼굴을 반추상으로 그려낸 얼굴들로 그의 내면에 항상 존재하고 있었던 분노, 고통, 두려움, 인간의 한계… 등을 너무나 잘 말해주는 작품들이다.


독일심리분석가 친구인 “Dorothea Dress”(KOELN) 은 그의 작품을 모두 관찰 한 후에 “사실 그의 아름다운 추상 작품 내면 그의 심리상태 속에 항상 존재하고 있었던 이 무시무시한 얼굴들이 그의 노년에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가 자신의 작품을 현실에 대한 과장된 자각, 착시하고 명한 것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된다.” 라고 분석했다.


전쟁에 대한 공포, 배고품에 대한 절망, 인격말살에 대한 분노들을 겪고 쏫아낸 무섭도록 아름다운 그의 추상 색채 속에 항상 숨어있던 인간한계의 공포의 얼굴들이 언니의 죽음으로 추상속에 떠올라 구상으로 얼굴이 되어 나온 것이라고 이 독일 심리분석가가 말한다.


조영동 화백 나의 아버지는 한국의 일제점검, 한국전쟁, 독재, 인권박탈, 저항, 민주주의 라는 시대를 통과하며 이 모든 현실들을 추상으로 승화시킨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작가라고 감히 나는 말한다.

90년대를 지나면서 그의 작품에 “땅” 이 있고, “인성” 이 형성되고 “천지창조” 라는 우주적인 역사가 시작되고 “ 가시 면류관” 이라는 너무나 인간적인 고통도 그의 추상적 혼으로 쏫아져 나온다.


아버지는 항상 시대에 순응하지 않는 조용한 혁명가였다.


한번은 아버지가


“나는 눈물없이 통곡하고 피 없는 혈전을 치루며 살고 있는 지성인이다”


라고 자신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항상 공부를 잘 하던 그에게 집안에서는 당연히 의대나 법대를 가라고 했으나 아버지는 이 우울한 한국의 시대 50년대에 서울대학의 미대에 들어갈 것을 결심한다.


밥 한끼를 얻어먹기 위해 하루 종일 보상없이 노동하던 이 시대에 그림을 그리겠다고 결심하는 아들에 대해 집안의 반대는 말 할 수 없었으며 그의 아버지는 대학의 입학금을 절대 줄 수 없다고 말씀 하셨다.


입학금 뿐만이 아닌 그림도구와 물감을 사야하는 미대에 입학하여 아버지는 가끔 헌혈을 하여 그림도구를 장만하거나 또는 그 당시 서울의 극장들의 간판을 그려 입학금을 냈던 것을 회상한다.


지금도 예술을 한다면 반대하는 집안이 많은데 그 시절 일제시대와 전쟁을 겪은 대한민국에서의 예술인에 대한 집안과 사회의 눈이 어떻했을지는 짐작이 간다.


1957년 서울대학교 미대를 졸업하고 조영동 화백은 곧바로 교육계로 들어간다.


“나는 미술을 가르치고 싶은 것이 아니고 혁명적인 내면의 눈을 뜨게하고 싶다”


라고 성신여대 교수시절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아마 이 어두웠던 대한민국의 50년대 그의 이 교육 이념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57년에서 58년 까지 조영동 교수는 논산 대건고등학교의 교사를 지냈으며


1959년-1960년 안성 안법고등학교 교사, 1960년-1963년 대전 동중학교 교사 그리고1962년-1962년 국토건설단, 1963년-1965년 3월 공주사범대학교 부속고등학교 교사, 1967년 5월 공주교육대학교 교수로 재직한다.


1973년 6월 그의 작가인생에 전환이 되는 큰 일이 있었는데 바로 미국의 휴스톤 대학에서의 객원교수 초대였다.


한국의 70년대…


그때 한국은 이제 막 고속도로를 만들기 시작하고 새마을 운동을 하던 독재의 시대이다.


우연히 한 지인의 그의 추상작품을 보고는


“세계의 미술시장에 내어 놓아도 손색이 없는 수준의 추상이다.”


이렇게 극찬을 하며 그의 작품사진들을 휴스톤 대학의 총장에게 보내고 총장은 조영동 작가를 객원교수로 초청한다.


어째서 영어를 못하냐고 한 친구가 묻자 그는


“나는 돈도 모르고 정치도 모르고 아부 할 줄도 모르고 친구사귈줄도 모른다. 영어도 못하고 사실 한국말도 잘 못한다. 나는 그림만 그릴 줄 안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세상과 합의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 술들이 필요했다.


지나치게 민감하고 섬세한 그의 신경조직들에 다가오는 한국의 70년대 현실들은 아버지를 거의 알콜중독의 경계에 까지 가게한다.


조영동 작가는 1년 좀 넘은 객원교수 생활을 게이꼬 겔러리의 전람회를 마침으로 종결짓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다시 한국의 교육계로 돌아온다. 1977년1종도서(중학교미술)편집위원회 회원으로 일하고 1980년-1982년 한국미술협회 이사로 역임 한다. 1982년-1983년 공주교육대학교 도서관장 역임, 1983년-1985년 한국미술협회 감사 역임 그리고 1984년 서울 성신여대의 교수로 재직한다.


대한민국의 미술교육 아니 그가 말하는 “내면의 혁명의 눈”을 위한 교육과 동시 작가로서도 그는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정진해 왔다.


총 11번의 개인전을 국내와 국외에서 가졌으며 단 한번도 중복되는 형태의 작품을 전시 한 일이 없다.


오로지 그림만이 외부 세상과의 소통이었던 조영동 화백의 삶.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 조차 잘 이해할 수 없었던 작가의 자폐적인 자기몰두.


40대 이후부터 지나친 알콜과 유전적으로 얻은 당뇨병.


10회 개인전은 일본 훗가이도의 겔러리 였었는데 그때 나는 아버지를 동행했다.


영어를 잘 하던 그리고 독문과를 다니던 나에게 아버지가 같이 가서 통역을 도와 달라고 하셨다.


“정말 알수 없는 친구다” 라고 한 일본인이 말하자


“나도 나를 모르는데 니가 어떻게 나를 아는가? 나를 알려면 내 그림을 봐라. 나도 내 그림을 봐야 내가 누군지 안다” 라고 대답해서 모두 웃은 것을 기억한다.


끝도 없이 시대에 반항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조영동 화백, 나의 아버지


이제 87세가 된 이 화백은 이미 79세부터 당뇨의 합병으로 온 시각장애로 거의 정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이지만


“다시 그림을 그리고 전시회를 하겠다” 라고 한다.


주변에서


“어떻게 눈이 하나도 안 보이는데 그림을 그리는가?” 라고 하면


“나는 추상을 하는 사람이다. 어차피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는 사람이니깐 보이지 않아도 그릴수 있다. 더 새로운 추상이 나올 수 있다” 고 말한다.


조영동 화백은 딸만 넷을 낳았다.


아버지로서도 조영동 화백은 최선을 다 하셨다고 딸인 나는 말 할 수 있다.


셋째인 나는 독일로 유학 갔다가 스페인의 건축가를 만나 결혼했는데 그때 내 남편 될 사람을 데리고 집으로 가자 아버지는남편의 얼굴을 보시더니


“ 너를 정말 좋아한대?”


그렇게 물으셨다. 그래서


“네, 아버지, 그리고 저도 정말 좋아해요”


그렇게 말하자,


“그럼 됬다. 잘 살아”


그리고는 작업실로 가 버리신 것이 생각난다.


엄마가 가끔 해외에 나가있는 딸들이 보고싶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할수 없다. 하지만 내 그림들을 가지고 있으니 나와 함께 있는 것과 같다”


이렇게 말하곤 하셨다..


아버지가 스페인에 나의 집에 오셔서 한달을 있은 적이 있다. 그때 벌써 아버지의 눈이 많이 안 좋아진 상태이기 때문에 아버지는 두 손자의 얼굴을 가까이 드려다 보시다가 또 만져 보시다가 그렇게 그리신 것이 있다.


수도 없는 실수의 선과 점이 모여 완벽한 손자의 얼굴이 형성됬다.


1달 스페인에 머물면서 그린 스페인의 풍경화만 20여점…


아버지에게그림을 그리는 일은 밥을 먹거나 물을 마시거나 하는 일 같이 거의 본능이며 존재 이유인것 같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아버지는 나의 시어머니 시 아버지에게 정성으로 그린 마리아 상을 선물 하셨다.


나의 시아버지는 바이야돌리드의 400년된 국립대학의 총장을 지내신 분이고 시어머니도 명예교수로 대학교수직 40년을 마치신 분들이다.


아버지는이 분들의 손을 잡고 한국말로 크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내 딸을 옆에서 못 봐주지만 이 마리아님이 보고 계시니 내 딸에게 잘 해 주세요”


그리고는 나에게


“어서 스페인 말로 통역해드려.” 이렇게 말씀 하신 것에 아직도 눈물이 핑 돈다.


87세가 된 이 노령의 작가가 자신의 어린시절을 회상하며 외할머니가 밥먹으라고 부르는 소리가 날 때까지 붓을 놓지 않겠다고 한다.


그때가 오면 붓도 놓고 이해하기 힘들었던 이 세상도 놓고 죽음 아니 새로운 세계 완벽한 세계라는 추상의 세계로 외 할머니를 따라 가겠다고 한다.


죽음보다 삶이 어렵고 구상보다 추상이 어렵다는 나의 아버지는 뇌졸증으로 쓰러져 계신 어머니를 보러 가실때 마다 눈물을 흘리시며 화를 내신다.


“왜 사람이 죽느냔 말이야, 왜.”


이렇게 어린아이 같은 절규.


쉬운 질문


하지만 답이 없는 인생이 그의 추상이다.


아버지가 남겨놓은 약 600 여점의 작품을 정리하는 일을 맏게된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의 추상작품을 보고 그의 이 간단한 질문들에 답해 주길 바란다.


“사람이 도대체 왜 사냔 말이야 왜?”


이 간단한 아버지의 외침이 그의 추상 속에 들어 있다.


그리고 그 해답을 찾아야 하는것은 바로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 바로 우리 세대들의 몫이다.


“사람이 도대체 왜 죽느냔 말이야 왜… 참 답답한 일이지… 젠장할…”


사랑하는 딸을 먼저 보내고 또 사랑하는 아내를 병석에 눕혀놓고 내 뱃는 그의 투정같은 인간한계성에 대한 질문도 그의 추상작품속에 있다.


그 해답을 꺼내내야 하는 것도 그림을 보는 사람들의 몫이다.


나는 나의 아버지의 그림을 많은 사람들이 보고 같이 그 해답을 찾기를 바란다.


아버지가 죽음보다 어렵다고 말씀 하시는 삶이 그의 추상화속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 어렵고 아름다운 삶, 그것이 추상이 되어버린 그림들을 젊은 세대들이 많이 보고 이야기 해 주었으면 하고 기도한다.


토양, 인성 2000






>>이 글은 2017년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실때 제게 그림들을 이젠 정리 시작하라고 하셔서 무작정 시작한 글들 중에 하나입니다.
2024년 현재 아버지의 회고전은 이미 4개가 열렸으며 아버지 조영동 화백에 대한 관심은 조금씩 커져가고 있습니다.




더 많은 조영동 화백에 대한 글:


https://blog.naver.com/newspainpa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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