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식(假飾)의 디톡스
그저께는 어스름 저녁 무렵이 되어 그만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렇다고 뭇사람들의 비난을 들어야 할 정도로 나쁜 짓을 한 건 아니다. 퇴근했냐는 그녀의 물음에 "그럼 안 했을까?"라고 괜스레 전화기 너머로 쏘아붙였다. 어제는 아침 댓바람부터 짜증을 내었다. 인성이 그러니 오늘이라고 뭐 딱히 다를 것 같지는 않다.
그저께는 저녁 뉴스를 보며 습관처럼 욕을 해댔다. 그러면서도 그녀에게 속죄할 기회를 찾았다.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발바닥을 몇 분 마사지해 주었다. 어제도 비슷하게 속죄의 기회가 있었다. 오늘이 다 가기 전에 아마도 익숙한 속죄의 기회가 찾아지지 않을까 싶다. 하루하루 사는 게 비슷하고 지루하다.
'별' 소리를 들으면 프로방스 산골의 목동과 그 곁의 스테파니 아가씨를 생각하던 소년이었다. 스물여섯 최인호 작가가 별소리인 듯이 별소리 아닌 듯이 써내려 간 '별들의 고향'을 떠올리던 청년이었다. 밥벌이하느라 바쁘면서도 지루하던 젊은 어느 날 인연의 끝이 길게 서로 맞닿아 그녀를 만났다.
새벽녘 별들이 어스름하게 비추는 넓고 먼 길을 버스가 질주하였다. 지루하면 그제야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오른다고 하더니 리드미컬하게 덜컹이는 버스 창에 기대어 '하늘에 빛나는 별들 중에 가장 예쁜 것들을 따다 줄게.'라고 중얼거렸다. 엊저녁에 그녀가 남겨놓고 간 향기 나는 온기를 서서히 잃어가는 그녀 집 앞 골목길을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다. 입에 갖다 댄 두 손에 입김을 연신 불어대며 동이 트기를 기다렸다. 구라쟁이들의 구애의 정석을 기발한 아이디어로 여기고서 행여나 잊어버릴까 바짝 짙어진 어둠이 내뿜는 한기(寒氣)에 맞서 싸우며 외우고 또 외웠다. 발을 동동 거리며, 이십여 년 새가슴에 둥지를 틀고 키워온 성근 별들을 기꺼이 그녀에게 건네주리라 마음먹었다.
그녀가 반쯤 넘어왔을 때,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 줄게."라며 엄청난 거짓부렁이를 말하였다. 즉흥적이었다. 그렇게 방점을 찍었다.
'밤이 환상의 세계라면 / 너는 흐르는 별'과 같고 '나의 마음과 / 나의 기도와 만나 더욱 / 빛나는 별이 되었다'는 나태주 시인의 시구가 겨울 창의 성에꽃을 닮았다 싶은 날이면, 그 옛날 구애의 순간들이 너무도 선명해졌다. 별빛은 다정해도 구라는 서릿발 같았다. 난 그녀에게 한없이 뻔뻔하고 무례하였다. 많고 많은 내 잘못들의 원죄(原罪)였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다시 넷이 되어 아옹다옹 오순도순 살았다. 서울은 빛의 공해로 날이 갈수록 별 보기가 어려웠다.
분가해서 살자 하고 선 홀아버지와 동생과 함께 살았다. 월급을 받아도, 주식에 손을 대도, 로또를 사보아도 내 돈벌이 수완은 밑진다고 칭얼거려 파리만 날리는 난전 장사치와 같았다. 서른 넘도록 모은 종잣돈으로 동생 딴살림을 차려주었다. 추하지 않게 입고, 배고프지 않게 먹고, 아이 둘 잘 키워 보려니 번 돈에서 쓰고 남는 것이라곤 전혀 없었다.
쌀 씻는 물, 채소 씻는 물, 설거지 물, 걸레 빠는 물, 아이들 씻기는 물... 새악시의 손은 물이 마를 일이 없었다. 집안일 오수(汚水)를 멀리할 만큼의 여유는 무리한 사치였다.
빨래 개기 부탁엔 고개를 돌렸다. 청소기 돌려달란 말에도 딴짓을 하였다. 설거지해 달라는 말에는 "있다가"라고 대답하였다. 쓰레기는 피곤해서 내다 버리지 못했다. 그런 일들이 잦았다. 퇴근길 술에 취해 집을 찾아 헤매는 개가 되기 일쑤였다. 보통사람 사는 방식이라 여겼다. 그것이 보통이라면 그 옛날 구라쟁이들을 따라 해서는 안될 일이었다.
살다 보면 한 번쯤은 운수 대통한 일이 있을 법도 하지만 여전히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 인터넷 최저가 구매에 신나 하는 정도의 운만 있다. 남들과의 비(非) 자발적 비교에 스스로 지쳐간다. 누구는 승진을 했고, 누구는 집안 땅이 몇 평이고, 어쩌면 그리도 흔할까 싶은 자랑질에는 부러운 듯 입꼬리만 살짝 올려주며 관리를 한다. 잘나지 못한 것도 명백하게 나의 근원적 아픔이다.
그녀는 부쩍 "그때 결혼 안 하고 유학을 갔어야 했는데", "그 남자는 가슴에 떡을 품고 도서관에서 기다리곤 하였는데", "그 남자는 안 만나주면 기말시험을 안 보겠다고 했는데", "그 남자는 군대 가서 2년 동안 편지를 보내왔는데"라고 회상을 자주 한다.
"내가 언제?"라고 부인을 한다. "내가 왜?"라고 짜증을 낸다. 그 옛날 분명히 별을 따다 주리라 하였고 고운 손에 물일랑 묻게 하지 않겠노라 말했었다. "넌 사는 거 자체가 구라야."라고 누군가 날 비난한대도 달리 대꾸는 하지 않으련다. 시간은 쉼 없이 흐르고 세월의 흔적은 짙어져 간다.
서울은 빛 공해로 여전히 별이 보이지 않는다. 더는 별 따러 가는 꿈을 꾸지 않는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도 그녀의 향기로운 젊은 온기는 맡아지지 않는다. 명백하게 내 잘못들의 기원임을 안다.
그녀는 아침 댓바람부터 대걸레를 밀고, 양말을 뒤집어 세탁기에 집어넣고, 아이들을 먹이고, 설거지를 해댄다. 그 모양새가 불편하여 이 방 저 방 피해 다닌다. 부르는 소리를 애써 못 들은 척하고, 아이한테 뭐 좀 가르쳐 주라면 소파에 드러누운 채 눈길은 딴 데로 향한 채 맥락 없이 지껄인다.
출근길 현관문을 나서며 손가락 하트 두 개를 건네준다. "갔다 올게."라고 말한다. 퇴근길에 버스 정류장 앞 식당에서 순대 2인분을 포장해 들고 온다. '입맛 없을 때 먹어."라고 말한다. 발바닥을 주무른다. "시원하지?"라고 묻는다. 대답이 없으면 "저것들 정말 미쳤네."라고 요즘 뉴스에 대꾸한다. 어디 그뿐이랴. 빨래도 개고, 식기세척기에 밥 먹고 난 그릇들도 집어넣고, 청고추 배를 갈라 두부, 당면, 돼지고기, 부추를 다져 넣고 튀김물 묻혀 기름에 집어넣는다. "맛있지?"라며 반응을 구한다. 아재 농담을 건네고 멋쩍게 킥킥 거린다. 잘못을 저지른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속죄의 기회들을 찾아서는 마구 널브러뜨린다.
문제가 생기면 해결보다는 손쉬운 속죄로 어물쩍 넘기려 한다. 그녀의 짜증이 잊히기를 기대한다. 그녀는 한없이 가벼운 나의 대증요법을 언제부턴가 가식(假飾)이라 부른다. 때때로 세월의 흔적 속에 축적된 가식의 독소를 빼내는 강력한 디톡스가 필요함을 안다. 하지만, 나의 원죄와 근원적 아픔을 치유하는 것은 너무 늦어버린 일이다. 그냥 껴안고 가보려 한다.
나는 그저께도 어저께도 그리고 오늘도 속죄의 기회를 찾아 그녀의 주위를 맴돈다. 서울 하늘엔 세월의 공해로 더는 별 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이제 더는 젊다 못할 옅어진 온기의 내 가슴에라도 별둥지를 새로 틀고 뭇별까진 아니라도 예쁜 별 몇 개를 키워보려 한다.
나른한 휴일 오후 낮잠을 이겨내고 글을 쓰다 보니 별일을 다 떠올리고 또 별 키울 생각까지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