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3학년 때였던가 미사 중에 신부님이 퀴즈를 내셨어요. 수줍음 많던 제가 그땐 어떻게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는데 손을 번쩍 들어 퀴즈를 맞혔습니다. 선물로 아주 귀여운 미니 3색 목걸이 볼펜을 받았습니다. 기쁜 마음을 안고, 선물로 받은 볼펜을 만지작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려면 시장을 통과해야 해서 도로와 인도 구분이 없던 길을 즐겁게 걸어가고 있었는데요. 반대편에서 오토바이 한 대가 제 쪽으로 달려오는 것이 아니겠어요? 순간적으로 제 몸이 건물 2층 높이 정도로 붕 떠올랐다가 떨어졌습니다. 신발 두 짝이 다 사방으로 날아갔고요. ‘아. 나는 이제 이렇게 죽는 거구나.’하고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몸이 붕 떠 올라 허공에 몸이 잠시 잠깐 떠 있다가 이내 떨어지던 그 찰나의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놀란 오토바이 아저씨는 황급히 저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인근 병원에 데리고 가셨습니다. 아저씨는 당황하셨는지, 간호사분에게 저의 아빠라고 거짓말을 하시더군요. 엑스레이를 찍어보았더니, 다행히 큰 외상은 없었습니다. 오토바이에 치여서 몸이 날아갔는데도 크게 다친 곳 없이 멀쩡해서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왠지 모르게 3색 볼펜이 저를 지켜준 것만 같았지요. 오토바이에 치였던 불행하나에 마음이 더 쏠렸더라면, 제게 온 행운 두 개를 깜빡 잊어버릴 뻔했습니다. 아주 예쁜 미니 볼펜을 선물로 받았고, 사고가 났음에도 크게 다치지 않았던 2가지 행운 말입니다.
사람들은 복권에 1등으로 당첨되는 것처럼 엄청난 일들이 행운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살면서 보니, 꼭 그런 순간만이 행운인 것은 아니더라고요.
남편과 미국에서 공부를 막 시작할 때였어요. 생활비를 아껴보겠다고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매트리스를 구매했어요. 산 지 얼마 되지 않았답니다. 급하게 한국으로 돌아가야 해서 빨리 처분한답니다. 이런 횡재가 있나 하고, 저희가 사겠다고 했지요. 매트리스를 실어가려면 트럭이 필요해서 미니트럭도 잠시 빌렸습니다.
제가 살고 있던 동네와 판매자가 살고 있는 동네는 꽤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라 고속도로를 타고 판매자 동네에 도착했어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트럭 짐칸의 길이보다 매트리스 길이가 더 길어서 비스듬히 세워야 실리겠더라고요. 짐을 묶는 끈도 없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판매자가 말한 반대 방향으로 매트리스를 실어야 할 것 같은데, 판매자가 그러면 떨어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판매자 말을 듣고 운전자 방향 쪽으로 매트리스를 비스듬히 세워 싣고는 고속도로로 들어섰습니다. 조심스럽게 운전했지만, 속도가 붙으면서 바람 때문에 매트리스가 휙 날아가더니 그만 고속도로에 떨어져 버렸습니다. 고속도로라 중간에 멈출 수도 없었고, 갓길도 보이지 않더군요. 고속도로에 물건을 떨어뜨리면 반드시 신고를 해야 한다고 적혀있던 문구가 갑자기 떠오르는 겁니다.
영어가 부족했던 남편은 사색이 되었고, 매번 남편에게만 의지했던 제가 해결해야 했습니다. 저도 가슴이 쿵쾅 뛰긴 마찬가지였지만 떨린 마음을 가라앉히고 911에 전화해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매트리스를 싣고 가다가 고속도로 한가운데에 떨어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나요?”하고요. 그랬더니, 위치를 묻더니 처리하겠다고 그럽니다. 엄청 걱정하면서 괜찮냐고 매트리스 떨어뜨린 자리로 다시 되돌아가지 않아도 되냐고 계속 물었더니, 웃으면서 괜찮다고 가랍니다. 이러려면 새 매트리스를 사는 건데, 왜 트럭까지 빌려서 여기까지 온 건가 싶어 허탈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아차 싶더라고요. 비록 돈은 버렸지만, 매트리스가 날아갈 때 주변에 차가 없는 바람에 사고가 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더라고요. 혹시 벌금을 내거나 감옥에 가게 되는 거 아니냐며 오들오들 떨며 전화를 걸었는데, 괜찮다고 그냥 가라고 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습니다. 덕분에 살아 있는 생활 영어 회화도 해 보았네요. 살면서 911 직원과 영어로 대화해 볼 수 있는 경험이 몇 번이나 되겠나 싶었습니다. 미국에서 미니트럭도 빌려봤고요. 행운이었어요. 저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경험을 했네요.
한참 전의 일도 떠오릅니다. 집에서 직장이 멀어서 출근 시간이 꽤나 걸렸었는데요. 그날은 5층까지 올라가야 하는데, 늦을까 봐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아뿔싸. 엘리베이터 한중간에 누가 똥을 싸 놓은지도 모르고 그만 밟아 버린 겁니다.
어그부츠를 신고 있었는데, ‘물컹’하는 느낌이 드는 순간 눈치챘어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하늘이 노랬지요. 급한 나머지 앞을 못 본 거지요. 알고 보니, 도움반 친구 한 명이 화장실이랑 엘리베이터를 착각하고 엘리베이터 안에 똥을 싸 놓은 거였다더라고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교실 복도로 가려니 신발에 똥이 묻어 있어서 복도에 다 묻힐 것 같은 거예요. 콩콩 뛰며 교실 문 앞으로 와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신발에 뭐가 묻은 것 같다며 도움을 청했지요.
아이들이 가져다준 물티슈로 신발에 묻은 똥을 닦은 후, 실내화로 갈아 신고 엘리베이터에 똥을 치우러 가려던 참이었는데요. 민국(가명)이가 슬쩍 옆에 와서 조용히 말하는 겁니다.
“선생님, 제가 엘리베이터 안의 똥 치웠어요.”
깜짝 놀라서 “어떻게?”라고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쿨하게
“선생님 신발 닦으실 때, 화장실에 가서 대걸레로 치웠지요. 신발에 묻은 거 똥 맞죠?” 그러는 겁니다.
수업 진도 좀 나가려고 하면 맨날 떠들고 딴 짓하던 민국이가 이렇게 제가 곤란할 때 도와주니 감동이더라고요. 의리남 민국이 덕분에 곤란했던 상황을 잘 수습했습니다.
처음 신고 간 새 신발이라 아침부터 똥 밟아서 이게 무슨 일이냐며 엄청 속상할 뻔했는데, 똥 밟는 바람에 민국이의 새로운 모습도 알게 되었고요. 그날부터 저의 비밀 아닌 비밀을 공유한 민국이는 수업 태도도 조금씩 좋아지더라고요. 의리남 민국이와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습니다. 똥을 치우고 뿌듯해하던 민국이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네요.
아이들에게 나중에 똥이었다고 고백했더니, 아이들은 웃기다며 자지러졌죠. 똥은 저와 아이들에게 잊지 못할 재미있는 추억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불행에만 초점을 맞췄다면, 찾지 못했을 행운의 순간들이 참 많구나 싶어요. 우리 일상은 어쩌면 작은 행운들이 조각조각 모여서 행복으로 채워주는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불행의 순간에 초점을 맞추어 기쁨을 차단하기보다, 작고 소중한 기쁨들을 온전히 그대로 누릴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불행보다 행복으로 채울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불행과 행운은 정말 한 끗 차이구나 싶습니다. 우리 인생에 일어난 크고 작은 일들은 결국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