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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 독자 Apr 26. 2024

코차밤바에서의 사흘이 지났다.

3월 27일 일요일, 코차밤바에서의 세마나 산타

코차밤바에서의 세마나 산타

코차밤바에서의 세마나 산타

  예수상을 보고 내려가는 텔레페리코를 기다리고 있다. 현재 시간 저녁 6시 15분. 그 사이에 잠시 펜을 들어본다. 정말 오랜만에 쓰는 기록이다. 코차밤바에서는 무척이나 여유롭고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여행을 떠난 지 벌써 한 달 반이 지나고 있는데 마치 이제야 진짜 여행을 하는 것 같은 착각도 든다.


  그도 그럴 것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먹는 것에 집착하는 게 아닌, 지금의 이 시간을 잘 보내는 것이 여기에서의 가장 큰 목표이다. 사실 이건 그냥 갖다 붙이는 말일지도. 지금도 나는 타이틀이 거창한 '남미에서 가장 큰 예수상'을 보고 돌아서는 길이니까. 그러나 실제로도 '코차밤바에 왔다면 이건 꼭 해야 해!' 같이 강박적인 마음은 추호도 없다. 몰랐으니까. 그렇다. 아는 게 없어서 궁금한 것도 없던 이곳 코차밤바. 오기 전에는 이름도 못 들어본 낯선 곳.


  코차밤바에 도착했던 첫날이 목요일이었는데 이상하게 문을 연 상점이 없었다. 메인 광장인 14 de septiembre  역시 사람 하나 없는 조용함 그 자체였다. 도시는 정지해 있는 듯 보였고 한적함을 넘어서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 ‘평일에 문을 닫는다고? 대체 왜? 이게 코차밤바의 모습일까?’ 그러나 해가 지고 밤이 되자 낮의 휴식을 한껏 취한 사람들은 에너지가 완충되어 거리로 나왔다. 쥐 죽은 듯한 도시는 금세 사람이 사는 생기로 가득해졌다. 썰렁하던 14 de septiembre 광장은 이내 사람들로 가득해 북적였고 길거리에는 이런저런 다양한 음식 가판대가 거리를 맛깔나게 채웠다. 사람 사는 맛이 제대로 느껴지는 그런 광경이었다.


  알고 보니 이번주가 <세마나 산타> 부활절기간이었다. 종교가 없기에 이 부활 주간을 알리가 만무! 부활절은 일요일 딱 하루만 기념하는 건 줄 알았는데, 남미의 부활절은 일 년 중 최대의 축제로 근 일주일 가량을 기념하는 날이라고 한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텅 빈 낮의 광장에서 ‘이 도시엔 대체 무슨 일이 있는가?’ 싶었는데, 그랬던 궁금증이 저녁에서야 비로소 해결되었다. 복작복작 사람들이 모인 그 광장에서.


  그러다 또 다음날 오후가 되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전지적 여행자 시점에서 수난일인 금요일 오후는 지루하기까지 했다. 전날 밤 시원하게 떠들어 재끼던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끊기고, 다시 고요한 정적만이 가득했던 그날. 너무 한적해서 스스로 여행의 의미를 잃어가는 기분이 들 정도로 조금은 헛헛한 하루를 보냈다. 이런 기분으로 여기에 있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그래서 ‘이 정도면 이 도시를 떠나야 하나?’라는 진지한 고민도 들었다. ‘아니야, 일단 오늘까지는 있어보자.’ 기분도 달랠 겸 저녁노을이나 감상하자 싶어 광장에 나섰다.


  그렇게 가볍게 나선 거리에서 난생처음 보는 성스러운 <세마나산타 기념 퍼레이드>를 마주친 것이다.


  퍼레이드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검은 옷을 입고 열을 지어 줄줄이 이어가며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었다. 끝없는 줄이었다. 무리마다 옷의 디테일은 달랐으나 모두 검은 옷들을 입었는데 그 검은 옷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한 것이었다. 작은 아이들은 물론 학생, 성인들까지 거의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줄을 맞춰 행진했다. 많고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줄을 맞춰가며 기도문 같은 것을 외었다. "santa maria, madre el dios......."로 시작되는 구절이었다. "성모 마리아, 신의 어머니......" 기도문을 외던 그들의 목소리는 하루가 더 지난 지금까지 귓가에서 맴도는 듯하다. 거룩하고 엄숙한 행렬이었다.


  태어나 처음 보는 예수님의 장례였다. 불과 몇 시간 전 코차밤바를 떠나고자 했던 마음이 미안할 정도로 놀랍고 압도적인 고결함이 있었다. 장례가 끝나고 사람들은 일제히 메인 광장에 있는 성당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퍼레이드에서 운구된 성모 마리아의 동상과 예수님의 주검이 함께 놓여있었다. 사람들은 그 앞에 서서 성호를 긋고 머리를 숙여 기도를 드리며 각자의 방법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했다. 그리고 조용히 그의 부활을 기다렸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부활절 당일이다. 부활절은 생각보다 조용하고 한적했다. 볼리비아에서는 진짜 달걀을 나누는 대신 달걀 모양의 초콜릿을 나누는 듯 보였다. 나도 5 볼을 주고 달걀모양의 초콜릿 하나를 샀다. 태어나 처음 기념해 보는 부활절이다. 하지만 가지고 다니다 보니 이미 찌그러져버려 먹을 수는 없다. 오전엔 부활절을 맞아 성당을 다섯 곳 정도 다녀왔다. 신앙이 깊은 곳이기에 한 모퉁이 돌면 또 하나의 새로운 성당이 있어 관광 모드로 돌아다닌 덕분이다. 일찍이 문을 연 차례로 둘러본 성당들은 일제히 엄숙한 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구경 온 나까지 경건해지는 광경이었다. 그중 한 곳에서는 모두가 함께 줄을 서 동그란 떡 같은 것을 한 입 씩 먹기도 했다. 거룩하고 엄숙한 아침이었다.


  쓰다 보니 벌써 6시 30분이 되었네. 내려가는 텔레페리코는 아직 줄을 기다리는 중이다. 텔레페리코를 타고 내려가면 곧장 밤 버스를 타고 라파즈로 이동할 것이다. 지금이 코차밤바에서의 마지막 저녁. 이름도 몰랐던 이곳에 와서 많은 경험을 했다. 어쩌다, 정말 어쩌다 오게 된 낯 선 이곳. 많은 우연들이 지금의 이 여행을 만들어가고 있다. 여행에서는 때때로 전혀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는구나. 모쪼록 모든 순간들이 결국엔 아름답게 기억되길 바란다. 끝까지 아름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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