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임말로 대화하는 아이들> 14화 : 말 없는 위로
8개 학급의 학년 부장을 맡은 해였다. 부장의 역할은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다행히 학년 선생님들의 도움과 협조 덕분에 계획한 학년 행사는 무사히 운영되었으나, 단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하루가 멀다고 예상치 못한 각종 사건 사고가 빵빵 터졌다. 학급 수가 많다 보니 불가피한 일이었다. 각 반 담임 선생님들은 학급 운영의 노하우가 확실한 경력자들이었다. 학급 아이들을 책임 지도했다. 그러나 학년 부장으로서 신경 쓸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교실에서 난동을 부리는 다른 학급 친구를 제지하러 뛰어갔으며, 수업 시간에 사라진 학생을 찾으러 달려 나간 담임 선생님을 대신해 그 학급 친구들을 관리했다. 담임 선생님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는 학생을 데려다가 사건의 진면모를 밝혔으며, 학년 전체의 질서와 안전을 위해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 복도를 관리했다. 학년의 무사 무탈만을 기원하며 하루하루 버텼다. 각 학급을 향한 8개의 더듬이가 항상 팽팽하게 추켜세워져 머리 위를 짓눌렀다.
각종 사건 사고 처리로 아침부터 진땀 흘리며 뛰어다니던 학년 부장은 퇴근 시간이 지나서야 혼자 남은 학교 조용한 교실에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 일단 오늘 하루 넘겼다.’
선생님들이 모두 퇴근한 후 더 이상 교실 전화도 울리지 않고 학교 메신저도 조용한 때가 되어서야 본연의 업무를 시작할 수 있었다. 공문을 처리하고, 다음 날 수업을 준비했다.
학년 부장으로서 특히 힘든 순간은 다른 반에서 문제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수업 시간에 듣게 될 때였다. 우리 반 수업을 핑계로 쉬는 시간으로 미룰 수 없는 급박한 상황. 우리 반 수업하다 말고 다른 학급으로 뛰어가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선생님, 우리 반 큰일 났어요. 빨리 와주세요.”
음악 시간 리코더를 연주하고 있었다. 다른 반 친구 두세 명이 다급하게 우리 교실 문을 열었다. 아이들 얼굴이 사색이었다. 일단 그 교실로 가야 했다.
“선생님, 다녀올게요. 각자 리코더 연습하고 있어요.”
우리 반 아이들에게 한 마디 남기고 교실을 나섰다. 종종 있는 일이라 그런지, 아이들은 이유를 묻지도 않았다.
“네, 선생님. 다녀오세요.”
큰일 났다던 교실은 아수라장이었다. 두 친구의 사소한 장난이 싸움으로 번졌다고 했다. 둘 다 감정통제 능력을 완전히 잃고 잡아먹을 듯이 싸웠다. 소리 지르며 화내는 아이들, 말리는 아이들, 공포에 질려서 울고 있는 아이들. 한참 동안 이어진 그들의 싸움을 아무리 말려도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담임 선생님이 학년 부장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거의 넋이 나간 선생님은 그 와중에 미안함을 표현했다. 수업 시간에 연락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었다고.
다행히 부장 선생님의 등장으로 싸우던 두 사람은 살짝 힘을 뺐다. 긴 시간 과한 에너지를 썼으니 그들도 지친 데다가, 학급 구성원이 아닌 외부 사람의 등장이 분위기 전환으로 작용한 덕분이었다. 서로 달라 붙여서 치고받는 동작이 멈춘 찰나의 순간을 이용하여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아 씩씩거리는 아이들을 달랬다. 선생님을 진정시키고, 다른 아이들을 자리에 앉힌 뒤 교실을 정리했다. 학급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 아이들 칭찬도 하고, 서로 이해하는 학급 분위기에 대해 당부도 했다.
우리 교실로 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오는데, 다리에 힘이 풀려 후들거렸다. 온몸이 땀이었다. 예고 없이 찾아온 아수라장 진압 및 정리. 그 학급 전체의 안전과 관련된 일이었다. 학년 부장으로서 잔뜩 긴장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것일까? 리코더 음악 시간은 이미 끝난 지 오래였다. 쉬는 시간 10분도 지나고, 다음 수업 시간이 시작된 지도 한참 되었다. 우리 반 아이들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학년 부장의 학급이라는 이유로 갑작스럽게 담임의 부재를 겪게 해서 아이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힘이 하나도 없었다. 몸 저 깊숙한 곳 아무도 모르게 저장되어 있던 에너지 한 방울까지 다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수업해야겠지? 우리 반 아이들 앞에서는 태연하게 웃어주어야겠지? 이번 시간이 무슨 과목 수업이더라? 우리 교실 문을 열었다.
아! 여기가 천국이구나.
너희가 나를 살리는구나.
교실에서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리코더는 싹 정리되어 음악 시간의 흔적은 없었다. 아이들은 모두 이번 시간 교과서를 책상 위에 준비한 채 바르게 앉아서 각자 뭔가를 하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배움 공책을 정리하기도 하고, 칭찬 공책을 쓰는 아이들도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떠드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담임을 일제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활짝 웃어주었다. 우리 잘 있었다는 듯. 선생님 이제 안심하라는 듯.
이곳이 천국이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여기였다. 학교가 내 직장이라는 것이, 교실이 내 사무실이라는 것이 감사했다. 이 아이들이 천사였다. 나를 살게 하는 힘, 나를 여기 천국에 존재하게 하는 이유. 이 아이들이 나의 아이들이라는 것이 감사했다. 너무 감사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이들은 학년 초부터 담임이 학년 부장인 것을 알고 자랑스러워했다. 다른 선생님이 우리 선생님을 ‘부장님’이라고 부른다며 뿌듯해했다. 담임이 부장이어서 자기들이 얻은 것이라곤 학년 행사 준비와 뒷정리의 번거로움, 그리고 다른 학급 일로 뛰어다니는 담임의 부재밖에 없었는데도 말이다.
아이들은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담임이 다른 반 일로 나갔다 오면 힘이 든다는 것을. 학년 부장 담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조용히 각자 할 일을 하는 것임을. 무사히 안전하게 학급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임을. 학년 일로 힘이 빠져 돌아왔는데, 우리 교실까지 난장판이었다면 어떠했을까? 나의 정신력이 버틸 수 있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때론 침묵이 큰 위로가 된다. 우리 반 아이들이 담임에게 준 것은 바로 ‘말 없는 위로’였다. 힘들었던 그해 나를 살린 것은 말 없는 위로를 건네던 나의 천사들이었다. 그들이 만들어준 천국만이 바람 잘 날 없던 아수라 속 안전지대였다.
아이들은 평소 바르게 생활하는 것으로 말없이 담임에게 힘을 주었다. 그리고 종종 편지로 마음을 전했다.
“선생님, 부장 선생님 하느라 힘드시지요?”
“선생님, 우리 학년을 잘 이끌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우리 학년만 다양한 행사할 수 있게 신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이 학년 부장이어서 자랑스럽습니다.”
아이들은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었다.
비단 학년 부장을 하던 그해만은 아니었다. 해마다 우리 반 아이들은 담임이 교실 밖으로 나갔다 오면 인형처럼 조용히 앉아서 각자 할 일을 하는 것으로 감동을 주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렇게 했다. 담임이 없을 때 더 잘해야 한다는 것이 학급 분위기가 되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잘하니, 전체는 더 빛났다.
어느 해였던가, 학년 선생님 한 분이 물으셨다.
“선생님 학급은 우리 학년스럽지 않아요. 스타일이 달라요. 어떻게 선생님 없을 때 저렇게 조용하지요? 어떻게 저렇게 질서가 잘 잡혔지요?”
“그러게요. 말이 달라지니, 아이들 행동이 저절로 달라지네요. 말이 예뻐지니, 말없이 조용히 있는 것도 잘하고요. 담임이 없을 때 잘해서 담임에게 감동을 주고 싶은가 봐요.
선생님 학급도 혹시 높임말 사용해 보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