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꿩 적(翟)에서 파생된 한자들

눈에 띄다, 날씬하다, 곡식을 사고 팔다 등

by 이원규

지난 글에서 다룬 억조 조(兆)에서 파생된 한자들 중에 그윽할 조(窕)가 있다. 고요할 요(窈)와 함께 '요조'라는 단어를 이루며, 이 단어를 쓴 '요조숙녀'는 보통은 정숙한 여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옛날 죽간에서 요조를 요적(要翟)이라고 쓰기도 했고, 이 글자는 '허리가 날씬하다'라는 뜻의 요조(腰嬥)로 읽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윽할 조(窕), 꿩 적(翟), 날씬할 조(嬥)는 음이 비슷해서 서로 통하는 글자로 쓰일 수 있다. 날씬할 조(嬥)는 계집 녀(女)가 뜻을 나타내고 꿩 적(翟)이 소리를 나타내는 글자다. 실은 그래서 요적(要翟)이라는 표현에서 꿩 적(翟)을 뜻이 통하는 날씬할 조(嬥)로 바꿔 읽었을 것이다.

여자의 몸매가 꿩 같으면 날씬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어쨌든, 이 글에서는 요조(窈窕)를 요조(腰嬥)로 바꿔쓸 수 있다는 점에서 兆를 대신할 수 있는 꿩 적(翟) 이야기를 하겠다.

669e5b236e1c6.png?imgSeq=30960 왼쪽부터 꿩 적(翟)의 갑골문, 금문, 초나라 간독, 소전체.

翟은 위에는 깃 우(羽)가 있고 아래에는 새 추(隹)가 있는 글자다. 새의 깃이 매우 길어서 돌출되어 있는 새니, 원래의 의미는 꼬리가 긴 꿩을 가리킨다. '적' 외에도 '책'이란 음이 있는데, 성씨나 지명으로 쓰이며, 용례로는 중국 위저우시의 옛 이름인 '양책(陽翟)이 있다. 翟은 성씨로는 '적', '책' 두 음이 모두 가능하다.

최근에는 깃 우(羽)의 갑골문이라고 생각한 문자가 원래 의미는 빗자루인 살별 혜(彗)를 가리킨다고 하고 있다. 그러면 翟 역시 위에 깃이 아니라 빗자루를 지고 있는 꼴이다.

669e59cf7f639.png?imgSeq=30959 살별 혜(彗)의 갑골문.

이를 해명하는 방법으로, 옛날에는 새의 깃털로 빗자루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翟(꿩 적, 적거(翟車), 묵적(墨翟) 등. 어문회 준특급)에서 파생된 한자들은 다음과 같다.

翟+手(손 수)=擢(뽑을 탁): 발탁(拔擢), 탁과(擢科) 등. 어문회 1급

翟+日(날 일)=曜(빛날 요): 요일(曜日), 흑요석(黑曜石) 등. 어문회 5급

翟+木(나무 목)=櫂(상앗대 도): 계도(桂櫂), 노도(櫓櫂) 등. 어문회 준특급

翟+水(물 수)=濯(씻을 탁): 세탁(洗濯), 탁족(濯足) 등. 어문회 3급

翟+火(불 화)=燿(비칠/빛날 요): 요요(燿燿), 병요(炳燿) 등. 어문회 준특급

翟+竹(대나무 적)=籊(가늘고길 적): 적적(籊籊), 적적죽간(籊籊竹竿) 등. 어문회 특급

翟+米(쌀 미)=䊮(곡식 적): 급수 외 한자

翟+光(빛 광)=耀(빛날 요): 요도성(耀渡星), 조요(照耀) 등. 어문회 2급

翟+走(달릴 주)=趯(뛸 적|뛸 약): 적필(趯筆) 등. 어문회 특급

翟+足(발 족)=躍(뛸 약): 약진(躍進), 도약(跳躍) 등. 어문회 3급

䊮(곡식 적)에서 파생된 한자들은 다음과 같다.

䊮+入(들 입)=糴(쌀사들일 적): 적미(糴米), 조적(糶糴) 등. 어문회 특급

䊮+出(날 출)=糶(쌀내어팔 조): 조적(糶糴), 진조(賑糶) 등. 급수 외 한자

꿩의 길고 화려한 깃털은 눈에 띄는 특징이라, 이에서 눈에 띌 만큼 '빛을 비추다'나 '빛나다'라는 뜻이 나왔으며, 옷감을 빛나도록 물에 '빨다'는 뜻이 나왔을 것이다.

꿩적파생자.png 翟(꿩 적)에서 파생된 한자들.

擢(뽑을 탁)은 手(손 수)가 뜻을. 翟(꿩 적)이 소리를 나타내며, 꿩 깃처럼 눈에 띄는 것을 손으로 뽑는다는 점에서 翟이 뜻에도 기여한다.

曜(빛날 요)는 日(날 일)이 뜻을, 翟(꿩 적)이 소리를 나타내며, 햇빛이 눈에 띈다는 점에서 翟이 뜻에도 기여한다.

燿(빛날 요)는 火(불 화)가 뜻을, 翟(꿩 적)이 소리를 나타내며, 불빛이 눈에 띈다는 점에서 翟이 뜻에도 기여한다.

濯(씻을 탁)은 水(물 수)가 뜻을, 翟(꿩 적)이 소리를 나타내며, 눈에 띄도록 옷을 빤다는 점에서 翟이 뜻에도 기여한다.

耀(빛날 요)는 光(빛 광)이 뜻을, 翟(꿩 적)이 소리를 나타내며, 빛이 눈에 띈다는 점에서 翟이 뜻에도 기여한다.


또 날씬하고 잘 뛰는 꿩의 모습에서 뜻을 가져오기도 한다.

嬥(날씬할 조)는 女(계집 녀)가 뜻을, 翟(꿩 적)이 소리를 나타내며, 여자가 꿩처럼 날씬하다는 점에서 翟이 뜻에도 기여한다.

櫂(상앗대 도)는 木(나무 목)이 뜻을, 翟(꿩 적)이 소리를 나타내며, 나무로 만든 날씬한 것이라는 점에서 翟이 뜻에도 기여한다. 상앗대는 배질을 할 때 쓰는 긴 막대를 가리킨다.

籊(가늘고길 적)은 竹(대 죽)이 뜻을, 翟(꿩 적)이 소리를 나타내며, 대나무가 꿩처럼 가느다랗고 긴 모습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翟이 뜻에도 기여한다.

趯(뛸 적|뛸 약)은 走(달릴 주)가 뜻을, 翟(꿩 적)이 소리를 나타내며, 꿩처럼 잘 뛴다는 점에서 翟이 뜻에도 기여한다.

躍(뛸 약)은 足(발 족)이 뜻을, 翟(꿩 적)이 소리를 나타내며, 꿩처럼 잘 뛴다는 점에서 翟이 뜻에도 기여한다.


한편 翟은 원래 의미와는 관계 없이 가차되어 '곡식을 사다'라는 의미로도 쓰였다. 이 글자에 米·出·入을 덧붙여 糴(쌀사들일 적)과 糶(쌀내어팔 조)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糴과 糶는 곡식의 매매를 가리키는 한자로 糴이 買(살 매), 糶가 賣(팔 매)에 해당한다. 원래는 買가 사고파는 행위를 모두 가리켰는데 둘을 구분할 필요가 생기면서 買에 出(날 출)을 덧붙여 만든 한자가 賣로, 아직까지 賣의 가장 이른 출토 시기는 한대의 예서다. 이처럼 䊮(곡식 적)에 出을 덧붙여 만든 한자가 糶고, 이 한자의 반의자로 出의 반의어인 入을 덧붙여 만든 한자가 糴이다. 우리말에서는 '사고 팔다'지만, 한자로는 '팔고 사다'의 순서인 매매(賣買)로 쓰는데, 곡식을 사고 파는 것 역시 같은 순서인 조적(糶糴)으로 쓴다는 것이 흥미롭다.

전국시대 초나라 죽간인 《포산초간》에서는 재난에 대처하기 위해 곡식 종자를 사들인다는 글이 있는데, 이 '사들인다'를 표현하기 위해 翟을 썼다. 형성자 중에서는 성부만을 가차해 쓰다가 뜻을 분명하게 나타내기 위해 의부를 덧붙이는 경우가 있으니, 糴도 처음에는 翟으로만 쓰다가 '곡식'을 나타내기 위해 米를, '사들이다'를 나타내기 위해 入을 덧붙였을 것이다.


한편 䊮은 《설문해자》에서 “곡식이다”(穀也)라고 풀이하지만, 실제 선진·양한 문헌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 글자다. 반대로 종이가 보급되기 전에 글을 쓰던 대나무나 나무 조각, 즉 간독 자료에서는 䊮이 가끔 쓰이는데, 이때에는 이 한자가 동사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糴, 즉 “쌀을 사들이다”의 뜻으로 해석한다. 《이야진간》의 “현에서 곡식을 사들이도록 명령한 바(縣所以令䊮粟)”, 《거연한간》의 “곡식을 사들이도록 하다(使䊮粟米)”가 그 예다. 《포산초간》에서도 䊮이 糴의 뜻으로 쓰인 것이 보고된다.


이 자료들을 고려하면, 䊮은 《설문해자》와 이후의 운서의 풀이에 따른 곡식이라는 뜻과는 별도로 전국-진-한 행정·실무 언어에서는 곡식을 산다는 뜻으로도 쓰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전한의 양웅(楊雄)이 지은 《촉도부》(蜀都賦)에는 적미비저(糴米肥䐗)라는 구가 있는데, 직역하면 “사들인 쌀과 살찐 돼지”다. 그러나 그 앞뒤 문맥이 모두 제사 재료를 나열하는 명사 구조이므로, 단옥재가 《설문해자주》에 남긴 것처럼 糴을 䊮의 잘못으로 보고 “곡식으로 살찌운 돼지”로 해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곧, 䊮은 명사로서는 곡식, 동사로서는 곡식을 산다는 뜻으로 모두 쓰였다.


그렇다면 䊮이 翟을 성부로 하여 형성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翟이 단지 ‘곡식을 사다’는 동사 기능으로만 쓰이고 있다가 새 글자 䊮에서 갑자기 ‘곡식(명사)’의 의미가 새로 부여되었다고 보기보다는, 翟 자체가 ‘곡식’(명사) 의미까지 포함했을 가능성을 추측할 수 있다.
다만 현재까지 문헌·출토자료에서 翟=곡식(명사) 용례는 확인되지 않는다.


또 다른 추측으로는, 翟·䊮이 곡식을 사다 외에 팔다도 같이 뜻했을 가능성이다. 買가 사다와 팔다를 같이 뜻했다가 賣가 나중에 파생되었으므로 한자문화권에서는 사고 팖을 둘로 나누지 않고 하나로 본 역사가 이미 있다. 다만 그런 용례가 아직 나온 적이 없으므로 가설에 불과하다.


정리해보면, 오늘날에 곡식을 사고 팔 때 糴과 糶라는 한자를 사용하는 것의 뿌리는 고대에 翟을 가차해 곡식을 산다는 뜻으로 쓴 데서 찾을 수 있다.


이와 같은 翟과 翟에서 파생된 한자들의 의미 관계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꿩적의미관계도.png 翟과 파생자들의 의미 관계도.

翟(꿩 적)은 꿩의 긴 깃털과 몸체를 본뜬 한자다.

翟에서 擢(뽑을 탁)·曜(빛날 요)·櫂(상앗대 도)·濯(씻을 탁)·燿(비칠/빛날 요)·籊(가늘고길 적)·䊮(곡식 적)·耀(빛날 요)·趯(뛸 적|뛸 약)·躍(뛸 약)이 파생되었으며, 䊮에서 糴(쌀사들일 적)·糶(쌀내어팔 조)가 파생되었다.

翟은 파생된 한자들에 '눈에 띄다', '가늘다', '뛰다' 등 꿩의 특징을 부여하며, '곡식을 사다'로도 가차되어 곡식과 그 매매를 뜻하는 한자들을 파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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