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는 사람의 철없는 생각
생각이 복잡한 오후. 머릿속의 얽힌 실타래를 풀고자 수업 없는 5교시에 글을 쓰기로 했다.
이면지를 책상 가운데 올려두고 필통을 여는데 어라, 검은색 볼펜이 없다.
4교시 수업에 들고 갔었는데 그 교실에 두고 왔나보다.
빨리 급식 먹으러 가고 싶었던 마음이 이런 데서 티가 난다.
까만 볼펜이라곤 그것뿐이라 그냥 수업 자료나 만들까 하며 노트북으로 시선을 옮기는데
필통 속에서 파란색 볼펜이 보일듯 말듯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잠깐, 글을 꼭 까만색으로만 써야 하는 건 아니잖아?
어디 시험에 제출할 것도 아니고 그냥 내가 쓰고 내가 볼 글인 걸.
게다가 이면지를 꺼내든 것도 컴퓨터에 옮기고 나면 버리겠다는 의지가 아니었던가.
그렇네. 왜 파란색으로 쓰면 안 되지? 누가 그렇게 정해놨나?
사실 그 '누가'는 바로 나 자신이다.
글을 검은색으로만 쓰라고 시킨 건 바로 나다.
학교에서, 책에서 검은색으로만 쓰인 수많은 글들을 읽어오면서 나만의 법을 만들어 왔다.
빨간색으로 사람 이름을 쓰지 않는 나의 오랜 예의 역시 사실은 미신인 것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나로 변하고 싶다면 이 고정관념들부터 깨부셔야겠다.
글을 까만색 볼펜으로만 써야 한다는 아주 사소한 것부터
나는 어떤 사람이다, 친구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이다,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까지
내가 아는 모든 명제가 어쩌면 참이 아니라 거짓인 건 아닌지 의심해 보면서.
내일은 빨간 볼펜으로 써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