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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송 Nov 11. 2024

이름 석자

오명을 남기지 않는 것

직장생활 때 잘한 것 중 하나는, "도움이 된다면 내 이름 석자를 써먹어라"라고 신설부서 팀원들에게 말한 것이다. 나하고 근무했다고 하면 적어도 손해는 보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당시 팀원들은 공장 생산팀에서 지원했거나, 국내영업팀장 휘하에서 홀로 수출업무를 수행했거나, 경력사원으로 채용된 사람들로서, 신설된 해외영업팀의 팀장인 나하고는 모두 처음으로 만나 일하게 된 사람들이었다. 


팀원들은 신이 나서 일을 했고 탁월한 성과도 냈다. 시간이 지나면서, 승진을 하기도 하고, 타 부서나 해외법인 또는 외국계 기업 등으로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 후로도 서로 오랫동안 연락을 취해 왔다.


지난날 사회생활하면서 만났던 사람들의 이름 석자만 들으면 그 사람 얼굴과 인품, 특징, 장. 단점, 기억에 남는 말과 행동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특히, 기라성 같았던 직장상사들 중에 지금 생각해 봐도 변함없이 존경스러운 분들이 있는가 하면, 개인의 영달을 위해 달콤하고 그럴듯한 조언 아닌 조언을 해준 상사도 있었고, 심지어는 양심을 파는 인격미달의 상사도 여럿 있었다.


사람들의 판단력에는 그다지 큰 차이가 없기에, 개개인의 평판에 따라 옛 직장 동료들 간의 만남에도 차이가 많이 나는 것 같다. 개인적인 출세를 위해 동료나 부하직원들에게 양심을 팔았거나, 해서는 안될 행동을 했거나, 심지어 자신이 행한 잘못된 행동에 대해 전혀 인지를 못하는 사람들은 퇴직 후 많이 외로워 보인다. 


한편, 해외에 살다 보면, 한국에서는 거의 만날 기회가 없는 사람들도 이런저런 이유로 연락이 오는 경우가 많다.


평생에 한 번일 수도 있는 방문객들에게 바쁨을 핑계로 소홀히 대접했다간, 나중에 나 스스로 후회하게 되고, 그들로부터도 평생 직. 간접적으로 섭섭한 감정을 돌려받을 수 있기에, 누구든 성심성의껏 응대를 할 수밖에 없다.


수십 번 방문한 관광지도, 아주 오랜만에 오는 듯, 유쾌하게 안내하는 것이 후회하지 않는 해법이자 아쉬운 미련을 남기지 않는 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정말 내키지 않는 방문객에게는 정중히 양해를 구하고 만남을 피하게 된다.

육십갑자를 돌고 난 뒤부터는 남에게 보이는 인생이 아닌 오롯이 나를 위한 삶을 살고 싶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선배로서 인연을 맺었던 후배들에게 내가 먼저 연락을 하지 않는 것도, 내가 철들고 난 뒤부터 몸에 익힌 하나의 습관이다. 드물게 선의로 내가 도움을 주었던 좋은 인연은, 묵은 된장처럼 가끔씩 반추하는 추억으로 가슴에 남겨두는 것이 더 마음이 편하고 좋기 때문이다. 


한편, 오랫동안 좋은 인연을 맺고 지속적으로 만남을 가져오고 있거나,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은 지인들에게 정기적으로 연락을 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득 생각나는 옛 친구들에게는 기회가 될 때마다 즉시 연락을 취해 만나기도 한다. 나중은 의미가 퇴색되거나, 이미 늦어 버리는 경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월이 가면서, 이제는 이 백수에게 연락 오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 어떤 의미에선 편하다. 그리고 나름 고독을 즐기는 법을 익혀가고 있다.


잘 난 것 하나 없는 내가 꼭 지키고 싶은 소박한 바람은, 어제의 나를 변함없이 지키고, 내 이름 석자에 오명을 남기지 않는 것이다. 


그럼 훗날, 세상에 큰 업적을 남기거나 이름을 떨치지는 못했더라도, 적어도 한 세상 후회 없이 잘 살았다는 마지막 말은 남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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