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를 만나다
"시카고 여행 가자!"
남편 회사의 N박사님이 인디애나 주 게리에 파견근무를 나왔단다. 남편은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기회를 포착한 하이에나처럼 그 집으로 놀러 가자고 했다. 뉴욕여행을 공짜로 하더니 이제는 회사직원의 집에 방문하자고?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박사님 댁에?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남편은 무슨 생각인지 밀어붙였다.
메릴랜드 주 그린벨트에서 인디애나 주 게리까지는 차로 13시간 정도 걸렸다. 남편 혼자 운전해 꼬박 하루가 걸렸다. 새벽에 출발했는데, 저녁에 도착했다. 내가 운전면허를 딴지 1년이 조금 지났을 때였다. 혼자 천천히 국도를 달려 한국마트에 다닐 수 있었지만 고속도로는 엄두도 내지 못하던 때였다.
N박사님은 나보다 한 살 어린 젊은 여자분이었다. 남편과 친하다고 느꼈지만 기혼자라는 말에 안심했다. 방 두 개 중 하나를 흔쾌히 내어 주었다. 우리 아이들을 위해 계란 장조림과 멸치볶음 등 밑반찬까지 만들어 놓고 기다렸다. 아이들은 거기서 유난히 밥을 잘 먹었다. 너무 많이 먹어 민망할 정도였다.
냉장고 안의 반찬통과 음료수 병들이 줄 맞춰 서 있고 화장실 수건이 반듯반듯했다. 애니메이션에서 튀어나올 법한 인형들이 나란히 앉아있고 소품 하나하나에서 각이 느껴졌다. N박사의 깔끔한 성격을 엿볼 수 있었다. 정리 정돈에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이들이 인형들을 만지며 노는 것을 기꺼이 허락해 주었다. 손수 인형을 들고 목소리를 흉내 내며 아이들과 얼마나 잘 놀아주시던지. 감동이었다.
아이들이 자고 우리 셋은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아빠는 사우디아라비아에 갔다 오셨어요."
N박사가 말했다.
"정말요? 우리 아빠도 거기 갔었는데. 나 5학년때 돌아오셨어요."
소름이 돋았다. 그녀에 대한 나의 경계심이 한 번에 해제되었다. 우리는 금세 언니 동생이 되었다.
그제야 안심했고 나는 눈 딱 감고 신세를 지기로 했다.
우리의 목적은 시카고 여행이었다. 미국에서 3번째로 큰 도시, 일리노이 주의 시카고! 게리에서 40분 거리에 있었다. N박사가 출근한 사이 우리 가족은 시카고로 떠났다.
시카고에서 가장 높다는 윌리스 타워에 올랐다. 110층 높이라는 말만 들어도 어질어질했다. 103층에 있는 전망대에서 시카고 시내가 한눈에 보였다. 유리로 만든, 바닥이 훤히 보이는 스카이 덱에 차례로 올라갔다.
첫째와 막내는 한 발로 서고 자세를 바꿔가며 장난을 친다. 둘째도 웃으면 포즈를 취했고 남편은 슈퍼맨처럼 한 팔을 뻗고 나는 시늉을 했다.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 아찔하고 조마조마했다. 절대 오르지 못할 것 같았지만, 입장료를 생각하며 나도 용기를 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스카이 덱에 겨우 올라가 억지웃음을 지었다.
난 사진만 얼른 찍고 기어 내려왔다. 103층 높이를 고스란히 실감했다. 비행기를 탄 것 같기도 하고 구름 속에 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멀미가 날 정도였다.
시카고의 겨울은 몹시 추웠다. 기온이 영하 15도를 오르내렸다. 두꺼운 외투에 온몸을 파묻고 모자와 장갑, 목도리까지 완전무장을 해도 살을 에는 듯했다. 그렇게 추운 겨울에 걸어서 시카고를 돌아다녔다. 그런데 맛집이라고 검색한 식당이 없어져 버렸단다. 배고픔과 추위로 한계를 느낀 아이들과 나는 아무 데나 들어가자고 아우성쳤다.
당황한 남편이 근처 국숫집으로 안내했다. 뜨끈한 국물을 들이켜고 싶었으나 미적지근한 국수가 나왔다. 무슨 맛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시카고의 혹독한 겨울을 잠깐 달랬다는 기억뿐이다.
저녁에는 남편친구 집으로 갔다. 자취하며 동고동락하던 대학동창이라고 했다. 대학졸업 후, 10년 넘게 만나지 못했다는 친구는 일리노이 주 시카고 위쪽에 살고 있었다. 그는 미국 유학을 나왔다가 그대로 자리를 잡은 모양이었다. 운 좋게 남편과 연락이 닿아 저녁을 먹기로 한 것이다.
운전대를 잡은 남편은 들뜬 마음으로 시카고를 빠르게 벗어났다. 겨울 해는 금방 졌다. 어둡고 낯선 길을 달리자, 나는 유난히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50마일(80km) 속도의 국도를 달리자 좀 편안해졌다. 남편친구 집은 멋진 싱글 하우스였다. 나는 어색했지만, 남편과 친구는 얼싸안고 오랫동안 인사를 나누었다. 그 댁 외동아들은 우리 삼 형제를 만나 화색이 돌았다. 아이들끼리도 금세 친해져 노는 것이 신기했다.
남편은 자취하던 때의 일화를 술술 풀어냈다. 다시 만난 반가움과 오래된 이야기들을 꼭꼭 씹으며 남편은 친구와 오래도록 대화를 나누었다. 꽤나 묵직했던 추억의 보따리가 가벼워질 때쯤 안주인께서 한국 소주와 수육을 내오셨다. 운전을 위해 잘 참던 남편은 소주를 보자,
“자기가 운전해.”
내게 이 한 마디를 던지고 급하게 소주를 마셨다. 오래간만에 도수가 높은 술을 마신 남편은 선을 넘은 듯 보였다. 말릴 사이도 없이 남편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순식간에 취할 때로 취해 버렸다.
밤 11시쯤 남편친구 가족은 선약이 있어 나가야 한다고 했다. 술자리는 급 마무리 되었다. 운전에 자신이 없어 신세라도 져야 할까 잠깐 고민했던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내가 초보 운전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게리의 N박사 집에도 너무 늦지 않게 들어가야 한다는 사명감에 결국, 나는 운전대를 잡았다. 아니 잡을 수밖에 없었다.
남편은 차 타기 직전, 오바이트를 했고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지경이었다. 남편은 차에 타자마자 곯아떨어졌다. 나는 50마일의 직선거리였다는 것만 기억하고 괜찮을 거라고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내비게이션도 잘 보지 못하는 초보였지만, 조심스럽게 길을 나섰다. 처음 시작하는 국도는 할 만했다. 길을 좀 봐두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카고 시내를 통과해야 했다.
시카고로 진입하자 갑자기 왕복 16차선처럼 넓은 도로가 나타났다. 실제로 몇 차선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렇게 넓은 고속도로는 처음이었다. 제한 속도는 70마일(113Km)이라지만 흐름에 맞추어 달리다 보니 75마일(120Km)도 넘게 내달려야 했다. 속도는 너무 빠르고 네비를 볼 사이가 없었다. 시카고를 나와 게리로 빠져나가야 한다. 그런데 네비에 표시된 길을 몇 번이나 놓치고 다시 같은 곳으로 돌아왔다.
“여보, 일어나! 길을 모르겠어!”
술에 취해 자는 남편을 다급하게 깨웠다. 두 손으로는 운전대를 부여잡고 그저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일어나라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다섯 식구의 생명이 내 손에 달려 있었다. 남편이 겨우 눈을 떴으나 횡설수설한다. 취한 남편의 지시에 더듬더듬 길을 찾아 다시 몇 번 만에 겨우겨우 길을 찾아 나왔다.
휴~
세상에나, 몇 년치 수명이 줄은 것 같다. 아찔한 시카고 시내를 무사히 통과해 게리 집에 도착했다. 그제야 안도했다. 이렇게 갑자기 시험대에 날 떠밀었던 남편이 야속했다.
다음날, 남편은 일어나지 못했다. 콩나물도 없어 변변한 해장도 못하고 물만 들이키며 과음의 고통을 온전히 감당해 내야 했다. 제발 일어나 주길 바라며 우리 넷은 남편 곁에서 방바닥만 긁고 있었다. 오후 늦게 남편은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났다.
비싸게 주고 산 시티패스(주요 관광지 입장권을 모아 둔 책)가 아까워 술병 난 남편을 끌고 시카고로 갔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필드 자연사 박물관을 두 시간 관람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일찍 문을 닫는다고 했다. 너무너무 아쉬웠다.
결국, 게리 집으로 돌아왔다. 일찍 퇴근한 N박사가 있었다. 우리는 치킨과 맥주를 사 와 둘이서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슴 깊은 곳에 숨겨둔 이야기까지 꺼내 놓으며 우리는 더 친한 친구가 되었다. 참 좋은 사람을 알게 되어 기뻤다.
우리 사정을 들은 N박사가 하루 더 머물게 해 주었다. 그래서 밀레니엄 공원에 있는 클라우드 게이트(Cloud Gate)에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애들러 천문대, 쉐드 아쿠아리움도 덤으로 구경했다. 밸루가 웨일이라는 흰 돌고래가 가장 생각난다. 머리에 혹이 있고 사람들에게 친근해 더 사랑스러웠다.
시카고 미술관은 근처에도 못 가고 메릴랜드 그린벨트 집으로 돌아왔다. 시카고에서 봤던 커다란 오르골이 생각난다. 오르골 안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꿈 속에 있다 나온 기분이었다. 현실로 돌아와 보니 산더미 같은 빨래와 아이들의 밀린 방학숙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은 숙박료를 아끼고 시카고 여행을 했다고 웃을지 모르겠다. 나는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 내키지 않았지만, 좋은 친구를 알게 되어 뿌듯했다. 이런 것이 살아가는 재미 아닐까. 사람 간의 부대끼고 알아가는 재미!
동상이몽의 시카고 여행은 정말 스펙터클 했다.
한편으로 아쉬움이 너무 커서 다시 가고 싶은 곳이다. 시카고!
이듬해, N박사를 메릴랜드 우리 집으로 초대했다. 워싱턴 D.C. 국회의사당 투어를 함께 했고 볼티모어에서 블루크랩을 먹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김치를 나눠 주고 가끔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친구가 되었다.
엄청 더운 요즘이다. 시카고를 달리던 그날을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지고 시원하다.
* 시카고 시티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