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물오름달
3부
아이들은 자주 아프다. 특히 낮보다는 밤에 더 많이 아프다.
병원도 갈 수 없고, 부모로서 더 특별하게 해 줄 것도 없을 때 더욱더 아프다.
아이들은 알까? 아이가 아프면 부모의 마음은 그보다 더 아프다는 것을.
비나리가 돌이 되어갈 즈음, 딱히 원인도 없이 열이 지속되었다. 열이 나는 첫날에는 ‘열감기’인가 하고 병원에 데려가 약을 타왔다. 하지만 약을 먹어도 열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하고 아이를 간호했다. 고열이 이틀째 지속되자, 나는 병원을 바꾸어 다시 아이의 상태를 확인했다. 여러 종류의 해열제를 받아와 주기적으로 먹여주는 것밖에는 답이 없다고 했다. 열은 약을 먹은 순간만 조금 내려갈 뿐, 여전히 잡히지 않았다. 셋째 날 나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 유명한 또 다른 병원에 갔다.
이 당시 나는 아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병원에 데려가 의사 선생님의 진찰을 받고 괜찮다는 말을 듣는 것밖에 없었다. 아니, 어쩌면 이마저도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불안한 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나의 불안한 마음으로 피검사, 소변검사 등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검사들을 동원했다. 물론 어떠한 의심되는 문제도 없다고 했다. 그리고 다른 병원에서도 같은 말만 되풀이되었다. 특별한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돌발진*으로 의심되니 해열제를 먹여주고, 시원하게 해 주라고만했다.
*돌발진: 주로 돌 전후 무렵에 고열을 동반한 증상을 보이는 경우가 많아서 ‘돌치레’라고도 부른다. 증상은 6-15개월 사이에 발생하는 발열, 발진 등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돌 즈음 나타나서 ‘돌발진’인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돌발적으로 나타난다는 의미에서 ‘돌발 발진’이라고 한다.
야근 후 돌아온 남편은 힘든 내색도 없이 곧바로 아이의 간병을 시작했다. 밤새 아이의 열을 떨어뜨리기 위해 열심히 2시간 간격으로 해열제도 먹이고, 미지근한 수건으로 목-이마-얼굴 순서대로 열심히 닦아주었다.
비나리는 해열제를 먹은 직후에는 잘 놀았으나, 다시 열이 오르면 기운 없이 밥도 먹지 않고 우유도 거부하며 힘들어했다. 그런 아픈 아이를 바라보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 힘든 시간이었다. 나는 이 조그마한 아이가 열과 싸우느라 끙끙거리는 모습을 보며, 차라리 내가 대신 아파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아픈 비나리의 수발을 드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잔 나는 비몽사몽인 채로 아이 옆에 누워있었다. 그때, 남편이 비나리 이마를 어루만지며 나지막이 노래를 불렀다.
“아빠 손은 약손, 우리 비나리 아프지 마라~”
“아빠 손은 약손, 우리 비나리 아프지 마라~”
남편의 그 나지막한 목소리는 나로 하여금, 어릴 적 내 아픈 과거를 떠올리게 했다.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간간이 기억나는 내 유년 시절의 짧은 기억 중 몇 가지는 마치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되는 일이 있다. 가령, 사진 속 내 모습 표정 등을 보고도 그 시기에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맞춤법이 다 틀린 내 일기 속 나의 감정 상태에 대해서도 뚜렷하게 말이다.
그리고 남편의 목소리에 떠오른 기억 속의 나는 정확히 몇 살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대부분의 의사결정이 가능한 시기였던 것 같다. 그 어린 나이에 무엇을 잘못 먹었는지 복통과 잦은 설사로 이불속에서 근근이 엄마가 떠먹여 주신 죽을 먹고 잠이 들랑말랑 할 때였다.
엄마는 “엄마 손은 약손, 우리 아기 아프지 마라~.” 노래와 함께 내 배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주셨다. 한참을 쓰다듬던 엄마는 갑자기 내 손을 잡고 기도를 하셨다, “우리 아기 아픈 거 다 나에게 주고, 우리 아기는 아프지 않게 해 주세요~.”
엄마의 목소리와 함께 나는 살포시 잠이 들었었고 잠에서 깨어보니 아팠던 것이 정말 거짓말같이 나았다. 엄마의 기도 덕분에 나은 걸까.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데 얼마 뒤 엄마가 아프셨다.
아차. 엄마의 기도처럼 나 대신 아프신 걸까. 하지만 나는 그 순간, 이전에 너무 아팠던 기억 때문에 ‘엄마 대신 내가 다시 아프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지 못했다. 그 기도하지 못했던 순간은 고작 몇 시간도 되지 않았지만, 나를 짧게나마 죄책감에 시달리게 했고, 나는 엄마에게 “나 대신 엄마가 아픈 거 같아요” 라며 미안하다고 울며 말했다.
그 이후 상황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순간의 나의 마음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되고 있다.
과거의 기억 속에서 돌아와 보니, 비나리는 며칠 동안 열과 싸우느라 작디작은 몸이 더 야위어 있었다. 한겨울에 기저귀와 런닝만 입고도 불덩이가 된 아이의 몸을 끌어안고 나는 그날의 나의 엄마처럼 기도했다.
‘대신 아파줄 수 있다면, 내가 대신 아프게 해 달라고.’
그렇게 나는 이기적인 딸에서 이타적인 엄마가 되는 걸까. 그때의 감정이 다시 한번 떠올라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그때 나는 나의 아픈 고통에서 벗어날 생각뿐이었는데, 엄마는 아픈 나를 보고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항상 침착함을 유지하는 남편도, 아픈 아이 앞에서는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걸 보니 아이의 힘없는 몸짓만큼 아픔이 느껴졌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며 굳이 연락을 잘 하지 않으려고 하시는 시부모님께서도 어김없이 연락이 올 때가 있다. 비가 오는 날, 눈이 오는 날, 날씨가 좋지 않은 날에는 항상 새벽부터 카톡이 와있다.
오늘 눈이 많이 온다네. 운전 조심.
부모는 자식이 철들 때까지 잘 거두기 위해 마음 편히 쉴 수 없다는 말이 있던가. 아직도 우리 부모님은 철부지 딸래미가 육아에 지쳐 있는 모습을 보고 더 많이 안쓰러워 하시고 있다. 우리 나이가 이제 결코 적지 않지만, 그래도 부모님께 우리는 아직도 챙겨주고 싶은 아들-딸 인가보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아픈 나를 안고 열심히 기도하시던 엄마도 지금의 나보다는 어렸다는 사실에 마음 한 켠이 너무 시리다. 이제는 나도 그 마음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으니, 이제부터는 우리가 부모님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드릴 수 있지 않을까.
다행히도 비나리는 걱정스러웠던 열과의 싸움에서 아름다운(?) 열꽃**을 피우고 이겨냈다.
그리고 우리는 여자에서 엄마로, 남자에서 아빠가 되어간다.
**열꽃: 열이 내린 후 생기는 빨간 장밋빛의 반점 또는 반점 구진 형태의 피부발진
- 비나리의 육아일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