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열매달
“어른들은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분명 나도 그 시기 아이들만의 세계에 살았고, 어른들이 이해해주지 못하는 것들에 불만이 많았었다.
그러나 어른이 되고 나니 아이들의 마음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지금은 그저 어른들의 세계에 살면서, 알 수 없는 아이들의 세계가 이상하게 느껴질 뿐이다.
비나리는 남편의 유전자를 많이 물려받았다.
외모는 남편의 어릴 적 사진과 비나리의 아기 사진이 동일 인물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닮았다.
그뿐만 아니라, 아기임에도 불구하고 근엄하고 진지하게 행동했으며, 따로 가르치지 않아도 첫째의 ‘의젓함’을 가지고 있었다. TV에 나오는 별난 아가들의 행동들, 예를 들어 핸드폰을 변기에 넣는다든지, 엄마 화장품으로 벽에 그림을 그린다든지 하는 이야기는 정말 딴 세상 아이들 이야기 같았다.
하지만, 비나리에게 동생이 생긴 이후, 그런 기묘한 일들이 우리 집에도 일어나기 시작했다.
냉장고에서 장난감 자동차가 나오는 건 놀랍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힘으로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고, 장난감이 보였다 사라졌다 하는 것 자체가 신기하고 재미있는 놀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옷장에서 발견된 씹다 만 사과 조각과 썩기 직전의 포도알 등은 나에게 왠지 모를 공포를 느끼게 했다. 이 과일들은 도대체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던 것일까…?
이런 의미 불명, 나로서는 이해가 불가능한 기묘한 일들은 날이 갈수록 진화하였고, 비난 우리 집에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얼마 전 비나리의 친구 엄마는 어린이집 가방을 열었다가 기절할 뻔했다고 한다. 곤충을 좋아하는 비나리 친구가 매미 애벌레 허물을 주워서 가방 가득 넣어 놓은 것이다! 나는 말로만 전해 들었지만, 우리 집에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영어 시기의 발달 사항에 대해서는 많은 서적에서도 소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아기가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입으로 가져가는 것은 입을 통해 사물을 인지하는 ‘구강기’라는 시기였기 때문이었고, 새벽에 갑자기 소리 지르며 우는 이유는 이가 나면서 느끼는 이앓이(통증) 때문이라는 것도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이런 행동들은 나 또한 직접 경험하면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이가 말을 시작하면, 대화를 통해 비나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말을 하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이해가 안 되는 행동들이 더.더.더. 많아졌다. 심지어 이러한 행동들은 서적에서는 찾기 어려웠고, 육아 동지들과 함께 추측만 할 뿐이었다.
말문이 늦게 튼 우리의 비나리는 말을 시작하자, 고장 난 라디오처럼 똑같은 말을 반복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아이가 말을 못 알아드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가, 잘 들리지 않는 것인가 걱정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괜한 걱정이었다. 말도 잘 알아들었고, 아주 작은 소리도 잘 듣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계속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나와 대화 속에서 ‘똑같은 질문’에 대답하는 ‘달라진 말투’와 ‘억양’등을 재미있어하는 거 같다. 또는 똑같은 질문 공세 후 나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려고 하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엄마, 우리는 어디 가는 거예요?”
“이제 집으로 가자! “
“엄마, 우리 집에 가는 거예요?”
“맞아. 이제 집으로 가요~”
“엄마, 근데 우리 집에 가요?”
“응. 집으로 가고 있어! “
“엄마, 우리 집으로 가요?”
“그래. 집으로 가는 거야!”
“엄마, 우리 어디 가요?”
“(목소리 톤이 조금 올라가서) 집으로 간다니까! “
“엄마, 우리 집으로 가요?”
“(대답 안함)……………”
“엄마, 엄마!”
“(나긋나긋하게) 응?”
“우리 이제 집으로 가요?”
“(아주 큰 소리로) 그래!! 우리 집으로 가자!!! “
요즘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 공세가 이어지는데, 아무리 대답해 주어도 끝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대화는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시작되어 네버엔딩 스토리가 된다. 호기심 많은 아이의 질문에 대해 모두 대답해 주는 것이 좋다고 들었지만, ‘이건 뭐예요?’, ‘왜요? 질문이 시작되면, 개미지옥처럼 쉽게 나올 수 없다.
이럴 때 내가 사용하는 방법은 쉬운 질문을 이용해서 내가 역으로 질문하는 것이다!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음..음..’ 하면서 고민하는 시간이 생기면서 질문 공세가 줄어들고 그사이 화제를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아이에게 적용될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비나리에게는 잘 통한 방법이다.
첫째는 얌전한 편이었고, 키가 크면서 손이 스위치에 닿기 시작하자 조심스럽게 한번 눌러보고 한참을 관찰하고 다시 눌러보았다. 그마저도 “하지 마!”라고 하면 눈치를 살피고 반복하지 않았다.
그런데, 둘째는 달랐다.
손이 닿지도 않는데, 아기 의자를 가져와 밟고 올라가서 스위치를 누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하지 마!”라는 나의 말을 “더 해줘!”로 해석했다.
귀여운 얼굴로 배시시 웃으면서 껐다-켰다-껐다-켰다 쉬지 않고 눌러댄다.
특히 저녁이 되면, 둘째는 더욱 청개구리가 된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열심히 달려가서 냉장고 문을 활짝 열어놓고, 주스 묶음을 가져와서 빨대를 모두 꼽기 시작한다. 이러한 행동에 대해 하지 못하게 하면 할수록 더욱 떼를 쓰고 반드시 본인이 목표한 것을 이행하려고 하였다.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
첫째와 둘째는 완전히 달랐다.
첫째는 변기에 장난감을 넣고 물을 내려서 변기를 막히게 한 경우가 있었다면, 둘째는 그냥 거기에 손을 넣고 신나게 물놀이를 하였다.
첫째는 정해진 규칙을 좋아하는 성향으로, 자신의 그릇과 숟가락을 사용하는 것을 선호하였는데, 둘째는 형의 것 또는 엄마아빠 숟가락으로 먹는 것을 좋아하고, 나아가 꼭 손으로 상대방 그릇의 음식을 뺏어 먹었다. 태어날 때부터 본인이 사랑받기 위해 형보다 더 강한 액션이 필요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일까? 그랬기 때문에 첫째를 키우면서 경험하지 못했던 일들이 너무 많았다.
도대체 왜 이렇게나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하는 것일까? 이럴 땐 어떻게 반응하고 가르쳐야 할까?? 둘째는 더욱이 나의 말을 듣지 않기 때문에 훈육에 잇어서도 고충이 많았다.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인데, 둘째는 내가 혼낼 때는 반대로 하거나 더욱 심하게 떼를 쓰고 말을 듣지 않지만, 첫째가 뭐라고 말을 하면 멈추고 그 말을 듣는다! 그래서 요즘은 첫째 보고 둘째의 개구쟁이 장난들을 제지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엄마보다 형을 좋아하는 둘째를 위한 훈육 방법이기도 하고 아이의 마음은 아이가 더 잘 알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아이들의 배움의 속도는 정말 빠르다. 생각해 보면 처음 태어났을 때는 울음으로 모든 것을 표현했었다.
배가 고프면 ‘응애’, 기저귀가 찝찝하면 ‘응~애’, 잠이 오면 ‘으응애’ 등 울음의 뉘앙스와 억양(?)에 따라 아이의 욕구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곧 목이 마르면, ‘응애’라는 말 대신 ‘엄마 물’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빠르다는 것을 알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른들의 대화까지 곧잘 따라 한다.
심지어 아기 때 했던 어른들의 대화와 어휘들을 기억했다가 따라 하기도 한다. 가령 영유아 시기 봐주시던 사람의 말투를 따라 하기도 하고, 특정 표현을 언제 해야 할지도 아는 것 같다.
주말마다 사고 치는 둘째를 보며 나는 “여보~ 아기가 사고를 쳤어요! 빨리 와보세요~! “라는 말을 자주 했었는데, 어느 날 둘째의 사고를 목격한 첫째가 똑같이 말을 하는 것을 보았다.
할머니와 함께 자란 지인의 아이는 아빠 친구가 놀러 오니 ”애미야, 애비 친구가 왔구먼 “이라고 말했다고도 한다.
이렇게 아이들은 환경에 따라 보고 배우는 부분이 있지만 성향에 따라 행동하는 것들이 있다.
첫째는 성향이 비슷한 아빠와 같은 행동을 하는 반면 둘째는 나와 비슷한 행동들을 했다. 우리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아도 형성되어 있는 성향을 보며 신기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서로 다른 성향으로 태어나 함께 자라기 시작했다. 마치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남녀가 사랑의 힘으로 서로에게 맞춰 가듯 우리 아이들은 다른 유전자를 물려받았지만, 같은 환경에서 자라며 서로를 닮아갔다. 이렇게 서로를 닮아 가는 것은 우리 부모가 일부러 가르친 것은 아니었다.
갑자기 나타난 동생의 존재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던 비나리와 반대로 동생은 형이 자신을 때리고 싫어해도, 굴하지 않고 형이 하는 모든 행동을 똑같이 따라하면서 쫓아다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동생의 눈높이는 형과 같아졌다. 동생이 이제 세 살이 되었지만, 형이 세 살 때 좋아하던 ‘뽀로로’ 대신 네 살 형과 똑같이 ‘고고버스 고든‘을 함께 좋아하고 있다.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다.
그리고 언젠가 막무가내로 집에서 떼를 쓰는 둘째를 훈육하기 위해 아주 무섭게 혼낸 적이 있다. 소파의 틈새마다 주수를 부어 놓는 알 수 없는 둘째의 행동을 더는 이해할 수가 없어 혼내기로 한 것이다.
“둘째야!! 너 자꾸 주스를 부으면 어떻게 해! 너 좀 혼나자!! “
그런데, 이 심각한 상황을 이해한 둘째가 발 빠르게, 형의 뒤에 숨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눈치 빠르고 배려심 많은 첫째가 둘째를 감싸고돌았다.
“엄마! 동생이 주스를 쏟았어요? 내가 휴지를 가져올게요! “
처음 둘의 만남에서 느낀 서로에 대한 질투 이후 형제애가 강해지기 시작하면서 둘은 더없이 사이가 좋아졌다. 가끔은 둘이서 단합하여 우리(부모)에게 장난을 치기도 한다.
알 수 없는 행동들에 대해서는 정말 어떻게 생각해도 여전히 이해되지 않지만, 둘이 함께하는 특정 행동들은 그들의 세상에 꼭 필요한 행동일 것이다. 그리고 그 행동에서 아이들은 천천히 성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끝나지 않는 질문을 하는 비나리와 옷장 가득 과일을 숨겨두고 청개구리처럼 말을 안 듣는 둘째의 행동들을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다소 어렵긴 하지만, 아이들에겐 그들만의 이유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을 까마득히 잊은, 이미 어른이 된 우리는 아이들이 그 시절 세계를 온전히 느끼고 즐길 수 있도록 우리 방식으로 맞추려 하기보다 그저 조금 더 기다려 주는 건 어떨까.
오늘도 아이들과 함께하는 우리 집은 전쟁터가 따로 없지만, 우리는 아이들이 그들의 세계에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배워 나갈 수 있도록 존중해주려고 한다.
- 비나리의 육아일지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