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과 처음 단둘이 만난 날에요. 그 사람이 저한테 말했어요. 고아라고요. 엄마, 아빠 없이 자랐다고요. 저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처지를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 사람의 삶을 거꾸로 그려봤어요. 그렇게 아픈 단어를 담담하게 뱉어내기까지의 긴 시간을 생각해 보았죠. 그리고 그 시간을 상상하는 일이 가슴 아파 결국 사랑을 하기로 결심했던 것 같아요. 사랑에 빠지는 일은 어떤 것이 이유가 될지 참 모르는 일이에요.
헤어지고 나서 돌아보니 어쩌면 도전 정신이었나 싶을 때도 있어요. 그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버킷리스트가 생겼지요. 살면서 생일상을 받아 본 적 없다는 그의 말도, 크리스마스를 챙겨본 적 없다는 그의 말도, 해외여행을 가본 적 없다는 그의 말도, 해본 적 없고 먹어본 적 없고 아무튼 없다는 경험은 전부 제 버킷리스트가 되었어요. 아이를 사랑하면 그 아이에게 모든 경험을 시켜주고 싶다던데 이런 마음일까 하고 추측해 보곤 했어요. 못해 본 일들, 내가 전부 해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가 내 옆에 있는 시간 동안은 내가 그 사람의 경험이 되어주고 싶었어요. 그 사람이 살면서 상실하고 상실하다 필요 없다고 치환해 버리고 만 유대와 사랑의 경험 말이에요.
그는 오랫동안 혼자서 시간을 버텼고 버티는 일은 특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특기는 행복의 벅참보다 자신의 삶을 평온하고 무탈한 쪽으로 흐르게 하는 것이 나은 삶이라고 결정지었던 것도 같아요. 그런 그를 사랑하는 일은 스무고개 하듯 조심스러워야 해서 쉽지 않았지만, 기록 도전이라고 생각하면 또 그것 나름으로 버텨지는 시간이었죠. 가끔 혼자 숨죽여 울면 지금 내가 하는 것이 사랑인지 도전인지 헷갈렸지만 그래도 좋았어요.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을 하는 것과 도전을 하는 것, 쓰러지는 마음을 다잡고 용기를 잃지 않고 자신의 한계를 시험한다는 점에서 꽤 닮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를 만나는 동안 나는 자꾸만 나를 일으켜 세워야 했습니다. 타인을 받아들이는 일은 때론 자신을 버려야 가능하다는 것을 잘 몰랐던 그 사람은 다가오는 마음을 온전히 받지도 또 주지도 못했어요. 사랑을 하는 자신의 마음도, 자꾸만 커가는 상대방의 마음도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렇게 모르는 채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덜 상처받는 일이라고 여기면서 적당한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그 사람의 삶은 파고들기가 어려웠지요. 하지만 자꾸만 그를 더 사랑하게 되어버리는 나는 그런 그의 곁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아파했던 것 같아요. 그는 파지티브보다 네거티브의 점수를 크게 매기고 그것들을 두루 피하면서 사는 것이, 삶을 안녕하고 무사하게 사는 방법이라고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저는 너무나 많은 네거티브였어요. 나는 낭만과 ‘일부로’를 사랑하는 사람, 뒤로 돌아가더라도 마음에 밟히는 조약돌을 주워야만 하는 사람이었거든요. 하필 저는 그런 그를 사랑해 버렸고 그 역시 당신의 삶과 다른 삶을 사는 저를 받아들이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의 곁에서 도전을 하기로 결심하고서는 많은 것들이 참아졌어요. 언젠가 그를 만나고 몇 달 후 쓴 일기장에 적혀있기를, 마음의 기로를 재설정하기로 했다. 고 비장하게 쓰여있더라고요. 저는 논개가 되기로 결심했죠.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서만은 아니었고 사랑 그 자체를 위한 투신이었던 것 같아요. 그 어떤 것도 계산하지 않고 그를 사랑해 보리, 때론 살면서 그런 사랑으로 나도 살아냈던 것처럼. 하고 말이에요. 지가 뭐 전쟁 영웅이에요, 뭐예요. 비장하기 짝이 없어요. 하지만 그래서 사랑을 온전히 주지 못하고 주저하는 그의 곁에서 많이 울어도 괜찮았던 것 같아요. 얄미운 말을 하고 매정한 소리를 해도 나에겐 깨야 할 기록들이 있어서 버텨졌어요. 그리고 그 과정들이 그리고 나에게 유의미할 것을 믿었던 것도 같아요. 나는 우리가 만나는 동안 우리의 사랑이 나와 당신 모두에게 삶에서 좀 더 멀리 갈 수 있는 자유를 주길 바랐습니다.
결국 우리는 온전한 자유를 찾지 못한 채 레이스에서 내려온 것도 같아요. 하지만 그가 나를 떠나고 아무것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었어요. 그를 만나며 해주고 싶었던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달성했거든요. 모든 기록 달성이랄까요. 지치고 힘들었던 마음들도 돌아보니 그 사람의 삶에서 좋은 장면들로 기록될 것 같아서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돌려받겠다는 마음 없이 행복을 주려 노력했던 저도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요. 남겨진 기록은 최초가 많아서 깨지기 힘들 거예요. 어쩌면 저도 조금 사악한 부분이 있어 저를 두고두고 마음에 기록한 채로 살라는 흑심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급하게 달리다 넘어져 버려 우리는 결승점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조금은 성장했겠지요. 각자의 결핍을 온전히 마주하고 두려워하고 상처받으면서도 사랑을 놓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 시간이 조금은 나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지 않았을까도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전 나약한 나를 애틋해하듯 당신을 사랑했던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