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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의 봄, 그리고 다시 찾아온 시간

by 행복담기 씨소

스무 살의 봄, 그리고 다시 찾아온 시간

씨소에세이

지금은 수원이 커져서 특례시가 되었지만, 35년 전 수원은 아주 작았다. 높은 건물 하나 없이 팔달문을 중심으로 작은 병원 몇 개와 약국, 생필품과 채소를 파는 시장뿐이었다. 그나마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극장과 롯데리아가 들어서면서 젊은이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나와 그녀의 만남 장소도 팔달문이었다. 우리는 열 살 때 교회에서 만났다. 조용하고 누군가 말을 걸면 오히려 부담스러워하는 성격이 서로 닮았다. 오가는 말은 적지만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잘 헤아렸다.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그녀는 상업정보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진로도 다르고 학교가 멀어서 자연스레 연락이 끊겼다.


스무 살의 어느 봄날,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2년 만에 우리는 팔달문에서 만났다. 못 본 사이 외모도 성격도 바뀌지는 않았을까, 내심 긴장했는데 그녀는 예전 그대로였다. 팔달문 주변을 거닐며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밀린 이야기를 했다. 그러던 중 출출한 배를 채우기 위해 쫄면집을 들어갔다. 매운 것을 못 먹어서 멸치 국수집을 가고 싶었지만, 친구가 한사코 쫄면을 권했다.

“희수야, 여기 얼마 전에 생겼는데 쫄면이 정말 맛있어. 너하고 만나면 꼭 여기 오고 싶었어”

쫄면 한 젓가락에 콧물을 훌쩍거리는 내 모습이 창피했다. 반면 친구는 감동을 했다. 아마도 죽마고우를 만난 기쁨의 눈물이라 착각했던 것 같다. 그날의 감동 덕분인지 그녀는 월급날이면 어김없이 연락을 했다. 쫄면집에서 만나자고. 매운 쫄면을 먹으면서 상사 때문에 스트레스받았던 일을 쏟아내기도 하고, 꼭 성공해서 매운 맛을 보여주겠다며 씩씩거리다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때론 내 전공과 진로에 대한 고민을 들어주며 살며시 쫄면을 한 젓가락 얹어주기도 했다. 알싸한 맛이 입안에 맴돌면 이상하게 위안이 되었다.

내가 중국으로 떠나기 이틀 전, 우리는 여전히 쫄면을 먹었다. 그녀는 쫄면을 입안 가득 욱여넣었다. 홀로 떠나는 친구 걱정에, 또 찾아온 이별에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어느덧 3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었다.


봄이 오면 스무 살의 봄날이 아련하게 펼쳐진다. 얼마 전 그리운 마음을 안고 무작정 쫄면집을 찾아 나섰다. 추억 따라 시간여행을 간다는 내 말에 남편은 말없이 동행해 주었다. 그 분식집이 아직 있을까, 기대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가슴은 두근거렸다. 오래된 시장은 의외로 사람도 많고 시끌벅적했다. 시장을 돌고 돌다 ‘40년 전통 쫄면’이라 쓴 현수막을 발견했다. 아주 작았던 쫄면집이 규모도 커지고 외관도 세련되게 바뀌었다. 쫄면과 만두를 주문하는데 울컥한 마음이 올라왔다. 조심스레 쫄면을 한 젓가락 먹었다. 엄청 매울 줄 알았는데, 맵찔이였던 내가 쫄면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만약 이 자리에 그녀가 있었다면 화들짝 놀라며 이렇게 말했겠지.

‘우와, 예전에는 반도 못 먹더니, 참 잘 먹네. 살찐 이유가 있었구먼.’


엉뚱한 상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남편은 영문도 모른 채 멀뚱히 내 얼굴을 바라봤다. 봄날 같던 친구는 내 곁에 없지만 추억을 나눌 남편이 있어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해 질 무렵,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아쉬워 친구와 거닐던 골목길을 맴돌았다. 그 시절의 친구도 스무 살의 봄도 과거에 묻혔다는 생각에 안타까움이 몰려왔다. 나지막한 담장에 기대어 하늘을 보았다. 봄날의 하늘은 과거에도 지금도 변함없이 맑고 투명한데 나에게만 봄이 사라진 듯했다. 갈 곳 잃은 내 마음을 잡아주듯 남편은 내 손을 힘껏 잡았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한 마디가 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스무 살의 봄은 함께 하지 못했지만, 지금의 봄은 함께 합시다.”

평소에 다정하지도 상냥하지도 않은 남편에게 이런 말을 듣다니. 그리움으로 뒤덮였던 축축한 마음이 뽀송해지는 듯했다. 지금의 봄도 시간이 흐르면 그리운 과거가 되겠지, 문득 오늘을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 시절 그 담벼락에서 봄날의 오늘을 기념하며, 당신과 함께.


“찍을게요. 찰칵!”

#스무살 #봄날 #추억 #쫄면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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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